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사들의 평균 수명을 계산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꽤 오래 살았던 수도사들에 대한 기록은 있다. 시릴에 따르면, 시리악 (Cyriac)은 107세에 사망하였고, 요한 헤시카스트 (Hohn Hesychast)는 105세까지 살았다. 유티미우스는 97세, 사바스는 94세에 사망하였다. 데오도시우스 수도원에 속한 한 수도사가 남긴 기록에, 모스쿠스 (Moschus)는 113세까지 살았다. 수도사들이 이토록 오래 살았던 이유는 광야의 건조한 기후와 수도원의 평안하고 절제된 생활 그리고 신선한 음식 때문이라 생각된다.
유대 광야 수도사들의 주요 음식은 빵이었다. 파란 라우라 (laura of Pharan)에 속한 작은 굴에서 경건 생활하는 수도사들에게 정한 채리톤의 규칙에 따르면, “하루에 한번, 저녁에 약간의 음식을 섭취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배부르게 식사해서는 안된다. . . 음식으로는 소금을 넣은 빵, 마실 물은 샘이나 하늘에서 내린 빗물을 마셔야 한다.” 제라시무스는 자신의 라우라에 거하는 수도사들에게 빵, 물, 종려나무 열매 외에는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가르쳤다. 모스쿠스가 전하는 탑 라우라 (the laura of Towers)에 거한 한 수도사는 딱딱한 빵 한 개로 하루를 지냈다. 또 파란 라우라에 거한 어떤 수도사는 매 4일을 빵 한 개로 지냈으며, 주일에는 수도원의 교회에서 성찬식 때의 빵만 먹었다고 하였다. 이런 기록에 따르면, 수도사들은 적게 먹는 것이 경건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빵은 수도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도 좋은 접대용 음식이었다. 예를 들면, 아르메니안 순례자들 400명이 유티미우스 라우라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빵 한 개와 포도주 그리고 기름을 제공받았다. 데오도시우스 수도원에는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많았기 때문에 많은 양의 빵이 필요했다. 책임을 맡은 수도사들은 처음에는 한 사람 당 빵 1 리트라 (litra/ 327g)로 제한했지만, 데오도시우스는 빵을 자유롭게 배식하라고 했다.
남은 빵들은 그냥 버리는 것이 없었다. 모두 모아서 나중에 다시 제공되었다. 이런 내용은 페트라 출신의 데오도레 (Theodore)가 밝힌 데오도시우스 수도원에 대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을 기념하는 날인 8월 15일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형제들 앞에는, 각 식탁에 빵 한 개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남은 많은 빵들을 모았다. 형제들에게 충분히 공급되었음은 물론이고 . . . 남은 것도, 햇볕에 말린 것도, 며칠간 충분했다.”
일반적으로 빵은 부피를 줄이고 운반하기 쉽도록 건조되었다. 마른 빵은 사순절 기간에 사막으로 들어가는 수도사들에게 좋은 음식이었다. 사바스와 그의 제자인 아가페투스 (Agapetus)는 양식으로 마른 빵 열 개를 담은 주머니를 가져갔다고 하였다.
팔레스틴은 곡식 생산 보다는 나무가 자라기에 적합하다. 그래서 유대 광야의 수도사들은 양식을 위하여 요단 동편으로부터 밀을 수입해야만 했다. 시릴은, 밀을 수입하여 대 라우라로 운반된 이야기를 하였다: “대 라우라의 청지기는 낙타를 이용하여 밀을 사해로부터 수도원까지 운반하기 위해 사라센인 (Saracens)을 고용하였다. 밀은 사해의 동쪽 마케루스 (Machaerus)에서 구입되었다.” 밀은 배에 실려 사해 서쪽으로 직접 운반되었다. 6세기 메드바 지도 (Medeba map)에 사해를 건너는 두 척의 배가 표시되었는데 아마도 밀을 수송했던 배로 예상된다.
밀은 먼 거리 또는 광야의 고립된 지역의 수도원으로 옮겨야 하므로 주로 낙타 상인들이 운반하였다. 고대에 운송료는 아주 비싸 밀 값의 두 배는 되었지만, 그럼에도 밀은 중요했기 때문에 큰 수도원들은 밀을 수입하였다. 코지바 수도원은 트랜스요르단에 영구 대리인을 두고 밀을 수입했다. 밀을 수입하는데 대리인을 고용했던 것은 수도사들의 양식이 수입 곡식에 의존되었기 때문이다. 수도원 생활에 필요한 일부는 헌신된 성도들의 기부로 충당되기도 했다. 시릴은, 사바스를 존경하는 메드바 사람들이 밀과 콩을 대 라우라와 사바스의 다른 수도원에 기부했던 사실을 기록하였다.
수도원들은 추수기가 끝나면 한 해에 필요한 밀을 구입하여 수도원 곡식 창고에 저장하였다. 수도원의 곡식 창고의 좋은 예가 히르벳 에드-드이르 (Khirbet ed-Deir)에서 발견되었다. 곡식 저장고는 수도원의 식당 옆 창고에 부속되었다. 이곳의 크기는 2.2 X 2.5m이다. 창고는 수도원의 남쪽 끝, 주방 근처에 건축되었다. 위치는 태양을 향해 있고, 오븐의 열기를 잘 받는 곳에 지어졌는데, 그 이유는 밀을 장기간 보관하는데 건조한 곳이 유리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수도원의 바닥은 모자이크나 깔끔하게 다듬은 돌로 처리했지만, 이곳 창고의 바닥과 벽은 두껍게 회를 발랐다. 방수 처리는 아닐지라도 효용 가치는 높았다. 저장 창고 바닥을 두꺼운 석회로 처리한
것은 액체가 아닌 곡식을 저장하기 위함이었다. 오늘날 이런 비슷한 창고를 시내산의 세인트 캐더린 수도원에서 볼 수 있다. 캐더린 수도원의 곡식 창고는 광야 수도원의 곡식 저장고를 볼 수 있는 유일한 예이다.
밀은 손 맷돌을 사용하여 빻았고, 빵은 수도원에서 구웠다. 고대의 수도원이 지금까지 계속해 온 기능 중의 하나는 빵을 굽는 일이다. 교회와 빵을 굽는 시설은 수도원 설립에 가장 먼저 지어진 건축물이었다 (유티미우스 라우라, 네아 라우라).
빵 굽는 곳에서 가장 중요한 설비는 오븐이다. 오븐에 필요한 나무는 광야에서 구했다. 갑바도기아 (Cappadocian) 출신인 조지의 이야기에 보면, 조지는 데오도시우스 수도원의 오븐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겉옷으로 내부를 청소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은 데오도시우스 수도원과 같은 큰 수도원의 오븐은 적어도 한 사람이 들어갈 정도로 컸음을 의미한다.
이런 자세한 내용은 히르벳 에드-드이르 (Khirbet ed-Deir)에서 발견된 오븐을 통해서 잘 이해할 수 있다. 히르벳 에드-드이르의 주방 남쪽 끝에서 발견된 오븐은 높이 0.7미터의 둥근 화덕 받침 위에 높이 1.5미터의 오븐이 놓여졌다. 이글루 (Igloo) 모양의 오븐은 직경이 2.4미터에 이른다. 빵이 구워지는 오븐 바닥은 쐐기 모양 타일로 안에서 바깥 쪽으로 넓어지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오븐의 천정은 돔 (dome) 형식으로, 6세기의 오븐으로 완전한 형태가 남아 있는 것은 시내산 캐더린 수도원의 오븐이 유일하다.
수도사들에 의해 구워진 빵은 둥근 형태로 비잔틴 시대의 모자이크에 자주 등장한다. 그리고 적어도 성찬식에 사용되는 빵에는 십자가 도장, 곧 수도원의 특별한 도장이 찍혀 구워졌다.
빵을 구울 때의 경건한 분위기는 파코미우스 (Pachomius)의 규칙에 잘 나타난다. “저녁에 반죽이 완전히 끝날 때까지 아무도 말하지 말고, 아침에 빵을 굽는 곳이나 빵을 반죽하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과도 말하지 말라. 수도사들은 빵이 완전히 구워질 때까지 성경을 암송할 것이며, 만약 무엇이 필요하면, 말하지 말고 노크로 표시하라”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린도전서 10:31)
이주섭 목사는 성경의 사실적 배경 연구를 위해 히브리어를 학습하였고, 예루살렘 대학과 히브리 대학에서 10여년에 걸쳐 이스라엘의 역사, 지리, 고고학, 히브리인의 문화, 고대 성읍과 도로를 연구한 학자이다. 그는 4X4 지프를 이용하여 성경의 생생한 현장을 연구하기도 했다. 문의 jooseoblee@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