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몹시 불었던 그 다음날 새벽, 교회 가는 길에 예전과 같이 쓰레기통들이 여기저기 넘어져 있었다. 가다가 보니 파란색 쓰레기통 하나가 길 중앙에 있는 것이 보였다. 내려서 움직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지나쳐 갈 것인가? 잠깐 고민을 하다가 자동차를 옆으로 세웠다. 그리고 내려서 길 중앙에 있는 그 파란 쓰레기통을 옆 잔디위로 옮겨 놓았다. 내 마음에 “이럴 때 사람들이 나를 좀 보아야 하는데...”라는 웃긴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새벽 어두움 속에 쓰레기통을 옮기는 나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모처럼 잘한 일인데 말이다. 아마 그래서 이렇게 글에다 쓰는 것은 아닌지 다시 한 번 생각을 하면서 웃어 본다.
그런데 실은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내가 먼저 지나간 그 길로 교회 성도들이 새벽 기도를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생각하니 자동차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부지런해서도 아니고 내가 좋은 사람이라서도 아니었다. 당연한 생각이었고 또한 당연한 반응을 보인 것뿐이었다. 그날 새벽기도회를 인도하면서 그 길로 운전해서 왔을 성도들이 무사히 도착한 것을 보면서 마음에 많은 위로와 감사가 생기게 되었다.
우리 모두 세상에 살면서 가는 길들이 있다. 이민자로서 세상 성공의 길이 하나다. 성도들이 열심히 그 길을 살고 있는 것을 심방할 때마다 보고 들으며 감사하게 된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믿음의 길이다. 우리의 믿음 생활이 길이 되고 있다. 그 길은 육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길이지만 분명히 있는 길이고 주위에 많은 영향을 주는 길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을 이렇게 말한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립보서 3장 12-14절). 그는 마라톤 선수가 마지막 지점까지 달려가는 것과 같이 달린다고 했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세상에 없지만 그가 달려간 믿음의 삶이 확실한 길이 되어 지금 나에게까지 분명한 길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이 믿음의 길잡이가 되어 준 셈이다.
이것을 생각하면 지금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것은 달리기 경주와 같고, 이미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간 그 길을 다시 걸어가며 더욱 확실한 길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지금 내가 믿음생활 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있겠지만, 실은 믿음으로 사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들을 치우기도 하고, 길을 고치기도 하며, 더 잘 달려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고난도 인내하며 그 믿음의 길을 아름답게 꾸미는 것이다. 그 때에 우리 주위에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하는 자들과 우리의 다음 세대가 내가 지나간 그 믿음의 길을 걸어가며 더 멀리 그리고 더 힘 있게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눈앞에 있는 바람에 굴러다니는 쓰레기통과 같은 영적인 장애물들을 잘 치워나가는 성도와 교회가 될 때에 되풀이 되는 부딪힘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달려 나갈 수 있을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