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한인교회 신학과 신앙 세미나에서 이재원 교수가 “제자로서의 여성”을 강조하며 한인 여성들에게 도전을 던졌다.
이 교수는 “신약성서와 여성: 초대교회의 여성들의 역할”이란 주제의 강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며 기름을 붓는 여성에 관해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 하셨는데 과연 지금 교회들이 이 여성을 기억하고 있는가”라고 먼저 물었다. 이 교수는 “이 여성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한 후 “교회의 지난 역사는 예수와 함께 한 여성들, 예수를 주로 고백한 여성들의 활동과 공헌을 축소시키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고 평했다. 그녀는 “교회가 교회 밖의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 세상 속의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한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 교수는 “성서에서 ‘여성’을 읽는 것은 결코 여성이 우월하다고 주장하거나 남성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의 문제는 인류 보편의 문제로 보고 여성의 문제는 별개의 것으로 분류하는 그 남성중심적 시각을 극복함을 통해 여성의 역할을 재인식하고 남성과 여성이 상호보완적 태도를 갖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또 “이런 성서 읽기는 여성에 대한 소외와 억압의 형태들이 정치, 문화, 사회적으로 복합되어 있는 것을 함께 고려하고 있기에 남성들 역시 억압적 구조에서 해방을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과연 예수를 따르던 여성들은 그 시대 어떤 존재였을까? 복음서에 나오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라 다녔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남성만 제자로 지칭되고 여성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지칭되어야 할까? 이 교수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여성들에게 제자라는 언어를 구체적으로 붙이지 않은 이유는 그 시대 남성주의적 언어 구조 때문일 뿐”이란 것이다. 시대적 언어로 볼 때 남성에게만 제자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남성 제자들이 감당한 일과 여성들이 감당한 일이 다르지 않으며 그러므로 이것을 현대적 언어로 읽으면 여성도 제자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특히 빈무덤 설화를 보면, 십자가에 처형 당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선포한 이들은 여자였다. 부활의 메시지를 여성이 전했다는 이 대사건은 여성들이 말씀선포자로 기능한 ‘제자’였음을 더욱 확신시켜 준다.
이 교수는 “예수님 당시 뿐 아니라 바울과 함께 한 여성들에게서도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이 교수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하게 사역하면서 그 시대 남성주의적 구조 속에서 규정하는 여성적 이미지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먼저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바울의 동역자 26명 중 9명이 여성이다. 바울이 쓴 이 구절을 잘 읽어 보면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 남성과 여성이 초대교회에서 동일한 일을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여성들을 남성들과 동등한 동역자로, 사랑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오히려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여러 사람 중에도 여성인 뵈뵈의 사역을 가장 먼저 언급하며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동안 섬기는 자를 지칭하는 diakonos를 해석할 때 남성의 경우는 말씀의 직무로 해석하고 여성의 경우 어린이를 돌보거나 아픈 이를 방문하는 직무로 해석하는 우를 범해 왔다.
더 나아가 이 교수는 로마서 16장의 유니아가 여성이며 그 당시 사도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했다. 바울 당시 유니아는 여성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14세기부터 “여기 쓰인 유니아는 유니아가 아니라 유니아스라는 남자”라는 주장이 등장해 종교개혁을 지나며 지배적인 견해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이 교수는 “(남성주의적 사고에 근거해) 여성의 이름인 유니아를 남성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헬라어 엑센트가 유니아를 남성으로 간주하게 한다는 온갖 억측이 있지만 그 당시 어떤 문헌에서도 유니아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일침을 놓았다.
바울 역시 사역에 있어서 여성을 존중하고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남녀 평등에 관해 언급하지만 그의 여러 서신들은 교회 내 여성을 억업하는 데에 이용되기도 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란 구절 혹은 디모데전서 2장에서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까지 등장한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모든 여자가 해산을 해야 구원을 얻는가”라고 물은 후 “바울의 이런 표현들은 그 당시 특정 교회들이 직면했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나온 말이기에 그 상황에 근거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서의 권위를 내세우며 교리적 해석을 동원해 이 구절들을 여성에 대한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의 강의 후에는 서보명 교수가 논평했고 참석자들이 질문하고 이 교수가 답하는 시간이 마련됐다. 이 세미나는 매년 CSKC와 미드웨스트교회가 주최하고 시카고한인교회여성연합회와 미국장로교 중서부 한미노회 여선교회연합회가 후원하는 행사다.
이 교수는 “신약성서와 여성: 초대교회의 여성들의 역할”이란 주제의 강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예비하며 기름을 붓는 여성에 관해 예수님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자를 기억하게 될 것’이라 하셨는데 과연 지금 교회들이 이 여성을 기억하고 있는가”라고 먼저 물었다. 이 교수는 “이 여성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한 후 “교회의 지난 역사는 예수와 함께 한 여성들, 예수를 주로 고백한 여성들의 활동과 공헌을 축소시키려는 노력의 연속이었다”고 평했다. 그녀는 “교회가 교회 밖의 세상을 변화시키기 보다 세상 속의 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제국주의를 지탱해 주는 역할을 한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일침을 가했다.
이 교수는 “성서에서 ‘여성’을 읽는 것은 결코 여성이 우월하다고 주장하거나 남성을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의 문제는 인류 보편의 문제로 보고 여성의 문제는 별개의 것으로 분류하는 그 남성중심적 시각을 극복함을 통해 여성의 역할을 재인식하고 남성과 여성이 상호보완적 태도를 갖는 것이 목표다”라고 말했다. 또 “이런 성서 읽기는 여성에 대한 소외와 억압의 형태들이 정치, 문화, 사회적으로 복합되어 있는 것을 함께 고려하고 있기에 남성들 역시 억압적 구조에서 해방을 경험하게 해 줄 수 있다”고 덧붙였다.
과연 예수를 따르던 여성들은 그 시대 어떤 존재였을까? 복음서에 나오는 여성들이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따라 다녔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남성만 제자로 지칭되고 여성들은 또 다른 이름으로 지칭되어야 할까? 이 교수는 “아니다”라고 말한다. “여성들에게 제자라는 언어를 구체적으로 붙이지 않은 이유는 그 시대 남성주의적 언어 구조 때문일 뿐”이란 것이다. 시대적 언어로 볼 때 남성에게만 제자라는 이름을 붙였지만 남성 제자들이 감당한 일과 여성들이 감당한 일이 다르지 않으며 그러므로 이것을 현대적 언어로 읽으면 여성도 제자란 결론에 이르게 된다.
특히 빈무덤 설화를 보면, 십자가에 처형 당하신 예수님의 부활을 처음 선포한 이들은 여자였다. 부활의 메시지를 여성이 전했다는 이 대사건은 여성들이 말씀선포자로 기능한 ‘제자’였음을 더욱 확신시켜 준다.
이 교수는 “예수님 당시 뿐 아니라 바울과 함께 한 여성들에게서도 이런 사실을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이 교수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여성들은 남성과 동등하게 사역하면서 그 시대 남성주의적 구조 속에서 규정하는 여성적 이미지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먼저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바울의 동역자 26명 중 9명이 여성이다. 바울이 쓴 이 구절을 잘 읽어 보면 남성과 여성의 역할이 구분되어 있지 않다. 남성과 여성이 초대교회에서 동일한 일을 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 여성들을 남성들과 동등한 동역자로, 사랑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오히려 바울은 로마서 16장에서 여러 사람 중에도 여성인 뵈뵈의 사역을 가장 먼저 언급하며 극찬하고 있다. 그러나 교회는 그동안 섬기는 자를 지칭하는 diakonos를 해석할 때 남성의 경우는 말씀의 직무로 해석하고 여성의 경우 어린이를 돌보거나 아픈 이를 방문하는 직무로 해석하는 우를 범해 왔다.
더 나아가 이 교수는 로마서 16장의 유니아가 여성이며 그 당시 사도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을 소개했다. 바울 당시 유니아는 여성의 이름이었다. 그러나 14세기부터 “여기 쓰인 유니아는 유니아가 아니라 유니아스라는 남자”라는 주장이 등장해 종교개혁을 지나며 지배적인 견해로 자리잡았다고 한다. 이 교수는 “(남성주의적 사고에 근거해) 여성의 이름인 유니아를 남성이라고 주장하기 위해 헬라어 엑센트가 유니아를 남성으로 간주하게 한다는 온갖 억측이 있지만 그 당시 어떤 문헌에서도 유니아스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확인되지 않는다”고 일침을 놓았다.
바울 역시 사역에 있어서 여성을 존중하고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서 남녀 평등에 관해 언급하지만 그의 여러 서신들은 교회 내 여성을 억업하는 데에 이용되기도 했다. 고린도전서 11장에 “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란 구절 혹은 디모데전서 2장에서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는 구절까지 등장한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모든 여자가 해산을 해야 구원을 얻는가”라고 물은 후 “바울의 이런 표현들은 그 당시 특정 교회들이 직면했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나온 말이기에 그 상황에 근거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성서의 권위를 내세우며 교리적 해석을 동원해 이 구절들을 여성에 대한 일반적이고 원칙적인 가르침으로 받아들이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의 강의 후에는 서보명 교수가 논평했고 참석자들이 질문하고 이 교수가 답하는 시간이 마련됐다. 이 세미나는 매년 CSKC와 미드웨스트교회가 주최하고 시카고한인교회여성연합회와 미국장로교 중서부 한미노회 여선교회연합회가 후원하는 행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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