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독교 변증가이자 작가인 로빈 슈마허의 기고글인 "'영성은 있지만 종교는 싫다'는 태도가 결국 한계에 부딪히는 이유"(Why being spiritual but not religious eventually face plants)를 5월 11일 게재했다.
기독교 변증가로 활동하고 있는 슈마허는 작가로도 활동하면서 많은 책을 냈고 미국 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월스트리트 저널(Wall Street Journal)은 뉴욕의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핫플레이스가 생겼다고 보도했다. 바로 '주일 미사'다.
그리니치 빌리지에 위치한 성 요셉 성당(St. Joseph's Church)의 "최근 주일 오후 6시 미사는 마치 매진된 공연장 같았다. 신자석의 모든 빈틈은 주로 청년들로 가득 찼다. 늦게 온 사람들은 임시로 놓인 플라스틱 접이식 의자에 비집고 앉거나, 로비에 어깨를 맞대고 서서 유리문을 통해 예배당 안을 들여다보았다. 약 90분간 진행된 미사 동안 어떤 이들은 발코니 계단에 쪼그려 앉거나 벽에 기대어 있어야 했다."
이러한 관심의 급증 이면에는 무엇이 있을까? 이 기사는 팬데믹 이후 공동체를 갈망하게 된 현상,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은 전국적인 정치적 폭력 사태의 일환이었던 보수 활동가 찰리 커크(Charlie Kirk)의 피살 등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하지만 또 다른 핵심 원인은 바로 '영적이긴 하지만 종교적이지는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 이하 SBNR)' 삶이 주는 공허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영적 가르침과 경험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 보고가 있지만, 이는 헌신과 명확성의 부재를 동반했다. 그 결과, 지극히 개인적이지만 피상적인 신앙, 힘을 주는 듯 보이지만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하는 영성, 끊임없이 탐구하지만 결코 해답에 이르지 못하는 영적 방황이 나타났다.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아주 작지만 결정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거짓된 것에 기대어 어찌 넘어지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내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삶의 비극
우리는 이미 이에 대한 몇 가지 경고의 신호들을 보아왔다. 심리학 학술지 《커런트 오피니언 인 사이콜로지(Current Opinion in Psychology)》의 주요 연구에 따르면, 영적이면서 종교적이지 않은(SBNR) 사람들은 "신경증적 성향이 더 높은 경향"을 보였다. 이는 불안, 정서적 불안정, 스트레스 반응성과 관련된 성격 특성이다.
학술지 《종교들(Religions)》에 발표된 한 연구는 SBNR 성향의 사람들이 의미에 대한 미해결 질문, 신념을 둘러싼 긴장, 정체성과 목적에 대한 불명확성 등 "실존적 문제로 인한 갈등"을 종종 겪는다고 보고했다. 또한 2026년 《사이언티픽 리포트(Scientific Reports)》에 실린 한 연구는 SBNR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관된 비종교적 영적 수행이 불안 및 우울 증상과 연관이 있음을 밝혀냈다.
잠시 신학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이는 일부 사람들이 제1계명을 어기는 것에는 매우 현실적이고 개인적인 대가가 따른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고 있는 과정으로 보인다.
개인화되고, 반(反)제도적이며, 기준이 모호하고 자기 주도적인 이 영성은 사실 사사기 21장 25절의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말씀의 재현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가 이스라엘에게 어떤 비극적 결과를 초래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SBNR 방식의 어두운 이면은, 이것이 종종 틱톡(TikTok)이나 인스타그램(Instagram) 같은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 의해 크게 형성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플랫폼들은 오직 단 하나, '참여도(engagement)'에만 최적화되어 있다. 그곳에서는 진리에 대한 검증을 찾아볼 수 없다. 진리가 주어지는 곳이 아니라, 입맛에 맞게 조립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플랫폼을 계속 들여다보면, 사도 바울이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디모데후서 4:3)라고 경고했던 것처럼, 결국 당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누군가를 필연적으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오가는 대화들은 바울의 경고가 먼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단지 더 나은 기술로 포장된 현대의 영성임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 공간에서도 나름의 논의는 이루어지지만, 이는 단지 감정적으로 공명하고, 기존의 관점을 강화하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마찰이나 도전을 피하려 할 뿐이다. 그 결과, 그 순간에는 겉보기에 의미 있어 보이지만 결코 제대로 검증되지 않기에 영속성도 없는 '반향실(echo chamber, 확증편향의 공간)'만이 남게 된다.
이것이 바로 거짓 신을 섬기는 일의 결말이다. 우상은 금속(metal)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정신적(mental)일 수도 있다는 격언을 기억하는가?
필자는 오늘날 SBNR 무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이사야 선지자의 묘사보다 더 잘 보여주는 예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사야는 나무를 베어 취하는 사람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 절반을 불 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 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이사야 44:15-19).
그리고 그 결과는 무엇인가? "그는 재를 먹고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이사야 44:20). 오늘날 자신이 만들어낸 영성에 아무런 실질적인 구원의 능력이 없음을 깨닫고 끝내 공허함만 남게 된 SBNR 무리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그러나 성 요셉 성당과 다른 여러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현상이, SBNR 성향의 사람들과 수많은 이들이 '참되신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와의 '구원적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라면 우리에겐 분명 희망이 있다. 결국 이 모든 탐구를 이끄는 가장 깊은 영적 갈망은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견고하고 참된 그 무언가를 향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따르면, 그 참된 것은 내 입맛대로 길을 골라 편집한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내어주신 단 하나의 길 앞에 온전히 항복할 때 비로소 발견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