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를 한지 5개월이 넘어가는데, 이웃의 가족이 누구인지 자세히 모른다. 우리까지 다섯 가정이 한 지붕에 사는데도 이웃 사람들을 대면하여 공식적으로 사귈 기회가 없었다. 이사를 한 후, 떡을 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신고식을 대신하여 아내가 작은 화분 4개를 만들어 부부가 같이 이웃집의 문을 두드리고 다니며 선물하였다. 그러나 4집중 단 2집만 사람을 만났고, 나머지 두 개는 전달할 수가 없었다. 이웃이 특별히 은밀하게 숨어살려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커뮤니티 안에서 교제가 힘든 삶을 우리가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주거지나 동네를 커뮤니티(community) 즉 “공동체”라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용어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이름대로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살고 있는 마을이 얼마나 될까? 1630년 메사추세츠 베이 식민지에서 총독이 된 청교도 존 윈드롭(John Winthrop)은 다음과 같이 개척자들을 격려했다. “우리는 함께 기뻐하고,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자신의 일로 여기며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며, 함께 고생하고 노력하면서 하나의 몸을 형성하는 구성원으로서 커뮤니티를 가장 소중히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언덕 위의 도시”를 꿈꾸었던 윈드롭의 비전처럼, 그 당시의 식민지 시민들은 지금의 개인주의와는 좀 다른 문화 속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니 이 말은 지금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는 설교라 하여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다. 윈트롭은 1630년에서 1649에 이르는 약 20년의 기간 중에 도합 십여 년에 걸쳐 4번의 총독 임무를 수행하면서 독특한 공동체를 이루려는 노력한 것 같다. 그러나 현재 이러한 공동체의 소망은 더 이상 미국의 것이 아니다. 사귐과 나눔이라는 미덕을 잃어버린 채, 개인주의로 격리된 공동체의 상실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교회 또한 공동체의 본질을 상실하고 있다. 교회는 잠시 모였다가 흩어지는 개인의 병립(竝立, coexist)이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의 유기적 총체이다. 교회는 느슨한 연맹체도 아니요, 복합적인 기구나 조직도 아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통일된 연합체이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이 교회를 오직 헬라어 단수로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a chosen people)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a royal priesthood)이요 거룩한 나라(a holy nation)요 그의 소유(possession)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이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사도들은 순교의 피를 흘리셨고, 속사도와 교부들은 로마의 핍박 속에서도 치열한 노력과 헌신의 삶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교회 공동체의 특징은 배제가 아니라 포용을, 상처가 아니라 치유를, 교만이 아니라 겸손과 심사숙고를, 그리고 방어태세가 아니라 무장해제를 특징으로 한다. 최고의 공동체 교회의 성숙을 위해, 즉 교회의 하나 됨을 위하여 삼위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 모든 대가를 지불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