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스 리스타트 교회 담임 박형용 목사
(Photo : ) 달라스 리스타트 교회 담임 박형용 목사

“만나보기” 성경의 인물들을 만나보며 내 인생에 찾아오셔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보는 이야기….

[일곱 번째 이야기: 슬픔 가운데 있었던 하나님의 사람… 요한 이야기]

오늘 우리가 만나 볼 사람은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인 “요한”이라는 사람인데, 요한이 겪었던 극심한 슬픔의 순간을 하나님께서 기쁨과 승리의 순간으로 바꾸어주신 이야기를 살펴 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오늘의 말씀을 읽어 보면서, 요한의 이야기를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0장 1절부터 8절 말씀입니다.

1.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 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 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 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 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누구나 한번 쯤은 절망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고, 누구나 한번 쯤은 그 절망의 상징이 되는 것들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갑작스레 찾아온 암의 발병 소식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알리는 메시지 일수도 있으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고로 생긴 몸의 흉터일 수도 있고, 예기치 않은 해고 통보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마주하기를 원하지도 않고, 오랫동안 그 일들을 기억 나게 하는 일련의 상징물들을 맞이하고 싶어하지도 않습니다.

물론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라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말씀을 머리로 아는 것과 그 말씀을 실제로 믿는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비록 말씀이 이렇게 이야기 한다고 해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이 말씀에는 내가 겪은 비극적인 사건들은 해당되지 않는 것 처럼 느껴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정말 사실일까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정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만나 볼 “요한”이라는 사람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네 그렇습니다”라고 대답 합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기 위해서 요한은, 어느 금요일에 자기에게 벌어졌던 일을 성경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8절에서 40절을 보면 이런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 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과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예수님의 장례를 치루었습니다. 그러면 그 날의 분위기는 어땠을까요? 예수님의 시신은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엉망이 된 채로 십자가 위에서 내려졌습니다.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덕분에 시신조차 엉망이 되어버렸죠.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맞았던 채찍 때문에 예수님의 등 또한 엉망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던, 그 금요일은 요한에게 있어서 슬픔의 날이었고, 절망의 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닦고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신을 감는 동안, 세마포와 몰약과 침향은 요한에게 있어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어떤 상징물이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3년 전에 요한은 하던 일을 다 멈추고, 나사렛에서 온 목수출신의 “예수”라는 분과 운명을 함께 하기로 했습니다. 함께 먹고 함께 자며, 지난 시간동안 예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예수님을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그 주 월요일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만 하더라도, 요한은 “호산나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일까요? 불과 며칠 사이에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분을 왕이라고 노래하던 사람들이 금요일이 되자 요한이 사랑하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습니다. 꿈인줄 알았습니다. 아니, 꿈이었으면 좋았겠죠. 그런데 눈 앞에서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고, 예수님의 시신을 감고 있는 세마포를 보았을 때, 그 세마포는 이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요한에게 알게 해주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에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당시 요한은 저와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셨던 그 금요일의 비극이, 부활하신 일요일의 승리로 바뀔거라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이 예수님을 무척 사랑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일요일이 왔을 때 까지도 요한은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무르며 예수님 곁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죽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에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죠. 그리고 이 말은 요한이 보낸 지난 3년의 시간이 의미없게 되었다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고, 요한의 미래가 무덤에 묻혔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예수님이 부활하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었을까요? 성경은 그렇지 않다고 이야기 합니다. 요한복음 20장 9절을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요한은 한번 죽은 사람의 입술은 영원히 침묵하고, 그 사람의 손은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분명히 요한은 지금 우리가 부활절이라고 부르는 그 일요일에 일어날 놀라울 사건을 기대하거나 예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왜 요한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던 것일까요? 어쩌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요한마저 잡아들이려고 할 수도 있었습니다. 비록 군중들은 한 번의 십자가형에 만족했을 지라도,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들은 더 많은 피를 요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의 나사렛 예수의 잔당들을 모조리 해치우겠다고 결의 할 수도 있었겠죠. 그런데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왜 요한은 예루살렘 성을 빠져나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그가 예수님의 어머니를 보살피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19장 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요한에게 자신의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탁하신 기록이 있기 때문이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자신이 사랑했던 예수님의 부탁을 받았기 때문에, 그 때부터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신의 어머니로 삼고 섬겨야 했기 때문에,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달리 갈 데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지난 3년간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만 좇아다녔는데,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길을 잃어 버렸을지도 모르죠. 그것도 아니면 절망에 빠져서 도망칠 기력이 없었거나,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이 종합적으로 요한의 마음을 무겁게 했을 수도 있겠죠.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유능한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소망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는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가장 사랑하는 분이었고 친구 이상으로, 선생님 이상으로 사랑하고 존경하던 존재였습니다. 하물며 친구가 죽었을 때에도 함부로 그 친구 곁을 떠나지 않는 것인데,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예수님을 버리고 어떻게 떠나겠습니까?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 가까이에 머물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과거의 기록을 봐도 요한에게는 그런 습관이 있었는데, 요한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계실 때에도 예수님 곁에 있었습니다. 심지어 변화산에 갈 때도, 심지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도 십자가 발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무덤에 모실 때에도 무덤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그 만큼 예수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한 만큼 예수님의 죽음이 요한에게 준 충격이 컸던 것이죠.

과거에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고 했을 때,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요한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일을 기뻐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요한은 다른 사람들 처럼 예수님을 떠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인생의 가장 비극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을 지라도 요한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만약 여러분이 요한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이 여러분의 인생의 순간이, 모든 소망의 대상이었던 예수님이 돌아가신 그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머물러 있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의 모든 기대와 소망이 무너진 그 동굴에서, 여러분의 소망을 완전히 가리고 있는 세마포를 바라보고 있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예수님을 떠나겠습니까, 아니면 그래도 예수님 곁에 머물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일요일 이른 아침에 베드로와 요한에게 한 가지 소식이 다급하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마리아의 목소리는 다급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적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훼손하기 위해서 가져간 거라 생각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도 서둘러 무덤으로 달려갔던 거죠.

그런데 무덤에 달려가 보니 예수님의 시신은 어디로 간데 없고, 예수님의 머리를 쌌던 수건이 세마포와 함께 둥글게 말려서 접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게다가 시신을 감쌌던 세마포는 찢겨지거나 버려지지 않았고, 원래 상태 그대로 시신에 감겨졌던 모양 그대로 접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친구들이나 예수님의 대적들이 와서 시신을 감쌌던 수의를 벗겨낸 것이라면, 저렇게 단정하게 개어놓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이렇게 해 놓은 걸까요?....

그 때 요한의 머리속에 예수님의 말씀 하나가 스쳐 지나갔습니다. 마태복음 26장 31절과 32절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에, 다시 살아나신다고 하셨던 그 말씀이 그 순간 요한의 머리속에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수의를 보고 생각하는 도중에 그 말씀이 믿어졌던 것이죠.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8절은 그 믿음의 사건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지금까지 요한은 예수님의 시신에 감겨있는 세마포를 생각하며 절망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순간 하나님의 말씀이 요한의 마음을 밝힐 때에, 예수님의 시신을 감고 있던 세마포를 보면서 그 죽음의 옷을 통해 오히려 부활의 능력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날 “절망속에 있었던 요한에게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시신을 감싸는 절망의 상징이었던 세마포가 요한의 믿음의 눈을 뜨게 했고, 예수님의 부활의 약속을 기억나게 하는 상징으로 바뀌는 순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죽음을 감싸는 천을 가지고도, 부활과 생명을 묘사하는 광경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도 이와 같은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거죠. 다시 말해서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 절망의 상징으로 여겨진 것들을, 과거와 현재에 일어난 슬픔과 비통의 상징인 것들을, 얼마든지 기쁨과 승리의 상징으로 바꾸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방금 전에 우리가 읽었던 로마서 8장 28절의 말씀을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원래 십자가는 저주 받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완전히 소망이 끝난 것 같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을 통해서 만민을 구원하는 일을 이루셨습니다.

비록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면 끝날 거라 생각했겠지만, 오히려 그 일은 만민을 구원하는 선한 일을 성취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의 신비이고, 그리스도가 우리 삶 속에서 일으키시는 역설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사랑했습니다. 비록 그는 예수님을 다 이해하지 못했고, 그 분과 늘 생각이 같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 곁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오늘 요한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도 낙심되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눈을 감으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없이 읽고 외웠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의 말씀을 잊어버린 채로 절망 중에 빠져 사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곁에 머물고 계십니까? 상황이 어떻든, 환경이 어떻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고 그 자리를 지키며, 그래도 예수님만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까?

오늘 요한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을 상징하는 세마포”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믿음있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 모든 것이 )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괄호안에 여러분의 이야기를 넣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경제적인 어려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회사의 일방적인 해고통보)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믿었던 사람들의 배신)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갑작스러운 암의 선고)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셨던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눈물을 흘렸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그 주일에는 기쁨과 승리의 함성을 외쳤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죽었던 그 금요일에 요한이 울었던 것 처럼, 여러분도 지금은 울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아직 부활하지 않았던 그 토요일에 요한이 웃지 못했던 것 처럼, 여러분도 지금은 웃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일이 오는 그 날, 하나님께서는 요한의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기쁨과 승리의 순간으로 변화 시키시키셨습니다. 오늘 요한은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 주고 있는 겁니다.

혹시 말 못할 어려움 가운데에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눈물과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는 분들이 있습니까? 어쩌면 여러분은 요한이 경험했던 그 절망스러운 금요일과 토요일과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곧 부활의 주일이 옵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변할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 곁에 계십시오. 십자가 곁에서 버티십시오. 내가 아무것도 못하고 주저앉아 있는다고 해서, 하나님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옆에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 옆에서 머물때에 요한에게 벌어진 그 놀라운 승리가 여러분 삶 속에서도 일어나서, 그 모든 절망스러운 일들조차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보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