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김재성 교수(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의 스위스 개혁교회 5백주년 기념논문 '츠빙글리의 성경관과 스위스 종교개혁의 특징들'을 매주 1차례 연재합니다.
2) 성경의 명료성과 확실성
1522년 9월 6일, 『하나님의 말씀의 명료성과 확실성』이라는 설교를 출판했다. 이 설교문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성과 능력이 핵심 내용으로 강조되어있다. 츠빙글리는 서론에서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요, 사람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는 명백한 선언을 하였다.
이 설교의 첫 부분에서 츠빙글리는 외형적으로 기록된 말씀(written)과 목회자의 선포를 통해서 참되게 듣는 (spoken)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를 위해서 효력을 발휘하는데 결코 실패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어서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큰 효과를 발휘했던 사례들을 열거하였다.
츠빙글리는 단순하게 성경의 명료성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풀이하였다. 루터는 성경의 두 가지 명료성을 언급했는데, 하나는 성경 본문 안에서 명료성이 있으며, 성경을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내적인 명료성을 말하였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이해에 비춰질 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고백하도록 빛을 통과시켜주시어서, 그 말씀의 확실성을 알게 한다"고 강조했다. 명쾌하게 성도들이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권능을 발휘하게 되며, 탁월한 적용에까지 효력을 끼친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권적인 하나님께서는 시의 적절하게 어두움에서 빛으로 이끌어내어서 이해하도록 만들어주신다.
모든 성도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가르침" (theodidacti)을 받아야만 한다고 츠빙글리는 강조했다. 성경은 하나님 자신의 증거를 갖고 있다고 그는 역설했는데, 훗날 칼빈이 제시한 것과 거의 흡사하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도 빛을 비춰주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파악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이처럼 체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되었던 열두 가지의 사례들을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츠빙글리는 열거하였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츠빙글리가 성령의 사역에 대해서 특별히 주목했다는 사실이다. 고린도전서 2장 12-13절과 요한1서 2장 27절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성도들에게 가르쳐지는가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한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츠빙글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최종 권위를 가진다는 확신에 기초하여서 목회사역을 전개하였고, 강해 설교와 저술에 힘을 기울였다. 1519년부터 1531년까지 12년 동안에 연속적으로 거의 모든 성경에 대해서 독일어로 강해설교를 지속했다. 로마 가톨릭에서는 모든 예배에서 오직 라틴어 성경만을 읽도록 했고, 예배절차와 순서도 라틴어로 인도했다. 그러나 츠빙글리는 독일어를 쓰는 시민들에게 모국어로 들을 수 있도록 설교하였고, 가능한 한 모든 삶의 영역에 말씀을 따라 윤리적인 삶을 확산시키도록 준비시켰다. 또한 목회자들을 양성하고자 라틴어, 히브리어, 헬라어 등 성경원어를 가르쳤다.
3) 성경만이 최종 권위를 가진다
스위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을 근간으로 성취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처음에는 츠빙글리가 선도하였고, 외콜람파디우스, 파렐, 불링거, 칼빈, 삐에르 비레, 테오도르 베자가 창조적으로 계승하여, 성경적인 제도와 윤리적인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스위스 동맹이 강화되면서, 취리히에서 츠빙글리가 선포한 복음이 주변에 확산되었다. 베른과 바젤을 거쳐서 마침내 제네바에서 칼빈이 혁신적으로 성취하였다. 스위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도시전체를 체계적으로 조직화하고, 교회제도와 예배를 크게 변화시켰다.
로마 가톨릭에서도 성경의 무오성과 권위를 인정한다고 말하였지만, 정작 그들은 교황과 종교회의에 더 의존하였다. 인간의 권위를 더 높이고 있었기에, 루터와 칼빈은 교황이야말로 거짓 교사라고 정면에서 비판하였다. 인문주의에서 토대를 닦은 후에, 종교개혁자들은 라틴어 번역성경이 아니라 헬라어와 히브리어 원어성경을 파고 들어가서 새로운 신학사상을 제시할 수 있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을 배출한 대학교에서는 대부분 15세기 르네상스 인문주의라는 토양이 구축되어 있었다. 성경에 대한 연구에서 획기적으로 중세와는 다른 흐름을 만들었지만, 이들 두 가지 흐름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강조하던 신학적인 사상들은 철학적이고 인식론적이며 추상적인 개념을 개발한 것이 아니라, 당시 일반 시민들의 문제와 고통을 해결하려는 대안이자 위로였다. 성경의 내용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고민하던 문제들을 다룬 것이고, 일상생활의 고뇌와 아픔을 해결해 주는 해답들이다. 믿음에 의한 칭의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강조, 섭리와 예정, 예배와 설교를 중요시하는 것들은 모두 다 생활의 현장에서 일반 성도들이 해답을 찾지 못하고 혼란을 겪던 것들이었다.
인문주의 언어학자들이 성경의 바른 해석을 위해서 스콜라주의와 논쟁을 시작하였고, 이것을 계승한 종교개혁자들이 기독교 신학을 새롭게 제시했다. 인문주의자들은 "근본으로 돌아가라" (ad fontes)라는 핵심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헬라어 성경본문의 정확한 번역에 집중하였다가, 점차 그 의미와 해석으로 확산하였다. 고전 연구를 중요시하는 기독교 인문주의(Christian humanism)자들로 확산되어지면서,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구호에 시인, 문필가, 화가, 건축가, 어학자, 고고학자, 철학자들이 공감했다. 지성적인 기독교 철학, 윤리와 도덕적 갱신운동에서 영향을 받아서 성장한 후에, 중세 로마 스콜라주의를 거부하고 새로운 기독교 신학사상을 정착시켰다. 15세기에 이탈리아로부터 확산되어나간 기독교 인문주의는 신학에도 깊은 영향을 끼쳤다. 헬라어와 히브리어로 된 원서들을 읽고서 수사학을 발전시키는 탁월한 어학자들이 배출되었다. "근원으로 돌아가라"는 정신은 유럽인들에게 익숙했던 라틴어를 넘어서서, 거의 칠백 년 동안 잊혀져 있었던 고전 언어들, 헬라어와 히브리어를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기회를 제공했다.
에라스무스와 루터 등 인문주의 학자들과 초기 종교개혁자들에게 영향을 준 많은 신학자는 로마 가톨릭 신부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 1406-1457)였다. 루터가 최초로 독일어 성경번역을 시도한 신학자는 아니었지만 결국 그가 신구약 완역본을 출간해냈다. 그보다 한 세기 앞서서 살았던 로렌조 발라는 정확한 성경본문 이해를 촉구하고,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비판하여 (살후 2:8) 루터에게 확신을 주었으나, 그의 공헌은 충분하게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츠빙글리가 선도적으로 앞서 전개한 성경중심의 교회 개혁은 그가 서거한 1531년 이후로 스위스 여러 지역으로 확산되어졌다. 우리는 츠빙글리와 그의 성경적 개혁사상의 확고한 정립이 이뤄지기까지, 엄청난 격동과 갈등의 시대를 통과했음에도 주목해야만 한다. 결코 쉽지 않았다. 츠빙글리를 비롯하여 외콜람파디우스, 불링거, 칼빈 등 많은 종교개혁자들은 격동기에 최전선에 나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교회와 국가를 개혁하는 영향을 남겼다.
인간 사회의 역사와 그 가운데 흐르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유지되고 움직인다. 때로는 기독교 교회나 신학자들도 혼란에 빠져서 갈등과 대립에서 단 한 치의 개선을 이룩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또한 사람의 지혜나 지식으로 모든 것을 다 성취하거나 파악하지 못했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힘을 주셔서 오묘한 뜻을 간직하고 펼치도록 하셨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곁에 계시며 힘을 주셨고, 사자들의 입에서 구해 내셨다고 회고하였는데 (딤후 4:17), 츠빙글리의 경우에도 그와 같은 생애의 업적과 시련을 동시에 맛보았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