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보다 아버지가 더 크게 보였으면…
허 목사님은 저의 신학교 졸업 동기입니다. 몇 달 전까지 캔사스시티 한인침례교회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지난 11월, 심장마비로 너무 갑자기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교단에서 발행되는 신문 1면에 “사명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다 떠난 허영금 목사님 가족을 도웁시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유족으로 사모님과 1남 2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참 착하신 분이었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배려하는 마음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운동을 얼마나 잘했는지, 축구실력도 일품이었습니다. 미국에 건너와 목회를 하며, 더불어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그만 먼저 가셨습니다. 먼저 보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친구였습니다.
문득 신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10년 전에 하나님 품에 안기신 분이십니다. 그분도 저의 신학교 동기였습니다. 박사과정 졸업을 불과 몇 달 남겨두지 않고, 훌쩍 주님 품으로 떠나셨습니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불과 한 달만입니다. 역시 사모님과 세 자녀만을 남겨 두시고…
오늘 아침에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은 낙심해 있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격려의 말씀을 해 주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가족들을 떠나서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따라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꿈과 소망이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생활이 어려웠나 봅니다.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두고 온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왜 예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그런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눅 12:22)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예수님이 좀 야속하게 여겨졌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그런 마음을 갖게 하실까? 예수님만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오죽했으면 돈 걱정, 생활비 걱정을 하게 하셨을까? 예수님이 얼마나 무능력해 보였기에, 제자들이 생활비 걱정까지 하게 하셨을까? 부모가 돈을 벌지 못하면, 자녀들이 걱정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식구들, 자녀들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어떻게 안심시켜 주셨을까요? 돈으로 안심시켜 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믿음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핀 꽃을 입히시는 하나님, 하찮은 새들도 먹이시고, 하루 만에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입히시는 하나님, 너희들이 이 새들보다, 이 꽃들 보다 못하단 말인가?
너희들의 필요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십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현실만 보고 걱정하지 말고, 아버지를 보고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 아버지 보다 현실이 더 커 보였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다 내려놓고 사역하시는 이 땅의 많은 목사님들, 선교사님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때론 우리도 현실문제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자녀들 학비는 어떻게 하나? 은퇴 후에는 어떻게 살지? 내가 죽으면, 아내와 자식들은 누가 돌보나? 지금부터 내가 알아서 챙겨야 하나?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새들도 먹이시는 아버지, 꽃들도 입히시는 아버지, 너희들이 이 새들보다 못하단 말인가? 너희들이 이 꽃들보다 못하단 말인가? 너희들이 필요한 것을 내가 다 안다. 이 말씀으로 인해, 현실 보다 아버지가 더 크게 보였으면 합니다.
허 목사님은 저의 신학교 졸업 동기입니다. 몇 달 전까지 캔사스시티 한인침례교회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지난 11월, 심장마비로 너무 갑자기 하나님의 품에 안겼습니다. 교단에서 발행되는 신문 1면에 “사명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다 떠난 허영금 목사님 가족을 도웁시다’라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유족으로 사모님과 1남 2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참 착하신 분이었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배려하는 마음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운동을 얼마나 잘했는지, 축구실력도 일품이었습니다. 미국에 건너와 목회를 하며, 더불어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그만 먼저 가셨습니다. 먼저 보내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친구였습니다.
문득 신목사님 생각이 났습니다. 10년 전에 하나님 품에 안기신 분이십니다. 그분도 저의 신학교 동기였습니다. 박사과정 졸업을 불과 몇 달 남겨두지 않고, 훌쩍 주님 품으로 떠나셨습니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뒤 불과 한 달만입니다. 역시 사모님과 세 자녀만을 남겨 두시고…
오늘 아침에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은 낙심해 있는 제자들에게 용기와 격려의 말씀을 해 주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물과 배를 버려두고, 가족들을 떠나서 예수님 한 분만 바라보고 따라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꿈과 소망이 남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흔들립니다.
생활이 어려웠나 봅니다. 앞으로 더 좋아질 것 같지도 않습니다. 내 인생이 이대로 끝나는 것은 아닌가, 두고 온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되기도 했을 것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왜 예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그런 제자들을 보시며 예수님은 “무엇을 먹을까….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눅 12:22)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는 예수님이 좀 야속하게 여겨졌습니다.
왜 예수님은 자기 제자들에게 그런 마음을 갖게 하실까? 예수님만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오죽했으면 돈 걱정, 생활비 걱정을 하게 하셨을까? 예수님이 얼마나 무능력해 보였기에, 제자들이 생활비 걱정까지 하게 하셨을까? 부모가 돈을 벌지 못하면, 자녀들이 걱정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식구들, 자녀들 눈치가 얼마나 빠른데…?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을 어떻게 안심시켜 주셨을까요? 돈으로 안심시켜 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믿음을 갖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었습니다. 공중의 새들을 먹이시는 하나님, 들에 핀 꽃을 입히시는 하나님, 하찮은 새들도 먹이시고, 하루 만에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입히시는 하나님, 너희들이 이 새들보다, 이 꽃들 보다 못하단 말인가?
너희들의 필요를 아버지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고 하십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현실만 보고 걱정하지 말고, 아버지를 보고 믿음을 가지라고 하십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였습니다. 믿음이 없을 때, 아버지 보다 현실이 더 커 보였습니다.
주님을 위하여 다 내려놓고 사역하시는 이 땅의 많은 목사님들, 선교사님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때론 우리도 현실문제로 마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자녀들 학비는 어떻게 하나? 은퇴 후에는 어떻게 살지? 내가 죽으면, 아내와 자식들은 누가 돌보나? 지금부터 내가 알아서 챙겨야 하나?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다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새들도 먹이시는 아버지, 꽃들도 입히시는 아버지, 너희들이 이 새들보다 못하단 말인가? 너희들이 이 꽃들보다 못하단 말인가? 너희들이 필요한 것을 내가 다 안다. 이 말씀으로 인해, 현실 보다 아버지가 더 크게 보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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