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에 빠지면 너무 많은 것을 잃는다. 순간적인 만족을 위해 너무 큰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누구나 유혹 앞에 선다. 그러나 누구나 흔들리고 넘어지는 건 아니다. 아담도, 다윗도, 삼손도 유혹 앞에 여지없이 넘어졌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혹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넘어지고 난 후에 다시 일어서는 것은 너무 많은 대가 지불을 감수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경계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브록 터너라고 하는 미국 명문 스탠퍼드대 수영선수가 있다. 2015년 1월 18일 교내에서 열린 사교클럽 파티에서 한 여성이 만취하자 그녀를 성폭행했다. 일을 저질러 놓고 그 책임을 져야 할 때가 되자, 그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피해 여성이 정신을 잃은 줄 몰랐다. 자발적으로 성관계에 응한 것으로 여겼다."
전후사정은 잘 모르지만, 이게 말이 되는가? 정신을 잃은 상태와 그렇지 않은 상태를 구분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설혹 자발적으로 응한 성관계였다고 해도, 성이 이렇게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사안이 있을 때 늘 그렇지만, 이 사건에서도 피해 여성의 말은 다르다. 그는 법원에 성폭행으로 겪은 고통을 호소했다. 그리고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데 대해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 강력하게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다. 상흔을 생각하면 왜 그렇게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터너의 아버지 댄이 법원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사건 이후 아들은 다시는 전처럼 행복하고 낙천적인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됐다. 앞으로 그의 인생은 절대 그가 꿈꿔왔던 대로 될 수 없게 됐다. 20여 년의 인생 중 불과 20분 동안의 행동에 대한 대가치고는 너무 가혹하다." 아버지의 심정을 백 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식의 앞날을 생각할 때 암담하겠지. 가혹하리만치 너무나 많은 것을 빼앗긴 데 대한 속상함도 있겠지.
그러나 그래도 이렇게 반응하는 건 아니다. 아들의 앞날보다 피해 여성의 아픔과 상처와 상흔을 깊이 성찰해야 하는 게 아닌가? 무조건 사죄해야 바람직하지 않을까?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아야 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 피해자의 마음도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감동이 되면 피해자에게서도 어떤 반응이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청춘의 앞날을 생각해서 용서의 카드를 꺼낼지도 모른다.
댄이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정확하게 인지하게 해야 했다. 앞으로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도록 심장에 깊은 쐐기를 박아 주어야 했다. 그게 정말 아들을 위한 것이고, 사랑하는 것이다.
엘리 제사장의 잘못이 바로 이것이었다. 당시 레위 지파 출신의 어린 사무엘과 달리, 엘리 제사장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는 금수저를 잡고 태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망나니짓을 했다. 제사장으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서슴지 않고 행했다.
그들의 행동은 만천하에 소문이 났다. 사람들이 혀를 찼다. 그러나 홉니와 비느하스는 자신들의 그릇된 길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건, 당시 영적 지도자인 엘리 제사장이 아무런 조처를 하지 않았다는 게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호되게 책망하셨다. '네가 나보다 네 아들들을 더 사랑하는구나!'
어쩌면 엘리를 향한 이 책망이 댄을 향한 책망이고,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는 우리들을 향한 책망이 아닐까? 늘 두려운 일이다. 늘 염려하는 일이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다.'는 이것이.
전남 신안의 한 섬마을에 젊은 여교사가 부임했다. 사람들이 알아 주든 몰라 주든 사명감을 갖고 섬마을에 와서 섬기는 게 아름다운 일 아닌가?
어느 날 식사를 하기 위해 한 식당을 찾았다. 혼자서. 그때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이 여교사에게 다가가 술을 한 잔 권했다.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석 잔 되고, 그러다 어느새 여교사는 취하고 말았다.
급기야 여교사는 술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러자 식당 주인은 그녀를 2km 떨어진 관사로 데려다 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취한 여교사를 위한 배려가 아니었다. 그는 짐승으로 돌변했다. 그리고 여교사를 성폭행했다.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술자리에 뒤늦게 합류한 사람이 있었는데, 식당 주인이 여교사를 관사로 데려간 지 1분 뒤에 그곳으로 찾아 왔다. 게다가 옆 식당 주인도 20분 뒤에 왔다. 여교사는 다음 날 새벽까지 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다. 다음 날 새벽, 여교사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심상찮은 일이 벌어진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곧바로 경찰에 신고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둘러싸고 뒤숭숭하다. 가해자 가운데는 학부모도 있다는 게다. 그 가운데 한 가해자는 2007년 대전에서 20대 여성을 성폭행한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다. 본인들은 술기운에 우발적으로 범한 일이라고 주장하지만, 사건 정황으로 볼 때 이들이 사전에 공모를 했을 거라고 한다.
그런데 이 사건을 더 심각하게 만드는 건, 한 마디씩 내뱉는 말이다. "여교사가 오지 않았다면 문제가 없었다." "(피해자가) 꼬리를 쳤다" "소위 공직에 있는 교육자 아니에요. 쉽게 말해 공무원 아닙니까. 공무원이 어떻게 처녀가 술을 떡 되게 그렇게 먹냐고....... 외부에서 방송 들어 보면 (학부형들이) 완전 죽일 놈으로 되어 있는 거야, 방송 들어보면. 내용 자체는 모르고 완전히 남자 셋이서 여자를 죽여 버린 것으로 생각하게 해놨는데."
이들이 던지는 말이 더 깊은 상처를 만들고 있다. 인생에 금이 가지 않기 위해서는 술에 대한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아무리 가까운 관계여도 술을 섣불리 받아먹어서는 안 된다. 술 뒤에는 또 다른 문제가 뒤따르는 경우가 많으니까.
더구나 술이라는 게 멈추기 어려운 요물이 아닌가? 그래서 생각지도 못한 혼수상태로 몰아간다. 그래서 성경은 '술 취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얼마나 많은 사건들이 술과 엮여 일어나는가? 그러니 자신의 인생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 술에게서 자신을 잘 지켜야 한다.
허물어지는 인생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경계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경계선을 함부로 넘나들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 되겠고, 국민들에게는 법과 양심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죄는 깨달아야 한다. 이렇게 저렇게 변명하지 말고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행동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아무리 무거울지라도.
약자의 약함을 이용해서 자기 만족을 채우는 것이야말로 파렴치하다. 약자를 보호하고 도와 주는 게 건강한 사회이다. 그런데 자신의 일시적인 쾌락을 채우기 위해 약자를 해하려 하다니? 술을 먹여서 약한 여자를 성적인 노리개로 사용하다니? 그렇게 짓밟힌 약자의 아픔과 상처를 조금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그립다. 생명을 존중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는 말씀에 순종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