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수록 “희생”이라는 단어가 고전에 속하고 있다. 부모님의 희생, 스승님의 희생, 지도자의 희생, 이런 어휘들이 우리를 감동시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도 희생하려 들지 않는다. 그 일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기준은 가치에 있지 않고 계산에 있다. 계산기를 몇 차례씩 두드리면서 철저하게 손해와 이익을 먼저 따진다.
세상에 이기주의가 만연하고 있다. 개인적 이기주의는 거짓과 위선과 무관심과 무책임으로 포장된다. 나에게 유익이 될만한 일은 앞을 다투지만 나에게 손해가 되는 일은 지긋이 외면한다.
개인적인 이기주의는 사회적인 파괴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조용히 지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이기주의가 연합하여 집단적 이기주의가 되면 그 파괴력이 엄청나게 커진다. 상식은 사라지고 모두가 군중심리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속이면서 떠밀려 간다.
집단 이기주의가 힘을 쓰는 시대가 되었다. 프랑스의 니스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집단 이기주의 앞에 무참히 쓰러졌다. 한 집단이 슬퍼하는 그 시간에 다른 집단은 춤을 추고 있었다.
요즘에는 들어보기 힘든 “군부혁명”이 터키에서 일어나 수백 명이 죽었다. 우리 조국의 어떤 읍내 사람들은 여러 시간동안 이성을 잃고 한 나라의 총리를 억류했다. 집단 이기주의는 정상적인 사고(思考)를 하지 못하게 한다.
실제로는 존재하지도 않는 초개인적인 생각이 군중을 지배한다. 훗날 후회할지언정 지금은 모두 그 생각이 옳다고 확신한다. 집단적 이기주의는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더 위험하다.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가 관건이다. 사도바울은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나에게 중심을 두면 개인적 이기주의가 되고 우리에게 중심을 두면 집단적 이기주의가 된다. 그러나 다른 사람, 다른 집단, 다가오는 세대에 중심을 두면 “사랑”이 된다.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이 있다면 절대로 이기주의에 빠질 수 없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하지 않으며, 오히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게 된다. 하고 싶은 말 다하지 않고, 가지고 싶은 것 다 가지지 않으며, 즐기고 싶어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된다면 단호히 절제하는, 사랑으로 희생하는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된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린도전서 10: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