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나라에 왕이 한 젊은이를 사형시키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죽기 전에 소원을 말해 보라고 했습니다. “죽기 전에 어머니를 뵐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건 안된다, 도망가려는 것 아니냐.” “꼭 돌아올 것입니다.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뵙게 해 주십시오.” 그 때 그 사형수의 친구가 나섰습니다. “이 친구가 돌아올 때까지 제가 볼모로 있겠으니 그를 보내주십시오.”

이 친구는 사형을 당할 친구가 예정된 날짜,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대신 죽기로 하고 묶여 있었습니다. 예정된 날짜가 다가 오는데, 고향으로 간 친구는 소식이 없습니다. 왕과 신하들이 그를 비웃습니다. “너는 친구 대신에 죽게 될 것이다. 너는 그에게 속은 거야! 네 목숨을 대신 내 놔야 한다.” 그러나, 이 친구는 끝까지 친구를 믿습니다. “아니요, 그는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아마도 무슨 사정이 있어서 아직 오직 못하는 것일 겁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약속된 시간이 되어 애궂은 친구가 대신 죽게 되었습니다. 그를 쳐 죽이려는 순간, 멀리서 “멈추시오, 내가 돌아왔소!”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머니를 만나러 간 원래 사형수가 돌아온 것입니다. “오는 도중 홍수가 나서 다리가 끊어져 멀리 돌아오느라고 늦었습니다. 이제 나를 죽이시오.” 약속을 지킨 사람과 끝까지 그 약속을 믿어준 친구 두 사람에게 왕은 감동했습니다. “나는 너희의 우정에 감동했다. 부럽다. 너를 죽이지 않겠다. 부디 너희의 우정이 영원히 변하지 말기 바란다.” 그러면서 왕은 그를 풀어 주었다고 합니다. 약속을 지킨다는 것, 아니 그 약속을 목숨처럼 여긴다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요? 말을 바꾸고, 자기 욕심앞에 약속을 시장바닥에 버려진 배추 껍데기처럼 여기는 세상에서, 이런 감동을 과연 볼 수 있을까요?

이 강림절기 (Advent) 에 이사야서 54장을 읽읍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심을 기다리는 강림절입니다. 왜 기다립니까? 다른 희망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세 가지 약속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그의 자녀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참으로 원대하고 뭉클한 약속이 주어져 있습니다.

첫째,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여자여! (영어로, O Barren!) 네가 이제 아이 낳은 여자보다 더 많은 자손을 얻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아이를 갖지 못한 여자는 사회적 약자요, 수치의 상징입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처지였습니다. 그 여인이 기쁨을 소리를 지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잉태 순간의 고통의 외침 대신, 기쁨이 터져 나오는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 네 장막 터를 넓혀라! 휘장을 아끼지 말고 써라! 왜? 좁을 테니까. 사람이 많아져서 크게 넓히지 않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직 보이지 않는 번성을 바라보면서, 미리 넓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비전입니다. 그렇게 될 것이니, 미래 준비해라! 사람이 많아 질 것이다. 미리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셋째, 너희 하나님이 너의 남편이 되어 줄 것이다. 남편이 없는 여자는 보호막이 없는 약자입니다. 고대 세계의 가장 불쌍한 자는 고아와 과부입니다. 남편이 전쟁에 나가 죽은 까닭에 의지할 데 없고, 업신여김을 받는 너를 내가 남편이 되어 지켜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제는 남편이 없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자에게 찾아 오십니다. 죄 때문에 외면했으나, 내가 영원히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잠시만 (7절) 버린 것이라고 위로하십니다. 산이 없어지고 언덕이 흔들리는 일은 있어도, 내 말은 변치 않는다고 약속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산이 흔들리는 일은 상상할 수 없다고 믿는다면, 더 견고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성경 전체, 복음의 내용 전체는 곧,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에 근거하여 메시아를 보내주셨습니다. “신약”의 메시아 탄생은 “구약”에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는 것에 모범을 보여 주신 분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믿을 만한 하나님”이 못됩니다. 이 계절에 하나님이 하신 약속의 선물을 기다리는 강림절을 만듭시다. 그리고, 우리도 굳은 약속을 받은 대로, 견고한 약속을 서로 전하는 인생이 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