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말씀을 증거할 때도 즐겨 사용하며 대화할 때도 자주 언급하며 좋아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독(愼獨)입니다. 이 단어는 ‘홀로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 없이 자신의 몸을 삼가 부끄러움이 없는 자신을 지키는 행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학도의 길에 들어 선 이후 최선을 다한다고 하였지만 요즈음 들어서 이 말씀이 더 와 닿습니다. 왜냐하면 모 단체에서 주최한 컨퍼런스에서 어느 목사님께서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지적을 받고 비판을 받는 것은 이미지 메이킹에 실패해서 그렇다” 라는 강연의 제목과 잠깐 언급된 신문의 글을 읽고 강하게 이 단어가 제 가슴속에서 요동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인의 길이 과연 부정적 의미 또는 긍정적 의미로 사용여부에 관계없이 어떤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살아가는 것인지에 대한 강한 의구심이 들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인가 세상에 보여주기 위해 이 길을 걸어가지 않습니다. 더구나 그렇지 않은 것을 잘 포장해서 사람들의 감정에 호소하듯 내어놓지 않습니다. 요즈음 부쩍 더 세상으로부터 한국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함을 지적 받는 것은 메이킹에 실패해서가 아니라, 교회의 존재가치와 신앙인의 존재이유를 외부적인 면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다 보니까 비판을 받습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보이려고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우리에게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고 실천하시므로 길의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그 분은 홀로 계실 때 자신을 하나님께 철저히 낮추어서 삼가 행하셨고 민중들 혹은 무리들을 위해서는 그들의 부족함이 많이 있었어도 두루 품어주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나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할 때도 그 분은 자신의 도리와 자신의 뿌리를 깊게 하나님께 내리고 서서 그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만을 생각하였습니다.

우리교회와 신앙인들이 다시 생각하고 실천할 것은, 조급증에 걸린 것처럼 무엇인가를 보여주지 못해 우왕좌왕 하지 말고 짧은 공생애를 위해 광야에서도 어디서든지 자신 속으로 깊이 들어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뜻을 위해 심장을 내어 놓는 그 분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바로 자신을 볼 줄 아는 신독이라는 짧은 단어를 가슴에 깊게 새겨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