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을 방문하게 되면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게 된다. 첫째, 정녕 교회에서 선교사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랜만에 와서 보고라도 하려고 전화하면, 어떤 교회에서는 연달아 이번 주까지 다섯 명이 다녀갔다고 한다. “그래요!?” 놀라면서 전화를 끊는다.
한국 목회자들이 선교사의 전화를 받으면 “아차” 하고 놀란다는 것이다. 왜? 대부분 어렵다, 죽겠다, 힘들다. 그래서 후원하라고 타령하는 소리를 강단을 통하여 들어주어야 하고, 빚쟁이를 만나는 것처럼 무언가(후원금)라도 제공하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랄까? 놀람보다도 귀찮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둘째, 러시아의 경우 비자 문제로 인하여 매우 큰 곤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어려운 비자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에 나오게 된 상황을 설명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세계 선교지 삼분의 일은 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러시아가 다른 선교지와 다른 것은 비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본국으로 가야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 보면 3개월, 6개월 만에 나가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파송교회에 전화를 걸면 또 나왔느냐면서 이번에는 교회 방문하지 말라고 한단다.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서로 입장이 다른 것이다. 교인들 보기에 미안하고 선교사가 비행기 타고 다니다 볼일 다 본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이유이다. 선교사는 올 상황이 아닌데도 어쩔수 없이 비행기를 타야 하는 비통함이 있는데……. 이제는 “가는 데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선교사”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뉘집 강아지처럼 흔한 이름이 되어버렸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요즘 황당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얼마 전 어느 선교 잡지의 칼럼에 보니, 2030년까지 100만 명의 선교사를 내보내야 한다는 취지의 단체장의 글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비전을 세우고 기도하니, 가슴이 뛰고 감격에 벅차 잠을 잘 수가 없다는 논지였다. 또 어느 교단은 2020년까지 단독으로 5천명 선교사를 파송한다고 결의하고, 장자교단으로서의 명분을 확고히 하자는 그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현장 사역을 감당하면서 지휘하고 있는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쩌자고 이러한 놀라운(?) 비전을 계획한단 말인가? 벌써부터 이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 모두가 망하고 싶은 것인가? 세계 역사 속에 성직자가 많아지면 그 나라는 망한다는 아이러니칼한 이야기도 있다는데…….
2009년 6월, 공식적으로 20,000명 이상의 한국인 선교사가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비공식적인 사람들까지 합치면 대단할 것이라 여긴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 냉정하게 한 번 생각해 보자.
투자비용
1. 한국교회 매일 새벽기도: 기도회 * 1백만(천만 성도의 1/10) * 30분 = 하루에 30,000,000 시간 투자
2. 한국교회 재정 투자 현황: 매월 20,000명 * 평균 3,000$ = 매월 60,000,000$ 외화 송금
3. 건물구입비용: (계산상 대략) 5,000명 * 10만$ = 500,000,000$
4. 대학 및 대학원 졸업한 목사와 평신도 선교사 고급인력 투자 비용?
세상에 그 어느 기관이 매달 이렇게 엄청난 재정을 투자하고 시간을 투자하겠는가? 이러한 고급인력을 가진 기업이 몇 개나 되겠는가? 실로 엄청난 일이다.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라고 믿는다.
현지상황
한국인 선교사의 활동으로 수많은 교회들이 개척되고, 지도자 양성으로 현지 목회자들이 세워진다. 구원받는 무리가 증가하고, 사회의 변화가 시도되며, 문맹이 퇴치되고, 의료혜택이 주어지며, 가난을 물리치고, 정의와 질서를 구현하는 일에 있어서 한국인 선교사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선교사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후진국 사회의 삶의 개혁과 변화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 비전략적인 사역활동, 선교사·목사 신뢰지수, 비전문성, “‘믿습니다’ 전략”, 윤리와 도덕지수, 사역의 성과, 현지인과 마찰, 사역자간의 갈등, 재정관리 미숙, 영성 관리 허술, 사역철수, 후원 본부 행정관리 미숙……. 이러한 부분에서 많은 경우에 문제를 안고 있으며, 실제적인 상황에서 그저 살아가는 일에 급급하고, 자녀들 교육시키는 일에 정신 없이 허겁지겁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막대한 투자와 재원에 비하여 이처럼 무질서한 자유 단체는 세계 어느 곳에도 아마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반 기업가들은 투자와 수익의 비율이 맞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대책을 세우고 다른 전략을 세우든지 변동을 한다. 재정에 그만큼 민감하다. 하지만 후원금을 받는 선교단체나 선교사는 그렇지 않다.
선교사역을 일반 투자에 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투자에 대한 분명한 평가와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각 선교단체나 교단은 이러한 상황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고 점검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맡겨준 것에 대한 책임(청지기)을 물을 때에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기독교 윤리에도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황당한 비전을 이루기 위한 제언
첫째, 훈련원에서 신뢰성 있는 일꾼을 만들고 훈련하여 보내야 한다. 이것이 관건이다.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도덕적인 면에서 일반인들보다 못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탄의 권세하에 놓이게 되어 하수인 노릇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격적으로 기본적인 질서와 예의를 지킬 줄 알고 대인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의지적으로 대처하고 지혜롭게 해결할 만한 그러한 일꾼으로 강훈련, 준비를 시켜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과 공동체를 명예를 훼손하는 일은 적어도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 숫자와 열매에서 한국교회는 자유로워야 한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 숫자에 열을 올리면 거짓을 잉태하고 거짓을 잉태하면 일등, 최고라는 열매를 생산한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숫자 놀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기 위하여, 선한 의도로 경쟁을 하기 위하여 숫자는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에서는 숫자 놀음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속히 오천 명이라는 허황된 목표를 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몰고 올 것이다. 필자는 GMS 소속이다.
셋째, 전략선교를 하여야 한다. 전쟁에 나가는 장군들이 전략과 전술을 세우지 않고 전투에 임한다면 그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이다. 본인의 생명은 고사하고 병사들의 생명을 잃게 한다. 승부가 없는 싸움인 것이다.
로마인이나 서구 선교사들이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계획하고 일을 한다면, 한국 선교사들은 체질상 헬라인들처럼 감성과 느낌에 의하여 일들을 진행하기 때문에 비전략적일 경우가 많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역들은 더욱 더 황당한 비전으로 일관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비행기 타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선교사의 삶과 사역에 가장 우선적인 것이 무엇인가? 전략부터 세워야 한다. 대체적으로 현장에 가서 세워야 한다고 한다. 전쟁터에도 그렇게 나갈 것인가?!
넷째, 전문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낙후된 지역으로 들어갈수록 선교사는 만능이 되어야 한다. 어느 부분에서든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위기와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소수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현대선교는 도시화 현상을 따라서 선교 사역이 도시 중심이기에 전문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전문성은 시대를 변화시키고 있다. 작은 예로, 구제 사역을 하는 데에도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무조건 구제하고 돕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덤비면, 구제사역이 거지사역으로 바뀐다. 선교지에서 베푸는 긍휼사역이 많은 경우, 거지사역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 것은 전문성의 결여일 것이다. 후원금이 조금 여유가 있으면 한번 해보는 정도의 사역, 사역의 건수를 만들기 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백 만명 선교사 시대를 선언하고, 기천 명 선교사 파송 운운하는 선교의 대가들은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문제가 있다고 하여서 사람을 보내는 것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책임이 있어야 한다.
죄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언제나 어디서나 문제는 발생하고, 주님의 제자 중에도 가룟 유다가 있었던 것처럼 미꾸라지들은 설치고 구정물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이는 훌륭한 사역을 위하여 필요한 사탄의 권세일 것이라고 생각도 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냉철한 생각은 곧 부정적인 시각으로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바른 선교를 위한 외침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정말 하나님의 기준에 합한 사역자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너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질문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적어도 “의식”은 가지고 있다. 선교지에서 10년만 세월을 보내게 되면 모두의 선교사역이 눈에 훤히 들어온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선교의 방법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시간과 재정과 인생을 값있게 소비하는 것인가를!
물론 나에게는 황당한 일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나의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은 첫째, 역사 인식과 둘째, 주도면밀한 현실적인 판단,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전의 가능성 위에 높은 이상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배경이 없이 생겨난 비전은 역시 모래 위의 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바른 선교를 소망하며…
Sergei (모스크바 선교사)
한국 목회자들이 선교사의 전화를 받으면 “아차” 하고 놀란다는 것이다. 왜? 대부분 어렵다, 죽겠다, 힘들다. 그래서 후원하라고 타령하는 소리를 강단을 통하여 들어주어야 하고, 빚쟁이를 만나는 것처럼 무언가(후원금)라도 제공하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이랄까? 놀람보다도 귀찮다는 표현이 더 맞을까?
둘째, 러시아의 경우 비자 문제로 인하여 매우 큰 곤란을 겪고 있다. 그래서 어려운 비자 이야기를 하면서 한국에 나오게 된 상황을 설명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세계 선교지 삼분의 일은 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러시아가 다른 선교지와 다른 것은 비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반드시 본국으로 가야 된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어쩌다 보면 3개월, 6개월 만에 나가게 되는 일이 발생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파송교회에 전화를 걸면 또 나왔느냐면서 이번에는 교회 방문하지 말라고 한단다.
참으로 실소를 금할 수가 없는 현실이다. 서로 입장이 다른 것이다. 교인들 보기에 미안하고 선교사가 비행기 타고 다니다 볼일 다 본다는 소리를 듣게 된다는 이유이다. 선교사는 올 상황이 아닌데도 어쩔수 없이 비행기를 타야 하는 비통함이 있는데……. 이제는 “가는 데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선교사”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뉘집 강아지처럼 흔한 이름이 되어버렸다는 생각도 한다.
그런데 요즘 황당한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얼마 전 어느 선교 잡지의 칼럼에 보니, 2030년까지 100만 명의 선교사를 내보내야 한다는 취지의 단체장의 글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생각을 하면서 비전을 세우고 기도하니, 가슴이 뛰고 감격에 벅차 잠을 잘 수가 없다는 논지였다. 또 어느 교단은 2020년까지 단독으로 5천명 선교사를 파송한다고 결의하고, 장자교단으로서의 명분을 확고히 하자는 그러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현장 사역을 감당하면서 지휘하고 있는 나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어쩌자고 이러한 놀라운(?) 비전을 계획한단 말인가? 벌써부터 이상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데, 모두가 망하고 싶은 것인가? 세계 역사 속에 성직자가 많아지면 그 나라는 망한다는 아이러니칼한 이야기도 있다는데…….
2009년 6월, 공식적으로 20,000명 이상의 한국인 선교사가 세계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비공식적인 사람들까지 합치면 대단할 것이라 여긴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이 어떤지 냉정하게 한 번 생각해 보자.
투자비용
1. 한국교회 매일 새벽기도: 기도회 * 1백만(천만 성도의 1/10) * 30분 = 하루에 30,000,000 시간 투자
2. 한국교회 재정 투자 현황: 매월 20,000명 * 평균 3,000$ = 매월 60,000,000$ 외화 송금
3. 건물구입비용: (계산상 대략) 5,000명 * 10만$ = 500,000,000$
4. 대학 및 대학원 졸업한 목사와 평신도 선교사 고급인력 투자 비용?
세상에 그 어느 기관이 매달 이렇게 엄청난 재정을 투자하고 시간을 투자하겠는가? 이러한 고급인력을 가진 기업이 몇 개나 되겠는가? 실로 엄청난 일이다.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능력이라고 믿는다.
현지상황
한국인 선교사의 활동으로 수많은 교회들이 개척되고, 지도자 양성으로 현지 목회자들이 세워진다. 구원받는 무리가 증가하고, 사회의 변화가 시도되며, 문맹이 퇴치되고, 의료혜택이 주어지며, 가난을 물리치고, 정의와 질서를 구현하는 일에 있어서 한국인 선교사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선교사가 아니었다면 이러한 후진국 사회의 삶의 개혁과 변화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는 일, 비전략적인 사역활동, 선교사·목사 신뢰지수, 비전문성, “‘믿습니다’ 전략”, 윤리와 도덕지수, 사역의 성과, 현지인과 마찰, 사역자간의 갈등, 재정관리 미숙, 영성 관리 허술, 사역철수, 후원 본부 행정관리 미숙……. 이러한 부분에서 많은 경우에 문제를 안고 있으며, 실제적인 상황에서 그저 살아가는 일에 급급하고, 자녀들 교육시키는 일에 정신 없이 허겁지겁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막대한 투자와 재원에 비하여 이처럼 무질서한 자유 단체는 세계 어느 곳에도 아마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일반 기업가들은 투자와 수익의 비율이 맞지 않으면 즉각적으로 대책을 세우고 다른 전략을 세우든지 변동을 한다. 재정에 그만큼 민감하다. 하지만 후원금을 받는 선교단체나 선교사는 그렇지 않다.
선교사역을 일반 투자에 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투자에 대한 분명한 평가와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각 선교단체나 교단은 이러한 상황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고 점검하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맡겨준 것에 대한 책임(청지기)을 물을 때에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이러한 것은 기독교 윤리에도 어긋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황당한 비전을 이루기 위한 제언
첫째, 훈련원에서 신뢰성 있는 일꾼을 만들고 훈련하여 보내야 한다. 이것이 관건이다. 믿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윤리·도덕적인 면에서 일반인들보다 못한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사탄의 권세하에 놓이게 되어 하수인 노릇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격적으로 기본적인 질서와 예의를 지킬 줄 알고 대인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의지적으로 대처하고 지혜롭게 해결할 만한 그러한 일꾼으로 강훈련, 준비를 시켜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과 공동체를 명예를 훼손하는 일은 적어도 없어야 하지 않겠는가!
둘째, 숫자와 열매에서 한국교회는 자유로워야 한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 숫자에 열을 올리면 거짓을 잉태하고 거짓을 잉태하면 일등, 최고라는 열매를 생산한다.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숫자 놀음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기 위하여, 선한 의도로 경쟁을 하기 위하여 숫자는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에서는 숫자 놀음에 노예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속히 오천 명이라는 허황된 목표를 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앙을 몰고 올 것이다. 필자는 GMS 소속이다.
셋째, 전략선교를 하여야 한다. 전쟁에 나가는 장군들이 전략과 전술을 세우지 않고 전투에 임한다면 그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이다. 본인의 생명은 고사하고 병사들의 생명을 잃게 한다. 승부가 없는 싸움인 것이다.
로마인이나 서구 선교사들이 조직적이고 논리적으로 계획하고 일을 한다면, 한국 선교사들은 체질상 헬라인들처럼 감성과 느낌에 의하여 일들을 진행하기 때문에 비전략적일 경우가 많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우리의 사역들은 더욱 더 황당한 비전으로 일관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 대한 구체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비행기 타기 전에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선교사의 삶과 사역에 가장 우선적인 것이 무엇인가? 전략부터 세워야 한다. 대체적으로 현장에 가서 세워야 한다고 한다. 전쟁터에도 그렇게 나갈 것인가?!
넷째, 전문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낙후된 지역으로 들어갈수록 선교사는 만능이 되어야 한다. 어느 부분에서든지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위기와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소수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현대선교는 도시화 현상을 따라서 선교 사역이 도시 중심이기에 전문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전문성은 시대를 변화시키고 있다. 작은 예로, 구제 사역을 하는 데에도 전문성이 있어야 한다. 무조건 구제하고 돕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문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덤비면, 구제사역이 거지사역으로 바뀐다. 선교지에서 베푸는 긍휼사역이 많은 경우, 거지사역으로 결론을 맺고 있는 것은 전문성의 결여일 것이다. 후원금이 조금 여유가 있으면 한번 해보는 정도의 사역, 사역의 건수를 만들기 위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마 백 만명 선교사 시대를 선언하고, 기천 명 선교사 파송 운운하는 선교의 대가들은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담그지 못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문제가 있다고 하여서 사람을 보내는 것을 중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러나 책임이 있어야 한다.
죄된 인간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언제나 어디서나 문제는 발생하고, 주님의 제자 중에도 가룟 유다가 있었던 것처럼 미꾸라지들은 설치고 구정물을 일으키게 되어 있다. 이는 훌륭한 사역을 위하여 필요한 사탄의 권세일 것이라고 생각도 할 것이다.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냉철한 생각은 곧 부정적인 시각으로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나의 생각은 바른 선교를 위한 외침이라고 생각하면 좋겠다. 정말 하나님의 기준에 합한 사역자들이 얼마나 될 것인가? “너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가” 질문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적어도 “의식”은 가지고 있다. 선교지에서 10년만 세월을 보내게 되면 모두의 선교사역이 눈에 훤히 들어온다. 어떻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선교의 방법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시간과 재정과 인생을 값있게 소비하는 것인가를!
물론 나에게는 황당한 일이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비전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분명한 나의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은 첫째, 역사 인식과 둘째, 주도면밀한 현실적인 판단, 그리고 미래를 향한 도전의 가능성 위에 높은 이상을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생겨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배경이 없이 생겨난 비전은 역시 모래 위의 꿈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바른 선교를 소망하며…
Sergei (모스크바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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