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속(代贖)의 십자가
예수님은 제 육시로부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당시 유대나라의 시간은 해 뜨는 시간을 한시로 했기 때문에 아침 여섯시에 해가 뜹니다. 여기서 육시라는 것은 해 뜨는 시간에 여섯 시간을 더하여 계산하면 정오, 낮12시가 됩니다.
아침 일찍이 십자가 형틀을 지시고 출발하신 예수님이 다메섹으로 통하는 성문을 향하는 오르막길을 오르시다 여러 차례 쓰러지셨기에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더 시간이 지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절기를 지키러 왔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형벌을 보기 위해 길을 메웠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혀 달리신 예수님은 손과 발의 못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 피가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씌운 가시관에 찔려 피를 흘리셨습니다. 이렇게 십자가 형틀에 달리신 주님은 죽음만을 기다리는 입장이었습니다. 그 과정이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정오에 십자가에 달리신 후 갑자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후 3시쯤 되어 예수님이 크게 소리 질러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십니다. 이것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뜻으로 이것을 잘못 해석하면 마치 예수님이 하나님을 원망하는 조로 죽기 싫어서 불평하는 말로 호소하는 것처럼 착각할 수 있겠지만 이것은 예수님이 왜 그토록 처참한 형벌을 받으며 죽으셔야 했던가를 바로 깨달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하나님 앞에 저주스럽도록 버림을 받아 죽어갔는지를 바로 깨달으라고 이 말씀을 남기신 것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대답은 우리 각자가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 정확한 대답을 해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곧 ‘내 죄를 용서받도록 해주시고 내 영혼을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해산하기 위하여 치르신 대속의 희생이요, 고난이며, 산고였습니다’하며 정확하게 말씀드릴 수 있다면 이 사람은 참으로 구원을 보장받는 성도의 자격이 서둘러 질 줄 믿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이 말씀은 예수님이 몰라서 하신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원망, 불평하는 말씀도 결코 아닙니다. 성경은 택하신 백성들로 하여금 진리를 깨닫고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어지고 회개해서 구원얻으라고 기록하신 특별계시인 것입니다.
특별계시(特別啓示, special revelation)는 아무나 알 수 있도록 보여주는 것이 아니고 특별히 택하신 백성들에게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보여주시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하는 이 말씀은 우리들이 정확한 신앙고백을 통하여 예수님께 해답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된 자격으로 영원한 하늘나라 시민권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어왔음에도 이제껏 예수님이 구령의 산고, 즉 내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해산의 고통을 치루신 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진정한 의미라고 확실히 믿어지지 아니하고 건성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언젠가 영원히 후회할 수밖에 없는 불행을 접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2. 구령(救靈)의 산고의 증거(證據)
51절에 예수님의 영혼이 떠나실 때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크게 잘 지어진 성전입니다. 이 성전은 두 칸으로 되어 있는데 지성소와 성소로 구분지어져 있습니다. 지성소에는 아카시아 나무로 판자를 만들고 순금을 입혀 만든 궤짝이 법궤입니다. 그 궤 안은 세 칸으로 되어 있습니다. 돌판에 새겨진 십계명과 만나를 넣은 순금을 입힌 돌항아리,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습니다. 이 세 가지의 의미는 하나님은 모든 것의 기준이신 법통(法統)의 하나님이시고 만나가 담겨있는 항아리는 생명의 떡으로 오시고 산 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자를 상징하는 것이며 이스라엘을 영적으로 이끌러왔던 그 싹난 지팡이는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해 가시는 성령을 상징하는 것으로 삼위일체를 뜻합니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막고 있는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 만들어진 성소의 모형이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께 출입하는 성소가 있고 그 중간에 휘장이 막혀 있었는데,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번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휘장은 높이가 50규빗이나 되어 이 휘장을 찢고자 하면 아래쪽을 조금 잘라 양쪽으로 사람들이 잡고 당겨야 하는데, 예수님이 운명하실 때 휘장은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지상사명이 이루어지면서 성소와 지성소를 휘장으로 가로막아 둘 필요가 없어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 받은 자는 하나님께 직접 나갈 수 있도록 가로막힌 휘장이 찢어지며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 앞에 개개인이 예배를 드릴 수도 있고 기도를 할 수도 있습니다.
3. 부활(復活)의 증거
에스겔 37:1~37에 에스골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일어나 대군을 이루는 엄청난 부활의 역사도 구약시대 이스라엘에게 부활소망을 일깨워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시였고 예수님 당시에도 죽었던 나사로가 죽은지 나흘이나 되어 시체가 부패하여 썩는 냄새까지 났지만 예수님이 “나사로야, 일어나라”하시자 시체가 벌떡 일어나 걸어 나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전도대열에 동참했습니다. 그래서 나사로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더 많이 따르게 된다는 계산으로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은 나사로도 죽이려고 모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같은 나사로의 부활은 일시적인 부활입니다.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날 무덤이 열리고 성도들의 시체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다시 허락받은 인생을 살다 죽었습니다. 이런 것을 일시적인 부활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어 기대하는 궁극적 소망이 바로 이 부활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진수(眞髓)가 바로 이 부활의 소망으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나사로를 살려내심으로 제자들에게 또 예루살렘 근처에 있는 무리들에게 부활의 실질적인 증거를 나타내 보이셔서 나사로는 부활의 표본이 되었고 또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과정에서도 이와 같이 예수님은 돌아가시고 먼저 죽었던 성도들이 되살아났던 것은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곧 다시 부활하실 것을 나타내 보이신 증거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나사로가 예수님 보다 먼저 부활한 것처럼 보이고 예수님이 운명하시던 날 무덤에서 나온 자들이 먼저 부활한 듯 생각되지만 이 모든 것들은 일시적인 부활일뿐 영구한 부활의 주인공으로는 예수님이 첫 열매이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마27:54)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택하신 백성들의 영혼을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로 해산하시느라 치르신 예수님의 고통이 구령의 산고였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19~21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위로하시는 독백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게 될 때 예수님께 기대 걸고 따르던 제자들은 낙심하고 애통하며 통곡하겠지만 마귀 앞잡이로 세상에 속한 무리들은 손뼉을 치며 기뻐할 거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낙심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늘나라 자녀 되게 하기위해 치루는 해산의 고통일 뿐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이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을 인하여 그 고통을 다시 기억치 아니하느니라”(요16:21)
이렇듯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해산의 수고를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기 위하여 준비하신 기도는 육체가 십자가 형틀에 못 박히고 시달리며 죽기까지 혈기를 완전히 죽이고 영적인 사명에 일념해서 영적으로 사명 감당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피같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도 진리를 깨닫고 회개하여 은혜 받고 구원 얻었으면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구령의 산고를 겪더라도 그 영혼을 꼭 구원시키는 역할을 해주기를 예수님은 바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호소하시는 주님의 음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