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관과 신앙
세계관이란 어떤 지식이나 관점을 가지고 세계를 인식하는 방식이나 틀이다. 다시 말해 세계관이란 인간의 존재 의미, 우주의 실재, 역사와 사회 국가 등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물음에 체계적으로 답을 주는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교육과 전통, 문화 등에 의해 형성된 세계관들을 자신도 모르게 내재화하여 자신의 가치관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자신도 모르게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거대한 세계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세계관을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는지, 그렇지 않은 지에 따라 극명하게 구분된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면 인간의 존재 의미로부터 모든 가치와 의미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간 존재 의미를 인간 스스로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세계관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따라 결정된다. 즉,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에 근거한 신본주의 세계관과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물질세계가 전부라는 물질주의 또는 자연주의 세계관 두 가지뿐이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가치와 의미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는 사람뿐이니 인본주의 세계관이 될 수밖에 없다. 초월적인 존재는 인정하지만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주권적인 하나님을 부인하는 다신론적 세계관도 존재한다. 그러나 다신론적 세계관의 경우 이런 세계관을 형성하는 주인공은 신이 아니라 사람이기 때문에 이 역시 인본주의 세계관이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주인공인 신본주의 세계관과 사람이 주인공인 인본주의 세계관, 이 두 세계관은 공통점을 찾을 수 없는 배타적인 세계관이다. 우리들은 의식하던 그렇지 않던, 누구도 예외 없이 두 가지 세계관 중에 하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2. 신본주의 세계관과 인본주의 세계관
그렇다면 어느 세계관이 진리인가? 다시 말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진리인가? 만약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거짓이라면 인본주의 세계관이 진리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은 성경과 실재 세계에 분명히 나타나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진리가 분명히 나타나있다. 또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단순히 관념이나 글이 아니라, 동정녀를 통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인본주의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사람들의 논리에 불과하지만, 신본주의는 하나님의 초월적 창조, 놀랍도록 아름답고 질서정연한 피조세계, 성경 예언의 성취를 통해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심판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증거들로 가득 차 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본주의 세계관이 진리인 것은 그것이 바로 실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신본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독교 신자들의 생각과 행동들이 비기독교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많은 사회학적 조사결과들이 있다. 이런 현상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은 있는 것 같지만, 그 믿음이 삶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해주는 세계관으로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많은 기독교 신자들이 비기독교인들과 동일한 인본주의 세계관으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초월적인 세계의 하나님이 주인공이 아닌 세상의 내가 주인공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이 된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가 기독교 신앙을 개인 구원과 축복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한명 한명을 구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공동체적인 구원을 이루시기 위함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한 예수님을 통해 교회가 탄생되었고, 바로 그 교회 공동체는 사회와 역사 전체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통로가 된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된 우리는 이 땅이 전부라는 물질주의 세계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주인공이신 신본주의 세계관으로 살아야 할 것이다.
3. 세상을 덮은 인본주의 세계관
신본주의라고 하면 중세 암흑시대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중세가 암흑시대가 된 것은 신본주의 세계관 때문이 아니라, 신본주의 세계관대로 살지 못했던 사람들 때문이다.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은 종교를 권력화하고 세상의 가치를 쫓은 인본주의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 개혁 운동이 일어났고 종교 엘리트가 독점하던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들에게 전해지면서 사람들과 사회가 변화되었다. 말씀대로 살고자 했던 프로테스탄트들로 인해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 제도, 어린이와 여성들을 보호하는 법들은 모두 영국 명예혁명의 결과물들인데 명예혁명을 이룬 주축들이 바로 프로테스탄트들이었다.
그러나 겉모양뿐인 신본주의 시대가 무너지면서 하나님 대신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인본주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되었다. 인본주의 운동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하나님 대신 사람이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설득하고 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은 내가 중심이 되는 철학적 사유의 기초를 제공했고, 이후 과학혁명의 시대를 거쳐 19세기 '과학과 이성'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계몽주의를 낳았다.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된 교회가 세계 선교에 힘을 쓰는 동안, 인본주의 운동은 과학과 이성을 하나님 자리에 올려놓고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선포하기 시작했다.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진화론이 등장하면서 이제 인본주의는 모든 사람들의 세계관을 형성하는 패러다임이 되었다. 왜냐하면 과학은 단순히 질서를 설명해줄 뿐 아니라 기원의 문제까지도 하나님 대신 설명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님 없이 설명하는 것만이 과학적 진리이며, 하나님을 거론하는 것 자체가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인 종교적 주장에 불과하다는 패러다임이 형성된 것이다. 진화론이 등장한 후 창조론과 다양한 논쟁이 있었지만 이런 논쟁의 승리자는 항상 인본주의자들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바로 진화론적 패러다임과 인본주의 세계관에 모두가 갇혀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진화론이 과학적 논리가 허술하고 증거가 없더라도 인본주의 패러다임 안에서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은 진화론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론은 논쟁의 대상조차 될 수 없는 종교적 주장으로 처리해버린다. 60년대 창조과학 운동, 90년대 지적설계운동이 보여주는 것처럼 창조와 대격변, 설계의 과학적 증거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진화론과 인본주의 패러다임에 갇혀 하나님의 창조를 보지 못하거나, 또는 봐도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4. 창조신앙으로 인본주의 패러다임 깨기
아무리 진화론이 잘못되었다는 과학적 증거가 많아도 인본주의 세계관, 진화론적 패러다임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진화론적 패러다임으로 모든 자연 과학을 설명하고 있고, 이제는 심리, 사회, 역사까지도 진화론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진화론을 거부하는 것이 비이성적인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감추어지지 않는다. 과학이 발전할수록 분명해지는 것은 많은 것을 발견할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과학은 진화론을 지지하지 않고 도리어 창조와 설계를 지지하며, 성경에 기록된 과거의 대격변 심판이 사실임을 보여준다. 인본주의가 완전히 승리한 것 같은 이 세상에서, 교회가 유일한 희망인 것은 교회만이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고 믿고 그에 따라 살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거짓된 진화론으로 시작의 주인공을 바꾼 역사를 다시 우리는 뒤집어야 한다. 시작을 바로 세워야 현재와 미래가 바로 설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를 인정하면 그분의 주인 되심과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이라는 약속도 믿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창조신앙이 바로 서야 구원의 하나님,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해진다. 창조신앙을 통해 진화론과 인본주의 패러다임을 깨는 것이 이 시대 교회의 중요한 사명 중에 하나라고 믿는다.
이은일(고려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한국창조과학회 6대 회장, 온누리교회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