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삼석 교수
(Photo : ) 방삼석 교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열 한 제자들을 만나신 장소는 복음서에 따라 다르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마태와 마가는 갈릴리로(마28:7,10,16; 막16:7), 누가는 예루살렘(눅24:33. 52; 행1:4, 12), 그리고 요한복음은 두 곳 모두를 언급합니다(요20, 21). 비록 다르지만, 복음서들은 각각 이 장소들을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시는 곳으로 설명합니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보내시며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9-20)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16:15)
“그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눅24:47-48)

요한복음에서 주님은 베드로를 불러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시고, 주님의 양무리를 먹이고, 치라고 말씀하십니다(요21). 갈릴리도, 예루살렘도 모두 파송의 장소입니다. 마태복음은 파송과 관련하여 갈릴리를 특별한 장소로 언급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신 곳이 갈릴리입니다(마4). 세례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은 갈릴리로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머무십니다. 그것을 이사야 예언(9:1)의 성취로 본 마태는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마4:14-15)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에 의하면 갈릴리는 흑암의 땅과 이방인들에게 새 창조의 빛을 비추시는 예언이 성취되는 장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이제 참으로 제자들을 파송하기 위해 처음 그들을 부르셨던 갈릴리로 다시 부르십니다.

경배와 머뭇거림이 공명하는 복음
주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파송하시는 갈릴리는 경배와 머뭇거림이 함께 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7절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보고 경배하는가 하면,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때, “의심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에디스타산’(ἐδἱστασαν)은 ‘머뭇거림’, ‘주저함’, ‘우유부단함’의 의미가 강합니다. 이 단어가 나오는 곳이 한 군데 더 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무서워 빠지자, 주님께서 “왜 의심하였느냐”(14:31)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파도를 보고 무서워 머뭇거린 것이었습니다. 이 단어는 갈릴리를 불신앙의 장소가 아니라 경배와 머뭇거림이 공명하는 장소로 묘사합니다.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경배했지만, 그러나 전혀 기대하지 못한 생소한 경험 때문에 주저주저하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십자가에 못 박혀 분명히 죽었던 예수님과, 그분의 신성을 동시에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부르심은 십자가와 영광, 죽음과 부활, 그리고 인간과 신, 이라는 혼란스러움이 한 인물 안에 공명하는 주님의 부르심입니다. 제자들은 지금 신성에서 발산되는 매혹과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에 대한 두려움이 동시에 전개되는 신비와 혼란스러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경험 앞에 머뭇거리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경이로움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에 대한 경험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은 우리를 주저하고 머뭇거리게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그러나 사흘 만에 부활하신 주님에 관한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시고 영광 가운데 제자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나사렛 예수라는 사실은 세상이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교리입니다. 원수 되었던 이방인들에게 보냄을 받는 것, 그리고 힘과 권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십자가로 선포하는 것은 미련하고 실용적이지 않은 교훈입니다. 이 복음 앞에 우리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에게 경배하지 않을 수 없는 매혹적인 신비가 복음에 있습니다. 갈릴리는 이 머뭇거림과 경배가 혼란스럽게 뒤엉킨 복음, 십자가에 죽은 예수에게서 결코 기대할 수 없는 신성이 아니라면 누구도 초대될 수 없고, 파송 받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음 앞에서…
오늘날, 우리는 머뭇거림과 경배가 공명하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머뭇거리며 경배하던 제자들을 소외된 이웃들, 원수처럼 여겨지던 이방인들, 멸시받던 이방의 땅들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갈릴리의 그 생소한 복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인종과 민족과 신분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보냄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인종차별, 성차별, 폭력과 전쟁의 후원자들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복음을 열심히 말하는 사람들 때문에 놀라고 혼란스럽습니다. 갈릴리, 나사렛 예수의 신성 앞에 머뭇거리는 모습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복음이 더 이상 놀라운 소식이 아니라, 뻔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파송하시는 자리는 머뭇거림과 경배가 공명하는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본체이지만 자기를 비우고 낮아지신 하나님의 아들, 십자가에 죽으신 그리스도, 부활하사 영광 가운데 높아지신 나사렛 예수의 생소하고 경이로운 복음이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머뭇거림과 경배가 공명하는 복음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그 경이로움으로 놀라며 머뭇거리는 자리에서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파송하시는지, 그 음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원고의 내용은 전적으로 저자의 것입니다.

방삼석 교수: 센트럴신학대학원의 신학분과장이며 조직신학 조교수(겸임)로서 현재 달라스 뉴라이프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