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살면서 겪는 여러가지 어려움 가운데 가장 큰 어려움은 인간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입니다. 혼자 살 수 없다보니 사람이 모이는 곳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생기는 갈등을 호소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살아온 세월 만큼 갈등이 주는 무게가 더 무겁게 느껴지지만 그 짐을 내려놓는 방법을 알지 못하고 갈등 속에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바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과연 사람들이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렇게 살아갈까요? 정직하게 말하면 방법은 알고 있지만, 결코 그 방법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갈등 해결 방법은 용서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용서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기면 언제나 조언하는 말이 바로 먼저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막상 본인이 그런 갈등 속에 빠지게 되면 용서하기보다는 상대방을 향한 분노를 먼저 품게 됩니다. 용서하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인데 용서하지 못하다 보면 상대방이 미워지고, 미움이 지속되면 저주하는 마음이 생기고, 저주스러운 마음를 이기지 못하면 결국에는 상대방의 생명까지 빼앗아 버리려고 합니다. 이처럼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은 갈등의 당사자 뿐만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까지 불행하게 만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에게 용서를 가르치신 일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다른 사람에게 범죄한 사람을 용서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이 들어 있을 정도 용서는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아주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베드로라는 제자가 예수님에게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하면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용서의 한계가 세 번인 것에 비추어보면 아주 대단한 결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일흔 번에 일곱 번, 즉 사백 구십 번까지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무한한 용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용서의 절정이 드러난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고 희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용서가 갈등 해소의 유일한 길임을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용서하기를 완강하게 거부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용서하면 자기가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한 사람만 손해보고 용서받은 사람은 무지하게 이익을 본다고 믿기 때문에 용서라는 말조차 꺼내기 힘듭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과연 그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다. 내 마음 속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미운 마음의 노예가 됩니다. 그것이 내 안에서 화를 만들어 내어 마음 속에 평강이 깃들 자리를 태워버립니다. 이것이 병이 되어 나의 육체와 정신, 나아가 영혼까지 병들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할 가장 큰 이유는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미 부모님의 용서, 친구들의 용서, 이웃들의 용서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정말 용서가 안될 때는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죄인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까지 고난 당하시면서도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무한한 용서를 먼저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요즘 용서하지 못해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봅니다. 마치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사람들처럼 대립하며 살고 있습니다. 과연 나에게 갈등을 주는 상대방이 없으면 내가 사는 이 세상이 더 행복한 세상이 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가 없는 세상은 사람이 바뀐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세상은 언제나 갈등으로 뒤덮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내가 먼저 용서의 손길을 내밀 때입니다. 그리하면 나의 용서는 상대방은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그윽한 평강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내 안에서 시작된 용서하는 마음이 큰 세상을 바꾸는 출발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 가운데 하나가 사람들에게 용서를 가르치신 일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한 사람들을 용서하시고, 다른 사람에게 범죄한 사람을 용서하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가운데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구절이 들어 있을 정도 용서는 예수님의 가르침 가운데 아주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베드로라는 제자가 예수님에게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잘못하면 일곱 번 정도 용서해 주면 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용서의 한계가 세 번인 것에 비추어보면 아주 대단한 결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일흔 번에 일곱 번, 즉 사백 구십 번까지 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 가르침은 무한한 용서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용서의 절정이 드러난 자리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밖고 희롱하는 사람들을 향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용서가 갈등 해소의 유일한 길임을 잘 아는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용서하기를 완강하게 거부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용서하면 자기가 손해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용서한 사람만 손해보고 용서받은 사람은 무지하게 이익을 본다고 믿기 때문에 용서라는 말조차 꺼내기 힘듭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볼 때 과연 그 말이 맞습니까? 틀립니다. 내 마음 속에 누군가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나는 미운 마음의 노예가 됩니다. 그것이 내 안에서 화를 만들어 내어 마음 속에 평강이 깃들 자리를 태워버립니다. 이것이 병이 되어 나의 육체와 정신, 나아가 영혼까지 병들게 만듭니다. 그러기에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용서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할 가장 큰 이유는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은 예외없이 용서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미 부모님의 용서, 친구들의 용서, 이웃들의 용서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용서하심을 입은 그리스도인은 철저하게 용서하며 살아야 합니다. 정말 용서가 안될 때는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죄인인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피흘리시까지 고난 당하시면서도 나를 용서하신 예수님을 기억하고 용서해야 합니다. 무한한 용서를 먼저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요즘 용서하지 못해 서로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봅니다. 마치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사람들처럼 대립하며 살고 있습니다. 과연 나에게 갈등을 주는 상대방이 없으면 내가 사는 이 세상이 더 행복한 세상이 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용서가 없는 세상은 사람이 바뀐다고 상황이 바뀌지 않습니다. 용서하는 마음이 없으면 세상은 언제나 갈등으로 뒤덮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내가 먼저 용서의 손길을 내밀 때입니다. 그리하면 나의 용서는 상대방은 물론이고 나 자신에게 세상이 주지 못하는 그윽한 평강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내 안에서 시작된 용서하는 마음이 큰 세상을 바꾸는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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