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는 아름답다. 외국인으로서 인도를 이해하기란 쉽지 않는 것은 다양성 때문일 것이다. 넓은 대륙인 데다 기후도 다양하고 11억의 인구와 함께 4000년 동안 만들어온 3억 3천여 개의 신(神)이 존재하는 데다 약 30여 개의 서로 다른 민족과 언어가 존재하는 나라, 이렇게 함께 살수 있는 다양성이 배려와 이해의 선을 넘어 당혹감을 자아내는 무질서와 지저분함은 인도가 가진 극단적인 두 얼굴이 심한 대조를 이루며 동시에 보이게 된다. 이러한 극심한 대조가 또한 인도의 매력인지도 모른다.
인도는 하늘에는 인공위성과 땅에는 아직도 맨발로 뛰는 ‘리샤’가 공존하는 나라이다. 학력의 차이도 대단하다. 문맹률이 약 40%나 되지만 노벨 문학상뿐만 아니라 경제학 수상자까지 배출했다. 한편, 뇌물을 쓰지 않으면 물이나 취사용 가스, 전기조차 얻기가 힘 든다.
유엔 보고에 따르면 인도는 빠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혜택은 고르게 배분되지 못해 하루 1달러로 생계비로 생활필수품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극빈층이11억2천 만 명의 인구 중 40%이다. 큰 저택과 최악의 냄새를 풍기는 엄청난 쓰레기의 빈민가를 동시에 같은 거리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의 심한 빈부차, 그 곳이 바로 인도다.
온갖 동물이 어슬렁거리는 ‘거리’는 인도의 축소판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소는 거리의 황제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걸어 갈까? 1억 5천만의 생명들이 길 위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가 길 위에서 죽는다. 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해지는 인도 운전수가 멋대로 소란스럽게 경적을 울리며 질주한다. 어디 그 뿐이던가...... 개도 마찬가지 신세로 여기 저기 편한 모습으로 낮잠을 즐기며, 돼지 또한 그들 대열에서 유유히 쓰레기장을 뒤지며 살아간다.
거리의 일품은 인도 영성의 상징하는 구도자의 모습이다. 결혼을 하고 자손을 낳고 신과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며 재산을 증식하는 재가자의 생활하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가면 생의 제3시기로 숲 속에서 금욕과 명상의 생활을 하며 해탈(moksa)을 모색하다가 제4기: 고행자(sannyasin)로 완전히 가족과 사회와의 유대관계를 끊어버리고 걸식자로서 세상을 포기하며 고행과 명상을 통하여 해탈을 추구한다. 갠지스강을 거닐고 있을 때 한 오두막에서 온 몸에 횟 칠하며 이마에 굵게 붉은 색깔을 칠한 한 사람이 튀어나와 ‘나는 신이라’고 외친다. 신을 사진을 찍어도 괜찮은가 물으니 찍어라 하며 사진을 찍고 돈을 좀 주었다.
종교성이 많은 인도사람은 우상과 신을 만드는 데는 천부적 은사가 있다. 버스에서 집 담벼락까지 신과 장난감 같은 우상이 없는 곳이 없고, 심지어 이상하게 생긴 돌멩이부터 뱀까지 신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 쥐를 섬기는 사원이 있는가 하면 서구 지성인들을 매혹시키는 인도 철학도 강론한다. 힌두교는 샤머니즘처럼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신들을 제작했기 때문에 도덕성을 기대할 수 없다. 실제로 인도 사람들은 생각하는 죄의 개념은 기독교처럼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무지이며 죄책감보다 수치심이다. 그러므로 신에게 제물을 바치든지 종교의식을 잘 거행하면 얼마든지 속죄가 가능하여 반인도적인 행위를 제물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 할 수 있다고 여긴다. 힌두교의 사원을 방문하면서 많은 남근 신 숭배를 보면서 금욕을 말하면서 남녀 양성의 신으로 있는 힌두교는 동시에 에로티시즘을 미화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인도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인간의 가치를 외면한 계급주의: 캐스트제도가 같이 상존한다. 힌두의 경전 리그 베다에 의하면 “브라만(사제계급)은 푸루샤(인류의 원 조상격인 인물)의 입에서, 크샤트리아(정치계급)는 팔에서, 바이샤(상인 계급)는 허벅지에서, 수드라(종 계급)는 발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4성 계급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간디는 그들을 Harijan(신의 아들)라고 불렸지만 그들은 신의 자손이 아니다. 더 이상 내세에 사람으로 환생활수 없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일종의 일회성 소모품으로 신을 믿을 수 있는 권리도 박탈당한 채 사당에 들어 갈수 없고 경전도 읽을 수 없고 무서운 차별과 억압만이 정의다; “고양이를 쓰다듬을 수 있다. 길가에 다니는 들개를 만질 수 있다. 이런 자들을 만지면 안 된다. 부정 타기 때문이다”등. 세계 인구 6명중 한 명이 인도사람이라면 인도 사람 4명중 한 사람이 불가촉천민 즉Dalit에 속한다. 막스베러는 ‘캐스트가 없으면 어떤 힌두교도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인도에서 늘상 폭동의 소식을 듣는다. 새로운 뉴스라기 보다 일상의 풍토병과 같이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폭력 사태는 종교와 캐스트와 빈곤의 차이에 바탕을 둔 정치 경제적이고 종교적, 공동체적 사건이다. 비하르주에서는 인구 증가와 약탈적인 지주들과의 카스트적 갈등이, 구라사트에서는 모슬렘과 힌두교간의 종교 폭동으로, 오릿싸 주에서는 기독교와 힌두 과격분자와의 테러, 그리고 요즘도 뉴델리에서의의 기독교 집단과 폭동이다. 인도의 영성은 관용과 수용을 통한 공존이지만 타 종교에 대하여는 경직하며 과격하다. 인도의 다양성의 한계일까.
인도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제인교의 5대 종교의 다양한 발상지인 만큼 이슬람, 기독교, 바하이교등 외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유독 종교와 문화에 관한 ‘평화적 공존’이 아니라 대립과 갈등으로 고질적인 문제가 돼 가고 있다.
인도의 모든 다양성은 우상 때문이고 인도의 영성은 우상에 미혹되는 어리석은 마음 속에서 볼 수 있다.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사 44:15-17)
열린문 선교회 문승만 대표
인도는 하늘에는 인공위성과 땅에는 아직도 맨발로 뛰는 ‘리샤’가 공존하는 나라이다. 학력의 차이도 대단하다. 문맹률이 약 40%나 되지만 노벨 문학상뿐만 아니라 경제학 수상자까지 배출했다. 한편, 뇌물을 쓰지 않으면 물이나 취사용 가스, 전기조차 얻기가 힘 든다.
유엔 보고에 따르면 인도는 빠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혜택은 고르게 배분되지 못해 하루 1달러로 생계비로 생활필수품조차 제대로 구하지 못하는 극빈층이11억2천 만 명의 인구 중 40%이다. 큰 저택과 최악의 냄새를 풍기는 엄청난 쓰레기의 빈민가를 동시에 같은 거리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의 심한 빈부차, 그 곳이 바로 인도다.
온갖 동물이 어슬렁거리는 ‘거리’는 인도의 축소판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소는 거리의 황제다. 수많은 사람들이 어디로 걸어 갈까? 1억 5천만의 생명들이 길 위에서 태어나 길에서 살다가 길 위에서 죽는다. 운전대만 잡으면 난폭해지는 인도 운전수가 멋대로 소란스럽게 경적을 울리며 질주한다. 어디 그 뿐이던가...... 개도 마찬가지 신세로 여기 저기 편한 모습으로 낮잠을 즐기며, 돼지 또한 그들 대열에서 유유히 쓰레기장을 뒤지며 살아간다.
거리의 일품은 인도 영성의 상징하는 구도자의 모습이다. 결혼을 하고 자손을 낳고 신과 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며 재산을 증식하는 재가자의 생활하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가면 생의 제3시기로 숲 속에서 금욕과 명상의 생활을 하며 해탈(moksa)을 모색하다가 제4기: 고행자(sannyasin)로 완전히 가족과 사회와의 유대관계를 끊어버리고 걸식자로서 세상을 포기하며 고행과 명상을 통하여 해탈을 추구한다. 갠지스강을 거닐고 있을 때 한 오두막에서 온 몸에 횟 칠하며 이마에 굵게 붉은 색깔을 칠한 한 사람이 튀어나와 ‘나는 신이라’고 외친다. 신을 사진을 찍어도 괜찮은가 물으니 찍어라 하며 사진을 찍고 돈을 좀 주었다.
종교성이 많은 인도사람은 우상과 신을 만드는 데는 천부적 은사가 있다. 버스에서 집 담벼락까지 신과 장난감 같은 우상이 없는 곳이 없고, 심지어 이상하게 생긴 돌멩이부터 뱀까지 신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 쥐를 섬기는 사원이 있는가 하면 서구 지성인들을 매혹시키는 인도 철학도 강론한다. 힌두교는 샤머니즘처럼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신들을 제작했기 때문에 도덕성을 기대할 수 없다. 실제로 인도 사람들은 생각하는 죄의 개념은 기독교처럼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무지이며 죄책감보다 수치심이다. 그러므로 신에게 제물을 바치든지 종교의식을 잘 거행하면 얼마든지 속죄가 가능하여 반인도적인 행위를 제물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 할 수 있다고 여긴다. 힌두교의 사원을 방문하면서 많은 남근 신 숭배를 보면서 금욕을 말하면서 남녀 양성의 신으로 있는 힌두교는 동시에 에로티시즘을 미화시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인도는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이지만 인간의 가치를 외면한 계급주의: 캐스트제도가 같이 상존한다. 힌두의 경전 리그 베다에 의하면 “브라만(사제계급)은 푸루샤(인류의 원 조상격인 인물)의 입에서, 크샤트리아(정치계급)는 팔에서, 바이샤(상인 계급)는 허벅지에서, 수드라(종 계급)는 발에서 나왔다”고 한다. 이 4성 계급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비록 간디는 그들을 Harijan(신의 아들)라고 불렸지만 그들은 신의 자손이 아니다. 더 이상 내세에 사람으로 환생활수 없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일종의 일회성 소모품으로 신을 믿을 수 있는 권리도 박탈당한 채 사당에 들어 갈수 없고 경전도 읽을 수 없고 무서운 차별과 억압만이 정의다; “고양이를 쓰다듬을 수 있다. 길가에 다니는 들개를 만질 수 있다. 이런 자들을 만지면 안 된다. 부정 타기 때문이다”등. 세계 인구 6명중 한 명이 인도사람이라면 인도 사람 4명중 한 사람이 불가촉천민 즉Dalit에 속한다. 막스베러는 ‘캐스트가 없으면 어떤 힌두교도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그런지 인도에서 늘상 폭동의 소식을 듣는다. 새로운 뉴스라기 보다 일상의 풍토병과 같이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폭력 사태는 종교와 캐스트와 빈곤의 차이에 바탕을 둔 정치 경제적이고 종교적, 공동체적 사건이다. 비하르주에서는 인구 증가와 약탈적인 지주들과의 카스트적 갈등이, 구라사트에서는 모슬렘과 힌두교간의 종교 폭동으로, 오릿싸 주에서는 기독교와 힌두 과격분자와의 테러, 그리고 요즘도 뉴델리에서의의 기독교 집단과 폭동이다. 인도의 영성은 관용과 수용을 통한 공존이지만 타 종교에 대하여는 경직하며 과격하다. 인도의 다양성의 한계일까.
인도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시크교, 제인교의 5대 종교의 다양한 발상지인 만큼 이슬람, 기독교, 바하이교등 외래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유독 종교와 문화에 관한 ‘평화적 공존’이 아니라 대립과 갈등으로 고질적인 문제가 돼 가고 있다.
인도의 모든 다양성은 우상 때문이고 인도의 영성은 우상에 미혹되는 어리석은 마음 속에서 볼 수 있다.
무릇 이 나무는 사람이 화목을 삼는 것이어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더웁게도 하고 그것으로 불을 피워서 떡을 굽기도 하고 그것으로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기도 하는구나. 그 중에 얼마는 불사르고 얼마는 고기를 삶아 먹기도 하며 고기를 구워 배불리기도 하며 또 몸을 더웁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사 44:15-17)
열린문 선교회 문승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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