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완전한 칭의가 종말에 불완전해질 수도 있고 현재의 불완전한 칭의가 종말에 완전해질 수 있다는 칭의 유보는, 칭의의 가변성을 전제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칭의의 가변성은 칭의를 '질량'과 '시간'의 영향을 받는 물질 개념으로 상정(想定)한 데서 나왔습니다. 마치 기후에 의해 온도계가 오르락내리락 하고, 강수량에 따라 저수지의 수위가 만조가 됐다 간조가 됐다 하듯, 그들의 의(義)도 자신과 외부의 영향에 따라 오늘 다르고 내일 다릅니다.
칭의유보자들이 즐겨 인용하는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은 이런 질량과 시간 위에 건설된 가변적인 칭의 개념입니다. 말하자면 현재까지는 칭의가 양적으로 완전하지만, 종말에는 아직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뜻입니다. 현재적 칭의의 양적 완전이 종말까지 유지 됐을 때 '아직'이 '이미'로 바뀌어집니다. 이 칭의의 '양'과 '시간'은 맞물려 있으며, 둘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작용 가운데서 칭의의 양적 완전과 불완전, 현재적 칭의(이미)와 미래적 칭의(아직)가 결정됩니다.
이러한 견해에는 '칭의의 양적 개념은 가능한가, 인간이 축적한 의의 양(量)에 따라 칭의의 완전과 불완전이 결정될 수 있으며, 시간에 의해 칭의가 변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자연히 따라붙습니다. 또한 '질량이 수시로 늘었다 줄었다 하고, 시간 따라 완전했다 불완전했다 하는 그런 가변적인 의(義)로 하나님을 만족시켜 정죄를 피할 수 있는가?' 라는 의문도 생깁니다.
또 양과 시간에 의해 칭의가 결정된다면 '완전을 이룰 의(義)의 양(量)이 얼마이며, 그 양적 완전을 종말까지 지속시키는 데 소용되는 노력과 에너지가 얼마인가?' 라는 부가적인 질문도 생깁니다. 그러나 불교인들이 극락정토(極樂淨土)에 들어가기 위한 적선량(積善量)이 얼마인지 모르듯, 칭의의 합격권 안에 들 수 있는 의(義)의 양과 그것을 지속해 나가는데 얼마만큼의 노력과 에너지가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질량과 시간 위에 건설된 가변적인 칭의는 칭의를 물질적인 유한의 차원으로 전락시키고, 성경이 말하는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한 칭의 개념과 거리가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에 영향을 받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가변적인 의는 결코 완전한 하나님의 의일 수 없으며, 그런 함량미달의 의로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릴 수 도 없습니다.
칭의의 불변성과 영구성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말대로, 내가 그것에 하등의 영향을 미칠 수 없는-보태거나 더할 수 없는- '나 밖으로부터의(out of me)' 전가받은 의에만 있습니다. 성경도 우리가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서만 단번에 영원히 의롭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자기 피를 가지고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의 영원한 구원을 획득하셨습니다(히 9:12, 현대인의 성경)',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히 7:27).'
그리스도의 구속의 피가 영원하기에(히 13:20), 그 피에서 나온 의도 영원합니다. 이 영원한 의는 '이미와 아직(already but not yet)' 같은 현재와 미래의 구분이 없는 초(超)시간적인 것이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질량이 변하지도 않는 초물질적 의입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의를 낡아지는 옷(창 3:7) 같이 변하는 인간의 의와 구분지은 것은 이 의의 불변성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시간이 흐르면 말라 부스러지는, 무화과잎 드레스를 영구적인 양가죽 드레스로 바꾸어주신 것은(창 3:7; 21), 가변적인 인간의 의를 불변의 완전한 그리스도의 의로 바꾸어주신다는 것을 뜻합니다. 오늘 우리가 믿음으로 입은 그리스도의 의(이신칭의)는 아담이 입은 양의 가죽옷 같이 영구적입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면서 '목욕한 자는 다시 목욕할 필요가 없다(요 13:10)'고 한 것은, 한 번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온전케 된 자는 다시 의롭다 함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변화산에서의 예수님의 찬란한 용모 변화(막 9:3) 역시-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희게 할 수 없을 만큼-그리스도 재림시 일어날 의의 영광의 현현인, '영화(Glorification)'를 미리 보여주신 것입니다.
칭의의 가변성을 주장하는 칭의유보자들의 주장대로라면 한 번의 칭의로는 안 되고 종말 때까지 반복적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하니, 칭의의 영원성과 불변성을 가르치는 이 말씀들과는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성경이 칭의를 견고하고 움직이지 않는 반석에 비유한 것 역시, 의는 결코 변화되거나 취소되지 않는다는 없다는 뜻입니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62:6)', '산들은 떠나며 작은 산들은 옮길찌라도 나의 인자는 네게서 떠나지 아니하며 화평케 하는 나의 언약(의의 언약)은 옮기지 아니하리라(사 54:10)'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단 9:24)'.
그리고 만약 칭의유보자들의 주장대로 칭의가 가변적이어서 완전과 불완전 사이를 오간다면, 칭의의 결과인 하나님의 통치도 일관성 있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가 의로울 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의롭지 못할 때는 마귀의 통치를 받습니다(그러나 '전부 아니면 무'라는 하나님의 통치속성상(마 12:28, 45), 하나님과 마귀의 이중적인 통치란 없기에, 이중 통치란 사실 마귀의 통치입니다).
또한 그로 하여금 율법에서 자유했다 종이 됐다, 하나님의 종이 됐다 마귀의 종이 됐다, 구원받았다 심판받았다 하기를 무한 반복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런 가변적이고 불완전한 칭의에는 어떤 궁극적인 보장도 따르지 못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2)'는 최종 선언이 따라붙을 수 없으며, 천국 입성도 음부 권세 타파도(마 16:18-19), 성령의 부어짐도 보장받지 못합니다. 이들은 모두 의로 말미암은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 하에서만 주어지는 약속들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도, 사자 같은 담대함을 갖게 하는 것도 오직 의의 완전에서만 나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롬 8:33)',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 같이 담대하니라(잠 28:1)'. 소년 다윗으로 하여금 적장 골리앗을 향해 겁 없이 도전하도록 한 것이나, 루터로 하여금 거대한 로마천주교를 대항하도록 한 것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는 의의 확신과 그로부터 나오는 성령의 능력 때문이었습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