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스승이라 일컬어지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생애와 사상은 서양 학문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철학과 중세철학의 교두보입니다. 아울러 아우구스티누스는 서양의 두 주류인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종합한 기독교 최고의 학자입니다. 하버드대 철학교수인 화이트헤드(Whitedhead)는 “현대의 모든 철학은 플라톤의 주석이고, 현대의 모든 신학은 어거스틴의 주석”이라고 할 정도로 그는 탁월한 신학자입니다.
히포의 주교로, 신학자로, 사상가로, 저술가로, 교회 행정가로 그리고 철학자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아우구스티누스는 행복학을 정립한 행복학자입니다. 그는 33년간의 방황을 마치고 예수 안에서 참 행복과 만족을 발견합니다. 그때 쓴 책이 행복학(De Beata Vita)입니다. 그의 ‘행복학’은 회심 후 세례 받기전 카시키아쿰 별장에 머물면서 사랑하는 어머니와 가까운 사람들과 나눈 대화를 하며 남기는 일종의 대화록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한 연구들이 철학사와 교회사에서 방대하게 이루어져왔지만 그의 행복론에 대해서는 간과되어 왔습니다.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학은 다소 생경스럽습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과 삶을 좀 더 면밀히 살피면 그에게 행복이라는 주제가 얼마나 중요한 주제인가를 알게 됩니다.
남서울대 문시영 교수는 행복이 그의 모든 저작들의 핵심 주제라고 설명하면서 인식론, 존재론, 악론, 그리고 역사철학에 이르기까지 행복이라는 주제가 아우구스티누스 철학을 관통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점에서 행복은 그의 철학과 신학에서 놓칠 수 없는 주요 주제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33세에 하나님 안에서 참 행복을 발견하기까지 잘못된 행복을 찾아 방황합니다. 그는 ‘헛된 행복 찾기’에 인생을 탕진합니다. 젊은 날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서 열심히 도전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는 행복 추구가 얼마나 위험하고 무서운 것인가를 하나님을 만나면서 스스로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의 행복’을 가까운 이웃들과 나누면서 그 대화록 ‘행복론(De Beata Vita)’을 남깁니. 그가 하나님 안에서 참 행복을 발견하기 이전의 시행착오를 정리해 보면 이렇습니다.
첫째 육체적 타락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17세에 가출을 하고 이름도 모르는 한 젊은 여성과 동거를 합니다. 이 여인과 14년간 동거를 하면서 육체적 쾌락에 탐닉합니다. 이 기간에 사생자 ‘아데오다투스’를 얻습니다. 어린 나이에 죽은 아데오다투스를 죽을 때까지 아우구스티누스가 돌보았다고 전해집니다. 결과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육체적 탐닉을 통한 ‘행복찾기’는 처절하게 실패합니다. 이 방황은 하나님을 만나면서 정리됩니다.
둘째 철학적 탐닉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습니다. 내용은 철학을 권장하는 책이었는데 그는 이 책을 읽고 철학을 통한 행복에 몰입합니다. 그러나 철학지식은 행복의 그림자를 보여주며 행복을 더 갈망하게 하지만 행복으로 안내하지 못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또 신플라톤주의에 심취합니다. 신플라톤주의는 물질을 악하게 봅니다.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 사상에 종교적 색채를 가미한 것입니다. 그는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철학적 행복을 찾아보지만 실패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 신플라톤주의 철학의 영향으로 하나님을 향한 영적 순례를 시작합니다.
셋째 신앙적 방황입니다. 그는 마니교의 이신론에 빠집니다. 이교도로서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지상의 존재를 사랑하게 되고, 감각적인 데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자신이 씨름했던 악과 고통, 과학과 합리성에 관한 정답을 줄줄 믿고 전심으로 추종했던 마니교를 떠납니다. 당시 마니교 최고 지성 밀레비스의 파우스트를 만난 후 그는 마니교 허상을 발견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하면 마니교 감독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고작 몇 권의 책을 읽고 타고난 입담으로 지적 허세를 부렸던 것입니다.
젊은 날 아우구스티누스의 ‘행복찾기’ 실패가 ‘하나님 안에서 행복’으로 인도하는 통로가 됩니다. 하나님 밖에서의 행복찾기는 그를 방황과 좌절로 이끌고 인생을 탕진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실패가 그를 절박하게 했고 하나님 안에서의 참 행복을 찾게 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