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욱주 박사님의 이번 영화 평론에서는 2019년 연말 최고 기대작 <백두산>을 분석합니다. 이 영화는 이병헌(리준평), 하정우(조인창), 마동석(강봉래), 전혜진(전유경), 수지(최지영) 등 초호화 배우 캐스팅과 <골든슬럼버>의 이해준 감독, 김병서 감독의 공동 작품으로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영화는 백두산 화산 폭발 이후 마지막 폭발을 앞두고 최악의 재난을 막기 위해 지질학 교수(마동석)의 도움으로 남북의 특전사들이 비밀 작전에 투입되는 한편,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일반 사람들의 내용을 그리고 있습니다.
백두산과 한민족: 민족 정기와 정치적 통일의 대명사, 백두산
한국에서 백두산은 특별한 지위를 가지는 산이다. 자연적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높은 산이고, 네 개밖에 존재하지 않는 화산 중 하나인데다,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칼데라 호수인 '천지(天池)'가 존재한다.
게다가 겉으로 휴화산처럼 보이긴 하지만, 지질학상으로는 그리 긴 시간이 아닌 약 1,000년 전(946년)에 대폭발을 일으킨 적 있는 엄연한 활화산이기도 하다.
풍수지리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아온 한국인들에게 이런 특별한 자연환경을 가진 산이 특별한 장소로 인식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정기(精氣)가 서린 땅으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한국인들의 의식 깊숙한 곳에는 백두산이 오염되거나 재해가 발생하면 우리 민족 전체의 운명이 위태롭게 된다는 생각이 자리잡고 있다.
게다가 남북으로 나라가 분리된 후로는 백두산에 '영토 회복' 혹은 '통일'이라는 정치적인 의미까지 덧붙여지면서, 그 민족적 중요성이 더욱 배가되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 '백두산'이란 단지 하나의 산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한민족 전체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산 위의 산, 영산(靈山)을 지칭하는 형이상학적 대명사로 인식되고 있다.
이번 주 개봉되는 영화 <백두산>은 이 산에 얽힌 역사적-민족적 의미 모두를 건드리는 작품이다. 트레일러와 시놉시스로 미루어 본다면, 백두산 폭발 이후 더 큰 재앙을 불러올 추가 폭발을 막기 위해 한국과 북한이 모종의 협동작전을 펼치는 서사를 그려낼 것으로 보인다.
재난 영화의 형식을 빌어 백두산과 한민족 사이에 엮인 생존 공동체적 고리와 남북한의 정치적 화합 가능성을 다룰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우리 한국인들이 백두산이라는 지명에 부여하는 형이상학적 가치를 직접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민족의 터전에 무궁한 가치를 부여하는 이런 사고가 한국인의 삶에서 정신적 지주로 작용해 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오늘날 우리 현실에,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부합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일정부분 의구심이 들게 마련이다.
세계화, 국제화라는 말 자체가 구시대적인 것으로 취급될 만큼 국제화가 당연시된 오늘날의 현실에서, 오직 우리 한국인들만 이해할 수 있는 백두산의 이미지와 가치를 북돋우는 태도가 적절한 것일까?
그리고 민족의 한계를 극복하라는 선교의 명령을 받은 기독교인들에게 이 협소한 땅에 종속돼 있는 사고가 합당한 것일까?
물론 기독교 선교 입장으로 봤을 때 한국인들에게는 민족이라는 울타리가 전도와 교세 확장의 강력한 우군 역할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한국 교회가 일제강점기 중 신사참배 강요로 고통받던 시기에는 총독부의 종교적 강압에 저항하는 구심점 역할을 한 공로 또한 잊을 수 없다.
실상 이러한 점 때문에 한국 기독교계 내부에서는 민족주의적 정서가 용인될 뿐 아니라 권장되기까지도 한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한국 기독교의 성장과 성숙에 좋은 영향만 준 것은 아니다. 그 속에는 '백두산'이라는 지명에 결부된 민족적 관념처럼 신앙과 무관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신앙의 정신에 저해되는 형이상학적 가치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요소들은 엄정한 반성을 통해 극복하고 갱신해야 할 것들인데도 불구하고 단지 '민족을 위한다'는 점 때문에 무반성적으로 용인되고 있기도 하다.
호렙산과 이스라엘: 복음으로 극복된 신앙의 민족적 울타리
특정한 산에 신적-형이상학적 가치를 부여하는 사례가 우리 한국인들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산이라는 지형 자체가 삶의 정황을 지배하는 히말라야 산맥 주변의 네팔이나 부탄, 혹은 남아메리카 안데스 산맥 주변 민족들에게 산이란 그 자체로서 신성시되는 자연물로 여겨져 왔다.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도 산은 하늘에 가장 가까이 맞닿은 장소로서 신들이 거주하는 초월적 공간으로 여겨져 왔는데, 가장 대표적인 예가 그리스의 올림포스산이다.
특정한 산을 거룩한 곳으로 여기는 정서는 구약성서에도 자주 등장한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장 거룩하게 여겨지는 산은 두말할 나위 없이 호렙산(시내산)이다. 광야로 도망친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산,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이 쓰여진 언약궤를 받은 장소, 이 두 가지 사건만 놓고 보더라도 호렙산은 이스라엘 민족 전체의 영산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호렙산, 예루살렘(시온산), 가나안' 등은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이루는 지명들이다. 이곳은 단순한 삶의 터전일 뿐 아니라, 그들의 신앙을 지키고 전해야 할 공간이기도 했다.
구약의 유대인들에게는 신앙-삶-터전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신이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생겨나게까지 했다.
유대인들에게는 민족의 정체성을 이루는 터전을 수복하는 일이 단순히 정치적-실존적 이익을 제공하는 데서만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이스라엘로 복귀한 유대인들에게는 삶이 더 고달팠던 것이 사실이다. 주변 무슬림들과 수 차례의 전쟁과 쉼없는 테러 및 유혈사태를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땅의 수복이 영혼의 구원과 복에 직결되는 문제라 믿었기에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라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땅에 종속된 신앙이 기독교 신앙에도 부합하는 것이냐고 묻는다면, 선뜻 그렇다는 대답을 내놓기 어렵다.
왜냐하면 기독교 신앙의 준거가 되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애초 이스라엘 민족을 벗어나 "모든 민족에게" 나아갈 것을 명령하기 때문이다.
이 명령은 주변지를 점령해서 '유대화'하라는 구약의 명령 및 약속과는 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가진다.
민족의 경계를 극복하는 선교란 해당 민족의 문화 요소들을 말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타자성을 보존하는 가운데 온전한 신앙을 갖도록 설득하고 감화시키는 일로 정의될 수 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전도 여행은 이러한 선교의 모범적인 사례라 볼 수 있다. 고대 교회사 집대성자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 의거해 본다면,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가룟 유다를 제외하고 나머지 사도들 가운데 단 세 명 만이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순교했고, 나머지는 모두 이스라엘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에서 선교 중 순교하거나 자연사(요한)했다.
이처럼 사도들의 신앙은 특정한 산이나 터전에 국한되어 있었던 유대교 신앙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기독교 신앙의 입장에서 민족이라는 울타리, 그리고 그 민족 관념을 붙들어매는 터전과 영역에 종속됨은 선교를 위해 활용해야 할 조건에 불과할 뿐, 그 자체가 복음을 믿는 것 이상의 가치를 갖는 이념이 될 수는 없다.
만약 그리 된다면 그것은 민족과 그들이 근거 삼는 터전을 신격화하는 우상이 되고 말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면 스토아주의 유물론과 유사하게 신적인 것을 물질적인 것으로 환원해 버리는 행태가 될 수도 있다.
영화 <풍수>에 대한 논평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특정한 산, 특정 지형에 신적-형이상학적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행태는 한민족 전통의 종교성 가운데 하나이며,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가장 우상화되기 쉬운 민족적 신념들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영화 <백두산>은 이런 민족적-풍수적 신념을 남북한의 공생과 화합이라는 정치적 이상으로 포장한 작품으로 보인다.
재난 영화가 선사하는 서스펜스와 민족 이념에의 호소를 통해 흥행을 노리는 듯한데, 그것이 세계화, 국제화 조류에 익숙해진 우리 삶에 얼마만큼의 설득력을 가질지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영화는 기독교적 관점으로 볼 때, 작금의 한국인들에게 민족이라는 표상이 갖는 힘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하고 반성해 보는 지표가 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계속>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