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죽음에 대한 이해와 대응(1)
인생의 발달에서 최후의 부분에 있는 노년기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노인에게 죽음의 문제는 최후에 직면해야 할 문제이면서도 심리적으로 다양한 문제를 파생시키는 측면이 있다. 노인의 전반적인 상황들을 살펴봄으로써 노인에 대한 죽음에 이해와 그 대처를 가지려고 한다. 이를 위해 노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죽음의 관한 전반적인 이해와 더불어 노인에게 더 긴요하게 필요한 노인 자신의 심리적인 상황과 고통, 노인을 둘러싼 가족들의 위기와 심리적인 고통을 살펴보아야 한다.
1. 죽음에 대한 이해
노년기에 이르면 노인은 죽음에 대한 문제와 맞서게 된다고 했다. 이런 것은 노인이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의 문제는 가장 큰 고민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나이 60이 넘으면 DNA에서는 자꾸만 죽음에 대한 신호가 온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이해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올바른 이해는 그만큼 불안감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는 점에서다.
1) 죽음에 대한 의학적 이해
죽음에 대한 의학적 정의의 변천은 진단적이고 치료적인 기재의 발달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과거에 살아있는지를 판별하는 기준은 호흡이었지만, 이후 심장기능의 생리적 중요성이 인식되고 청진기가 개발되면서 죽음의 정의는 호흡의 중단에서 심박동의 정지로 이동해 갔다는 점에서다. 후에 심전도의 발명은 죽음의 결정에 일직선 심전도가 결정적 기준이 되게 했다.
현대에 와서 죽음에 대한 일반화된 의학적인 정의는 순환 및 호흡의 정지이다. 심장이 멎으면서 혈액순환이 정지되는 상태가 순환정지이며, 자발적인 호흡운동의 정지로 인해 조직에 산소공급이 끊어짐을 호흡정지라고 한다. 순환과 호흡이 정지되면 산소와 모든 영양물질의 공급이 중단되므로 곧이어 조직세포에 변성을 일으켜 영구히 돌아올 수 없는 상태, 즉 불가역적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다.
최근 장기이식의 활성화로 인하여 뇌사(腦死)를 죽음으로 인정하는 윤리적, 법적, 의학적 논란이 대두되고 있다. 뇌사 상태의 노인은 인공호흡기가 호흡을 유지하고 약물의 도움으로 심장만 겨우 뛰는 상태에 있다. 뇌사는 모든 감각의 무반응, 호흡과 운동의 완전 정지, 반사작용의 소실, 뇌파의 완전 평탄 등의 4가지 의학적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에 뇌사의 판정을 내리지만 그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의학적인 죽음이란 순환 및 호흡의 정지로 오는 조직세포의 불가역적 변성을 말하는 편이다.
2) 죽음에 대한 사회문화적인 이해
죽음에 대한 사회적 차원에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다. 죽음과 임종은 표면적인 현상으로서 죽음을 이야기 할 때는 같은 뜻이지만, 좀 더 심층적으로 문화적 배경을 고려한다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임종은 "끝남에 임하여 지켜보고 보살핀다."는 뜻으로 하나의 사회적 사건이며, 그저 죽는 사람의 개인적인 죽는 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라도 이러한 임종을 지켜볼 수 있지만, 자기의 직계 혈육인 아들이 지켜보고 있을 때와 다음으로 딸만이 지켜보고 있을 때와, 한 걸음 더 나아가 먼 친척, 다음으로 아무도 혈육이나 친척이 전혀 없을 때와는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임종을 사회적 사건이라 함은 집단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는 결코 한 사람이 있을 때는 성립되지 않고, 여럿이서 함께 살아 갈 때 사회가 성립되며, 그리고 그 사회 속에서만 사람이 태어나고 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임종은 사회성, 집단성을 떠나서는 성립되지 않는다.
사회적 사건으로서 죽음은 동시에 문화적인 상황이다. 민족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데는 각기 나름의 사는 방식이 있는데, 전통문화는 이 삶의 방식의 의식화를 진행시키는 주체자와 내용이 된다. 이 전통문화가 평상시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임종이라는 생의 특별한 상황이 이것의 작동에 있어서 가장 으뜸가는 기회와 계기가 되는 편이다. 여기에는 3가지 측면이 있는데, 전술한 집단성(集團性)과 다음으로 급수성(級數性)이 있고, 마지막으로 연극의례성(演劇儀禮性)이 관련되고 있다.
급수성이란 가계에서 등급이 높고 낮은 것에 따라 맡아야 할 사회적 책임과 그 역할을 말하는 것으로, 임종은 한 개인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 한 개인이 지금까지 맡아온 사회적 역할을 살아있는 일가친척에게 다시 분담시키는 기회가 되며, 또한 죽음을 앞둔 본인에게도 살아오는 동안 어떤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수행해 왔던가를 스스로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 반면에 연극의례성(演劇儀禮性)은 죽은 자(死者)의 임종을 통해서 비로소 살아 있는 자(生者)는 자기의 삶을 갈무리 할 기회를 언제나 갖게 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남의 죽음을 통해서만이,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설계하게 되기에 인생의 총체적 의미를 다시 심어 보는 때가 된다.
3)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이해
죽음에 대한 철학적 이해는 간단하지 않은 편이다. 그것은 죽음을 보는 시각과 시대적인 상황, 학문적 배경, 죽음의 성격, 문화와 종교에 따라 매우 다양하여 하나로 조망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많은 철학자들은 죽음을 적극적으로 맞이하겠다는 사고보다는 오히려 죽음에 대한 회피의 자세에서 소극적으로 죽음을 고찰하였는데, 그 이유는 죽음 자체가 가볍게 접근할 수 없는 특징을 지녔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를 취급하였던 초기의 인식은 죽음이 몰아오는 공포를 사람들이 어떻게 완화하고 극복하느냐 하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19세기와 20세기의 실존철학은 죽음을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로 생각하고 그것을 깊이 있게 다루었는데, 이들은 죽음을 객관적 이론의 형태로 받기보다는 주관적 사실의 형태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실존철학에서의 죽음에 대한 문제는 키에르케고르(S. Kierkegaard)가 말하는 단독자로서의 실존이 죽음을 자각한 때부터이다. 이 외에도 우리는 실존주의 철학의 대표적인 학자로 하이데거(M. Hei- degger)와 샤르트르(J. P. Sartre), 야스퍼스(K. Jaspers), 틸리히(P. Tillich)를 들 수 있다.
하이데거는 그의 저서《존재와 시간》에서 현존재로서의 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고 규정했는데, 이는 인간은 이 세상에 한번 태어난 이상 죽음이라는 하나의 숙명적인 사건을 향해서 순간순간 나아가고 있는 존재라는 의미에서 인간을 죽음의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의 죽음이란 미래에 언젠가 닥쳐오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바로 삶의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는 현존재의 구성요소이며, 죽음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종착역이 아니라 우리가 실존으로서의 자기를 자각하는 적극적인 계기의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샤르트르는 하이데거와 뜻을 같이하는 바가 많으면서도 죽음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는 생이 존재해 있는 한 어떠한 죽음도 더럽혀지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하면서, 그 이유는 인간은 삶을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야스퍼스는 죽음을 인간의 한계상황에 나타나는 실존적 불안으로 보고, 인간이 자기를 사실적인 모든 요소로부터 초월해서 자기 자신을 미래로 투기시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는 죽음 후에는 어떠한 징조도 없고 아무것도 다시 돌아오지 않으므로 죽음은 비존재이며, '무'라고 생각하였다.
철학적인 자세로 신학을 추구했던 틸리히에 의하면 실존의 불안을 자아내는 비존재에서는 3가지 형태가 있는데, 그것은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 공허와 의미의 상실에 대한 불안, 그리고 죄의식과 정죄에 대한 불안이 다. 그는 이러한 불안들이 매 순간마다 잠재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은 인간 존재의 전 영역에 파급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운명과 죽음에 대한 불안은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누구에게나 불가피한 것이라고 보았는데, 그것은 사람은 누구나 생리적인 죽음을 통하여 자기를 완전히 잃게 되리라는 것을 실존적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주의자들은 죽음이라는 것을 현존재의 공통적 한계상황으로 보고, 그 한계상황과 어떻게 관계하는가를 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철학에서 실존주의는 죽음을 만사를 삼켜버리는 어두운 종말이요 끝이라고 생각하고 회피하였던 죽음을 새롭게 인식하였으며, 죽음은 인간존재의 놀랄만한 최초이자 최종의 전제라고 규정하여, 인생의 의미를 강화하는 수단으로써 죽음에 관한 의식을 계발하도록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누군가의 부음(訃音)을 들었을 때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났다는 의학적인 개념으로 그 죽음을 먼저 받아들이기 때문에 죽은 사람이 불행을 당했다고 생각하며, 언젠가 자신에게도 임할 죽음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인 소멸현상'으로서의 죽음만을 생각한다면 죽음 앞에 선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들을 해줄 수가 없을 것이며, 모든 인간은 생의 마지막을 끔찍한 고립과 두려움 속에서 보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임종자의 죽음의 의미를 공동체 안에서 사회문화적으로 다시 해석해 줌으로써 상실의 슬픔에 빠져있는 유가족들을 위로해 줄 수 있으며, 또한 그 죽음의 철학적인 이해를 통하여 살아있는 자들로 하여금 최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의미를 부여해 줄 수가 있다.
한편 인간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죽음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끊임없는 관심을 보이면서 그것에 대한 희망을 가지려하며, 그 믿음으로 두려움을 이기고 죽음 앞에 담담하게 서기를 원한다. 사람들이 사후세계에 대한 생각들을 갖게 된 것은 종교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종교에서 이러한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대해서 고찰할 필요가 있다.
2. 죽음에 대한 종교의 이해
오랫동안 금기로 여겨오던 죽음의 문제가 최근에 많은 관심과 논의의 대상이 되고, 그에 따른 사람들의 태도 또한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에는 사후세계를 믿고 의지하는 종교적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운명론자들, 현실주의적인 사람들, 허무주의적인 입장에서 죽음을 대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렇게 다양한 태도는 연령, 성별, 교육수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런 것은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에 한정되는 것이기는 하다. 이러한 여러 가지 죽음에 대한 태도 가운데에 일관된 특징들이 있는데, 거기에는 외래종교에 의해 영향을 받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불교에 의한 명부(冥府)관념, 유교에 의한 조상숭배와 천명사상, 도교에 의한 신선사상, 풍수설에 의한 민간신앙 등이 그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한국인의 사생관(死生觀)에 많은 영향을 준 불교, 유교, 기독교의 죽음에 대한 이해를 간략하게 알아볼 수 있다.
1) 불교의 죽음 이해
한국의 불교는 기원 후 372년 고구려에 중국 진나라의 순도라는 승려에 의해 전해진 후 거의 1500 년간의 신앙을 유지시켜 왔다. 불교의 죽음에 대한 정의는 잡아함경(雜阿含經)의 제21장에 "수명과 체온과 의식은 육신이 사라질 때 아울러 사라진다. 그 육신은 흙무더기 속에 버려져 목석처럼 영혼이 없다. 수명과 체온이 사라지고 기관이 모두 파괴되어 육신과 생명이 분리되는 것을 죽음이라고 말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함론(俱含論) 제 9항에 의하면 인간존재를 4가지로 나타내고 있는데, 생명이 결성되는 찰나를 생유(生有), 이로부터 생명의 임종 직전까지는 본유(本有), 최후의 임종하는 찰나를 사유(死有), 이 사유로부터 다시 생명이 결성되기까지를 중유(中有)라고 말한다. 이처럼 4유를 설정하고서 그 중에서도 죽음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 중유를 삶과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죽음을 단멸(斷滅)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드러내는 것이다. 죽음이란 삶의 연장선에 있는 하나의 추이(推移)일 뿐이며, 불교에서의 죽음에 대한 극복도 이런 입장에서 사즉생(死卽生)으로 귀결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생사관에 관한 불교의 기본개념은 윤회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이다. 개인이 죽게 되면 그 영혼은 계속 남아 다시 다른 몸을 받아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 그 이론의 기본골격으로서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이러한 탄생과 죽음의 과정을 수없이 되풀이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때 개개의 영혼은 전 생애동안 스스로 행했던 행위가 얼마나 선했고 악했는가 여부에 따라서 그 다음 생에 태어날 때 6가지의 길을 반(反)강제적으로 택해야 한다.
불교에서는 이 6가지의 길 가운데 어디에 태어나든 태어나는 자체가 고통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 6가지의 길에서 탈출, 즉 해탈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그러므로 불교도에게 있어 죽음은 다만 현신(現身)에서 죽음의 신으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에 옷을 갈아입는 것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불교도들이 죽은 자(者)를 위해 지내는 천도제나 49제도 불교의 윤회설에 입각해서 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죽은 자(者)를 위로하는 유교의 제사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도 될 것이다.
2) 유교의 죽음 이해
유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이를 위해서는 먼저 유교에서는 죽음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유교의 창시자인 공자는 죽음이나 귀신에 대해 언급을 피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죽음에 대해 묻는 제자에게 삶도 모르면서 죽음을 알려한다고 핀잔을 주었고, 귀신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가? 하는 제자의 질문에 살아있는 사람도 제대로 못 섬기면서 귀신을 섬기는 걱정을 한다고 가볍게 질책하면서 항상 관심의 초점을 현실로 되돌리곤 했다.
공자는 귀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철저한 인간중심, 인본주의의 입장을 보였다. 귀신을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존재로 올려놓고 인간이 그 앞에서 자기 부정을 하거나 굴종을 하는 입장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귀신은 귀신의 영역에서, 인간은 인간의 영역에서 각각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귀신과 인간의 관계는 제사로 맺어지며, 유교에서 말하는 제사는 죽은 자(者)를 공양함으로써 효를 이어가는 것을 뜻한다.
유교 사상의 철학적 체계화를 이룬 성리학에서는 귀신을 이기론(理氣論)으로 취급하여 귀신을 기(氣)의 작용으로 설명했다. 그것은 생(生)이란 기(氣)가 모이고 혼백이 결합하는 것이요, 사(死)는 기(氣)가 흩어지고 혼백이 분리되는 것으로 설명한 것이다. 관(冠)·혼(婚)·상(喪)·제(祭)의 사례(四禮)를 분석해 보면 전이례(前二禮)는 삶의 예식이고, 후이례(後二禮)는 죽음의 예식으로 이분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제(祭)는 곧 이 혼에 대한 예이며, 그것은 곧 혼의 지속 시간을 관리하는 의식인 것이다.
특히 관혼상제적인 세계관에 있어서는 사자(死者)도 가족의 범위에 들어가게 된다는 점이 특이하다. 이것은 한 집안에서 산 사람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도 같이 산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유교의 조상숭배란 결국 존재의 영원성을 보장하기 위한 세대와 세대 간의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며, 그러한 세대와 세대 간의 연결은 곧 문명의 축적을 비로소 가능케 하는 것이 된다.
3) 기독교의 죽음 이해
기독교의 죽음 이해는 성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를 이루고 있다. 초기 구약시대에는 비록 죽음이 아담의 죄로 인해서 이 세상에 들어왔지만(창2:17, 3:19), 대체로 죽음의 문제를 피조물의 정해진 운명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이때의 사람들은 인생의 짧음과 죽음 앞에 인간이 허망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사람이 죽으면 가게 되는 곳이며 전적으로 무력하고 다시 되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서의 스올(sheol, 음부)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처럼 히브리인들은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서 떠나면 영육의 합일체로서 인간의 생명체는 생기를 잃게 되고, 산 자가 땅에서 누리던 모든 좋은 것들을 누리지 못하게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히브리인들은 다른 원시사회 사람들과 같이 죽음의 실재를 믿고 죽음은 땅 밑의 묘소에 위치한다고 믿었으며, 죽음을 두려워 한 것은 죽음 그 자체보다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절단되는데서 생기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스올 개념의 대두와 함께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힘이 죽음 이후의 세계까지 관여하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구약성경에서 죽음이 의로운 자들에게는 영원한 선의 장소로 들어가는 것이고(사 45:17, 단 7:14, 12:2), 기대되어지는 영광스런 경험이지만, 악인에게는 죽음이 영원한 형벌로 이끄는 것이라고(사 35:10, 렘 20:11, 단 12:2) 말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죽음을 죄의 결과라고 하지만, 이 죽음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 일관된 내용이다. 예수의 생애를 기초로 하여 기록된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이라는 공관복음에서는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이 없기 때문에 체계적인 관점을 찾기는 어렵지만, 몇 가지 특징적인 것은 첫째로 예수는 인간의 죽음이 반드시 그 사람의 개인적인 죄 때문만은 아니라고 했으며(눅 13:4, 요 11:4), 둘째로 예수는 죽은 사람들은 모두 부활하게 된다고 믿었고(마 8:11), 끝으로 부활사상을 옹호하면서(마 22:23-33) 사람들이 죽은 다음에도 하나님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에 기독교의 유명한 사도로 인정되는 사도바울은 죽음을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할 하나의 악의 상태로 보았고,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자는 죽음을 넘어서 영생에 참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전 15:17, 살전 4:13-15). 예수의 제자인 요한은 죽음 후에 얻어지는 삶보다는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영생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죽음의 문제에 접근을 하였다. 그것은 죽음이란 이미 믿음 안에서 극복되었으며, 지속하는 생명은 현존하는 실재라는 점에서다(요 11:25-26).
초대교회의 가장 위대한 교부(敎父)로 인정되는 어거스틴은 사도바울이 가졌던 죽음이해, 즉 아담의 죄에 대한 대가로서의 죽음을 받아들이며 여기에 도덕적이고 영적인 면을 분명히 하는데, 그는 '첫 번째 죽음'을 받아들이고, "두 번째 죽음을 두려워하라!"고 말한다. 첫 번째 죽음은 육의 죽음이지만 두 번째는 하나님께 버림받는 영원한 죽음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죽음의 순간에 있는 개인의 심판에 대한 중세적인 견해를 받아들여, 침상은 악마가 영혼을 얻기 위해 벌이는 최후의 필사적인 싸움터로 선과 악의 궁극적인 대결장로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개인의 죽음의 순간은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대신학자인 슐라이에르마허는 죽음이 원죄의 직접적인 결과가 아닌 자연스러운 죽음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죽음은 죽음 이후에 덧붙여진 '대가'나 '보상'으로 영생을 보장받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영원한 삶은 현 존재의 보다 깊은 차원에 대해 경험되어진 종교적 의식의 확장이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죽음에 대한 신학적인 의미는 인간이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 분리되어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는 것이며, 죽음의 순간에 찾아오는 두려움은 소멸에 대한 두려움뿐만이 아니라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아니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에서는 죽음이 삶의 궁극적인 종말도 아니고 죽음으로 삶이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또한 죽음이란 삶의 끝에 오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이미 생명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얘기하기 때문이다.
3. 죽음에 대한 노인의 심리적 이해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한 것이요'(히 9:27)라는 성경처럼 일생에 있어서 죽음은 출생과 더불어 인간이 통과해야할 2가지 큰 관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는 이렇듯 죽음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다가도 그것이 나에게 닥쳐진 구체적인 사실이 될 때에는 더 이상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보다 어떻게 해서든지 극복해야하는 부정적인 사건이 되어버리고, 말할 수 없는 두려움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 현상은 인간의 무의식 층에 자기 자신에게는 죽음이 결코 일어날 수 없다는 확신에서 비롯되는 것으로서 우리에게 죽음이 실제로 찾아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며, 만약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 외부의 누군가에 의한 악의적인 개입에 의한 것이라고 단정하고 있다.
죽음에 대한 이해는 연령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데, 죽음을 앞둔 노인이 느끼는 두려움 즉, 인간이 '죽는다.'는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10세 때부터라고 한다. 소아초기에는 단순히 동통을 두려워하며, 미취학기 때는 부모와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초등학생 때는 부모, 친구와 헤어짐을 두려워하며, 청소년기에는 인생을 영위하는 기술을 터득하는 때에 닥쳐오는 패배와 좌절에 분통해하고, 청년기에는 자신의 건강한 육체, 활동적인 자아상, 지금까지 인생을 위해 투자해 온 것 등을 잃게 됨을 한스러워한다. 중년기 때는 가족과의 일상사가 흐트러짐을 안타까워하며, 노년기에는 준비 없이 맞는 죽음에 당황하게 된다.
기독교인들도 죽음을 미처 준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째는 죽음에 대한 불안, 공포 등의 감정으로 인해 현실에서 죽음의 문제를 기피하고 생각하기조차 싫어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기독교 전통 안에 있는 다양한 죽음이해가 정립되지 못했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는 다원주의 사회에서 나름대로 전통적으로 인식된 죽음이해와 심리학 등 세속문화를 조화시키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혼란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죽음은 연령과 종교를 초월한 모든 인류가 겪는 실제적 과정인 만큼 각 개인에게 있어서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준비가 필요하다. 더욱이 노인상담에서 죽음과 관련한 것을 다룰 때 상담자가 죽음에 대한 이해가 바르게 정립되어있지 않거나 이를 무시해버리면 노인들과의 의사소통이 잘 안 되는 것은 물론, 오히려 노인들에게 상처를 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죽음을 앞둔 노인의 심리적인 구조를 다음의 도표로 나타낼 수 있다.
죽음을 앞둔 노인의 총체적 심리구조
지금까지 우리는 노인의 죽음에 대한 이해와 대응에 대해서 기술했다. 인생의 발달에서 최후의 부분에 있는 노년기는 죽음이라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고 했다. 노인에게 죽음의 문제는 최후에 직면해야 할 문제이면서도 심리적으로 다양한 문제를 파생시키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였다. 노인의 전반적인 상황들을 살펴봄으로써 노인에 대한 죽음에 이해와 그 대처를 가지려고 했다. 이를 위해 노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인 죽음의 관한 전반적인 이해와 더불어 노인에게 더 긴요하게 필요한 노인 자신의 심리적인 상황과 고통, 노인을 둘러싼 가족들의 위기와 심리적인 고통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점에서 몇 가지로 구분하여 다루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