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렛장로교회 권혁부 목사

날짜 2009년 6월 21일
성경본문 : 로마서 8장 26-28절
제 목 :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하나님!

어느 유명한 언론인이 이 시대의 최고의 인류학자에게 물었습니다.‘현대인들을 한마디로 평가하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석학은 아주 간단하게 대답합니다.‘현대인은 정치와, 경제, 우주와 세상에 대하여 많이 알고 있습니다. 또한 복잡한 사이버세계와 통신 세계들도 점점 더 많이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이 가장 연약한 부분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남이 인정해주는 것으로 자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식도, 물질도, 외모도 과도하게 신경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적 기준이지 진정한 나는 아닙니다. 남이 내게 하는 어떤 말도 사회적 지위도 때로는 필요합니다. 그러나 중요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어떤 존재로 보는 것인가 입니다. 오늘에 있어서 나의 모습! 나는 지금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 나를 깨달았고, 얼마만큼 사람다웠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리스도에게 가까이 한 삶을 살았는지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어 보아야합니다.

우리가 성령에 대하여 알고자 하면 사도행전보다 요한복음에서 깨달아야합니다. 특히 (요14-16)에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서 보면 주님이 우리에게 약속하시고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신 성령님은 보혜사이십니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며, 구원받은 우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성령님이 오늘 본문에 우리를 위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과정을 먼저 26절부터28절까지를 봅니다. 28절 이후부터는 신학적인 문제 즉 소명과, 의롭다하심, 영화롭게 하심과, 영적으로 우리 신분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이 부분도 한번 말씀드리고자 하나 오늘은 28절 앞부분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보혜사 성령님의 역할을 봅니다.

1.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26절)

어떻게 도우십니까?- “우리가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나”
문제는 우리가 구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연약함을 뜻하는 ‘아스데네마'는 기도까지도 할 수 없는 신앙의 무기력함을 가리키는 것으로 성령께서는 양자의 영으로 보증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최종적으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 끝까지 도와주시고 계십니다. 믿음이 약할 때 우리는 기도하지 못합니다. 때로는 믿음이 있다고 해도 도무지 자신의 힘으로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캄캄한 터널같이 가슴만 답답하고, 눈물마저도 나오지 않는 절망의 밤에는 어떻게 기도하여야할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이 때 나는 기도하지 못하여도 성령님은 나의 연약한 부분을 대신하여 중보하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내 삶은 결국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 같아도 사실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면서 그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내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롬8:26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성령님이십니다. 복음성가 중에 ”당신이 지쳐서 기도할 수 없고,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 내릴 때 주님은 아시네 당신의 약함을 사랑으로 돌봐 주시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위해 기도하네“란 찬양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이 혼자라고 생각할 때 결코 혼자 두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말로 다할 수 없는 간절함으로 간구하시고 계시는 분이심을 기억하십시다.

2.성령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시는 것입니다(27절)

특히 27절에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 모든 것을 아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시139:2-4)주께서는 나의 앉고 일어서 심지어 나의 생각까지도 아시는 분이시라고 하였습니다. 나는 나를 모르고, 나는 나의 구할 바를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별개로 활동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을 아시고,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위해 구원의 역사의 완성과 행복을 위해 함께 일하고 계심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센프란시스코 앞바다 섬 중에 악명 높은 감옥이 있습니다. 30년 이상 선고받은 죄수들이 갇히는데 재미난 것은 아내는 3년 정도 면회 오다 안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평생을 면회 온답니다. 더 신기한 것은 아버지는 오지 않는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가요? 아닙니다. 자식을 사랑합니다. 하루도 잊지 못합니다. 그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마음도 자기의 마음과 같이 그 자식을 보고 싶고 마음이 아파서 면회를 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아시는 성령님이 저와 여러분 한분 한분을 위해 중보하시는 것이 이와 같은 것입니다.

3.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28절)

28절의 말씀은 “모든 것이 선을 위해 함께 역사한다“ <판타 쉬네르게이 에이스 아가돈>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실 뿐 아니라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십니다.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시작부터 선하신 것입니다. 즉 사랑으로 출발하셔서 사랑으로 마치시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뜻은 모든 것이 선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에게 향하신 뜻은 처음부터 선하십니다. ‘생선을 달라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마7:10-11)(눅11:9-13)에는 좋은 것을 (성령을)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 속에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선물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악한 마귀와의 영적전쟁에서 승리한 인생과 하나님 편에서 본 가장 성공한 인생을 삼고 싶어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셔서 우리의 세밀한 부분까지 살피시며 우리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가장 선한 곳으로 지금 인도하고 계시고 있음을 기억하십시다. 이처럼 하나님의 깊으신 가슴속에는 언제나 선하신 사랑이 계속 깔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결과적으로는 반드시 선이 이루어지고 만다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 그랬구나!’ 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조금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인간의 지식보다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 있습니다. 인간의 의지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먼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작도 사랑이며 끝도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느 어촌의 조그마한 어부들이 고기잡이를 떠났습니다. 그날 밤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배들은 돌아와야 할 시간에 돌아오지를 않습니다. 온 동네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나가서 남편 혹은 아버지가 돌아오기만을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밤이 점점 깊어갑니다. 파도소리만 심하게 들릴 뿐 배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이때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어느 집에서 이린 아이가 집을 보다가 촛불을 넘어뜨리며 불이 났습니다. 동네 사람은 모두 달려가서 정신없이 불을 끄느라고 몇 시간이 흘렀습니다. 모두가 배를 기다리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있을 그 때에 조그만 고깃배들이 돌아 왔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는 풍랑이 심하여 우리의 방향도 잃어버렸는데 별안간에 지평선에 불빛이 환하게 보여 그 불을 목표로 해서 죽을 힘을 다해 돌아 왔습니다.” 불에 탄 집은 새로 지으면 됩니다. 그러나 그날 불이 나지 않았다면 저들은 방향을 잃어버린 채 아마 어부들은 실종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그 집이 불에 타는 역사가 있어야만 어부들이 무사히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왜 불이나야하는지?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하는지, 왜 병들어야하는지, 왜 사랑하는 사람이 영원한 곳으로 먼저 가야하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상황을 탓하거나/ 사람을 원망해서 안 됩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나를 사랑하셨고, 오늘도 나를 사랑하고 계실뿐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뜻에 대해, 그 선하심의 인도하심에 대해 결코 의심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 언젠가는 이 모든 일이 있어야 될 것을 알며, 깨달으며, 하나님께 감사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는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말을 많이들 오해하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사랑하신다.’입니까? 자기가 게으르고 악해서 실패한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와 이웃들에게 인색하여 실패한 인생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삶을 살면서 하나님은 나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라고 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시나 공의 안에서만 사랑이십니다.

쉬운 성경(갈6:7-8)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심은 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의 욕망대로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둘 것이며,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을 도우시는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라는 수레가 힘들게 언덕을 올라가고 있는데, 몇 사람들이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고 바퀴를 돌리고 있는데 누가 조금만 더 밀어주면 힘 있게 올라 갈 수 있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데 구경만하고 있거나 무관심하게 지나친다면 그래도 하나님은 그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십니까?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은 내가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그 선하신 일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당신을 도우시지 않으시면 당신은 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합니다.

사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나 이웃을 사랑하는 것 또한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물질이 있고 없고가 아닙니다. 인격의 문제요 사랑의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났는가의 문제입니다. 그 구원의 하나님을 만났다면 죽음으로라도 헌신할 가치가 있는 것을 압니다. 바울은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느니라”(행21:13)에서 예루살렘에 가면 죽는 다고 만류하는 성도들에게 한 말입니다

50년 전에 있었던 실제이야기입니다. 서울역에 지게꾼이 있습니다. 그는 하루 종일 한 번도 짐을 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저녁 늦게 한 사람이 산동네인 아현동을 가자고 하여 하루 한 끼도 못 먹은 이 짐꾼은 힘들게 그 짐을 지고 얼마간의 돈을 받았습니다. 그는 이제 집에 가면서 보리쌀 좀 사고 동네 찐빵도 사가서 아이들하고 먹을 것을 기대하며 가다가 교회 종소리가 나서 보니 그날이 수요일이었습니다. 그분은 가장 가까운 영락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는데 그날은 피난민들을 위한 헌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헌금함이 자기 앞에 오자 많은 갈등 끝에 오늘 벌은 돈을 다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답십리 집에 도착하니 가족들은 빈손으로 들어오는 아버지를 보고 실망하였습니다.

그렇게 막 방에 들어가 앉았는데 밖에서 기척이 나서 나가 보니 아주 비싼 코트에 중절모를 쓴 노신사 한분이 안으로 들어가기를 청하여 들어 와서 여기 따라서 오게 된 동기를 말합니다. ‘오늘 예배 시간에 헌금함이 점점 다가오고 있을 때 땀을 흘리며 심하게 갈등하는 당신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헌금하는 것을 보고 나는 자꾸 눈물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무언지 이끌린 것처럼 당신을 쫓아오게 되어 여기 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그날 헌금하게 된 동기와 그들의 형편을 듣고 그 지게꾼은 바로 수위실에 취직을 시키고, 아들 셋을 공부를 책임지고 시켰으며, 나중에 유학까지 다녀와 회사에 중역이 되었고 교수가 되었습니다. 한 가정이 놀라운 축복을 받은 실화에 바탕을 둔 예화입니다. 아마 그 부자의 눈물은 하나님의 눈물이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그 마음을 감동케 하셔서 그 집까지 그의 발걸음을 옮기게 하였을 겁니다. 이 예화를 들을 때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십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합니다. 우리는 늘 사람을 평가할 때 얼마를 벌었느냐? 얼마를 손해 보았느냐? 얼마만큼 출세했느냐? 따위의 그런 이야기는 지난 날로 족합니다. 내 손에 들려지는 물질, 또는 내가 들은바 사람들로부터 존경이나 평판 같은 것을 좀 잊어버립시다. 나의 직위나, 신분, 인기나 소유 따윈 접어 두고, 그리고 한번 진지하게 물어 봅시다. 내 사랑이 어디까지 왔는가? 오직 사랑의 성장을 묻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가서 어떤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선 자기모습을 종말론적으로 미리 생각해 보아만 합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다. 집값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합니다. 여자 치마도 유행을 따라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변함없는 것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여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공연히 너무 의로운 척도, 강한 척도, 아는 척도 하지 마십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아주 연약한 존재입니다.

한국에서 어느 목사님들하고 식사를 하는데, 종업원이 술은 무엇을 드릴까요? 하니 그분이 화를 내며‘우리 목사요’하여 분위기가 영 민망하게 되어 제가 옆에 있다가 어제 술 끊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연약한 존재임을 알아야합니다. 성령님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는 부분을 위해 기도하십니다. 성령님은 나의 회개치 못한 죄 사함을 위해 쉼 없이 중보하십니다.

성령님은 나의 옛사람의 기질과 성품을 위해 중보하십니다. 성령님은 나의 가정의 문제, 자녀의 문제를 위해 중보하십니다. 성령님은 나의 아픈 상처와, 육체를 위해 중보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사랑하여 부르심을 입은 저와 여러분의 부족하고 연약한 부분을 채우셔서 온전한 승리와 행복을 위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은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성공하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병들어 병약해 보이지만 결국은 건강을 성공을 이루게 되는 삶을 살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