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였던 여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 모세는 그들이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강대한 나라들로 들어가서 성벽이 하늘에 닿는 큰 성읍들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신명기 9:1).
캐슬린 케년의 세심한 조사는 여리고가 정말로 강력하게 요새화되었고 그것이 불탔었음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녀는 그 유적들의 연대를 잘못 추정한 결과, 고고학적 발견과 성경의 기록이 불일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그녀는 청동기 시대의 여리고성은 BC1550년 경에 이집트에 의하여 파괴되었다고 결론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증거물들을 더 심층 분석해 본 결과, 파괴는 BC1400년경(후기 청동기 1기 말)에 발생했고, 이것은 성경에서의 정복 연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여리고성이 있던 구릉은 아래쪽에 돌로 된 옹벽(기초성벽)이 있는 거대한 토벽으로 둘러쌓여 있었다. 옹벽은 무려 12~15피트(4~5m)의 높이에 달했다. 이 옹벽 위로 폭 6.6피트, 높이 20~26피트의 진흙벽돌로 된 성벽(외벽)이 있었다. 이 진흙벽돌의 제방(둑) 위로는 유사한 진흙벽돌로 된 성벽(내벽)이 있었는데, 그 내벽의 기저부위는 외벽의 바깥쪽 땅에 비해서 46피트나 높았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7일 동안 매일 성 주위를 돌면서 행진할 때 그들 위에 아스라이 보였던 것이었다.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의 이 굳건한 요새를 통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벽 안쪽의 도시 면적은 약 6 에이커(환산하면 약 200m x 120m) 정도이지만, 안쪽 도시와 요새화 된 성벽들이 차지하는 면적들을 다 합하면, 전체 면적은 50%가 더 넓어져서 약 9 에이커 정도가 된다. 고고학자들이 추정하는 에이커 당 200명을 기준으로 하면, 상부 도시의 인구는 대략 1,200명 정도였을 것이다. 그러나 금세기초 독일 팀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사람들이 외벽과 내벽 사이의 제방에서도 살았다. 또한 성 주변의 마을에 사는 가나안 사람들도 성 안으로 피난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여리고성을 공격했을 때 수천 명이 성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무너진 성벽
여리고 성의 거민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포위에 대해 잘 대비하고 있었다. 고대는 물론이었고 현재에도 여리고 성내에는 충분한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샘이 성벽 안쪽에 있다. 공격 시점은 수확이 막 끝난 시기였으므로(여호수아 3:15), 그들은 충분한 식량도 준비하고 있었다. 이것은 1930년대에 존 가스탕(John Garstang)의 발굴 자료와 또한 캐슬린 케년의 발굴에서, 가나안 인들의 집들에서 곡식이 가득 찬 항아리들이 발견된 사실로도 입증이 된다. 풍부한 식량 공급과 충분한 물이 있었으므로, 여리고 백성들은 아마 몇 년 동안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었다.
성경의 기록에 의하면, 7일째에 성 주위를 일곱 번 돌고 난 후에,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fell down flat)"로 기록되어 있다(여호수아 6:20). 여기서 히브리어의 의미는 성벽이 "성벽 아래로 무너졌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여리고에 그러한 사건이 일어났었다는 증거가 있는가? 여리고 성이 종말을 맞았을 때, 진흙벽돌 성벽이 무너져 내려서 외벽의 아래 부분에 쌓여졌다는 충분한 증거들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경에 따르면, 라합의 집은 요새화된 성벽의 일부분으로 되어 있었다(여호수아 2:15). 만일 성벽이 무너졌다면, 라합의 집은 어떻게 남아 있을 수 있었을까? 알다시피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그녀의 가족들을 그녀의 집안으로 대피시키면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시를 점령했을 때, 약속대로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은 구조되었다(여호수아 2:12~21, 6:17, 22~23). 여리고 성의 둔덕 북쪽 끝에서 고고학자들은 라합에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놀라운 것들을 발견했다.
성벽이 무너지고 난 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16피트 높이의 하부 옹벽을 넘어갈 수 있었을까? 발굴결과에 의하면 무너져 내린 외벽의 진흙벽돌들이 옹벽 옆에 쌓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경사로를 형성했던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이 도시에 들어갔던 방법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성벽이 무너져 내린지라 백성이 각기 앞으로 나아가 성에 들어가서 그 성을 취하고"(여호수아 6:20). 이스라엘 백성은 올라가야만 했고, 그것이 바로 고고학이 밝혀낸 것이다. 그들은 도시로 들어가기 위해서 구릉의 바닥 부분인 지상에서 방어벽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찌니라"(여호수아 6:5절)).
◈화재에 의한 파괴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시와 그 안의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 "무리가 불로 성읍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르고..."(여호수아 6:24). 고고학적 발견은 이 기록이 사실임을 확인했다.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파괴된 성의 동편 일부분이 발굴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어디에서든 발굴이 일정 깊이에 도달하면 3피트 정도 두께의 재와 불에 탄 잔해들이 발견되었다. 케년은 이러한 파괴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파괴는 철저했다. 벽과 바닥들은 화재로 인해 검거나 붉게 타 있었고, 방마다 쏟아진 벽돌, 목재들, 가재 집기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의 방에 떨어져 있는 파손된 잔해들은 심하게 불탔지만 동쪽 방들의 벽들은 화재의 영향을 받기 전에 붕괴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가스탕과 케년은 둘 다 불에 의해서 파괴된 곡물로 가득한 많은 저장 항아리(storage jars)들을 발견했다. 이것은 고고학적 기록에서 매우 특별한 발견이다. 곡물은 단지 식품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다른 상품으로 교환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도 있었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곡물과 같은 귀중품은 정복자에 의해 약탈되는 법이다. 여리고에서는 왜 곡물이 그대로 남겨져 있는가? 그 해답은 성경에 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읍과 그 안의 모든 것들을 여호와께 바치라고 명령했다 (여호수아 6:17).
여리고에 남아 있어서 현대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곡물은 3500년 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순종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단지 아간만이 순종하지 않았고, 그 결과로 여호수아 7장에 기록된 대로 아이성에서의 참패로 이어졌던 것이다.
그런 많은 곡물들을 손대지 않고 남겨둔 것은 성경기록의 또 다른 면의 진실을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풍부한 식량과 물의 공급이 있고 강력하게 요새화된 성을 정복하는 데에는 통상 몇 달, 심지어는 몇 해가 걸릴 것이다. 성경은 여리고가 단지 7일 후에 함락되었다고 말한다. 여리고의 폐허에서 발견된 곡물 항아리들이 가득 차 있음은 성 안의 백성들이 곡물을 거의 소비하지 않았고, 포위기간이 짧았던 것을 나타낸다.
◈오늘날의 여리고
현재의 여리고는 비잔틴 시대의 터 위에 재건되었으며, 옛 여리고는 텔 에스 술탄으로 20세기 초에 발굴되었다고 한다.
여리고 시내에는 삭개오가 올라간 뽕나무가 있다. 나무의 수령을 알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모두가 알다시피 삭개오를 만나준 예수님의 행적은 곧 라합의 구원을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은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할 수 있고 예수님의 오신 목적이 삭개오(눅 19장)와의 만남을 통하여 극적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는 것이다. 또한 소경 거지 바디매오를 만나 주신 것도 빛으로 오신 예수님에 대해 나타내 주신 것이라 볼 수 있겠다(막 10:46).
삭개오의 뽕나무 옆에 흐르는 시냇물은(지금은 시멘트로 뚜껑을 만들어 놓았음) 엘리사 시대에 물이 써서 마실 수 없다던 여리고 백성들을 위해 엘리사가 단물로 만들어 주었던 그 물이다. 여리고에 가면 이와 같이 여리고성의 흔적, 삭개오의 뽕나무, 엘리사의 샘물을 만날 수 있고 그 외에 서쪽에는 헤롯 겨울별장의 유적이 있고 동쪽으로는 8세기 아랍시대에 만들어진 히샴의 궁전 유적이 있다.
여리고 건너편 느보산에서 여리고를 내려다보면 그 푸른 모습에 한달음에 달려 내려오고 싶은 곳이다. 유대광야와 사해, 그리고 요단강 주변 중 가장 발달한 곳이고 과실수와 물이 풍부했던 오아시스의 도시가 여리고다. 이 아름다운 가나안의 첫 성 여리고는 오직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정복되었던 것이다.
이 도시는 1996년 이후로 팔레스타인 자치지구가 되었다. 약 25,000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에는 오직 팔레스타인 아랍 사람들만이 살아간다. 이들은 아직도 모슬렘 종교를 가지고 있다.
여리고 건너편 요단강 동편 베다니에서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던 곳이 있고. 엘리야는 이곳에서 불 수레를 타고 회오리바람과 함께 승천하였다. 그리고 엘리사는 갑절의 영감을 받고 여리고에 선지학교를 세워 선지 생도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여리고의 교훈
고고학과 성경 사이의 외견상 불일치 때문에, 여리고는 한때 성경속의 이야기로만 여겨졌었다. 그러나 정확한 고고학적 해석을 바탕으로 정반대임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고고학적 증거들은 모든 세부사항에서 성경의 기록과 역사적으로 정확하게 일치한다. 고고학적 발견은 여리고성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실제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이었음을 입증하였던 것이다.
여리고의 성벽이 어떻게 무너졌는가에 대해서는 그 해석이 분분하다. 가스탕과 케년은 둘 다 도시가 종말을 맞았을 때에 지진 활동이 있었다는 증거를 발견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날 하나님의 목적 달성을 위해 지진을 사용하셨더라도, 지진이 필요한 정확한 시점에 일어났고, 라합의 집을 보호했던 것은 여전히 기적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사용하셨든지, 그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의 믿음을 통해 성벽을 무너뜨리신 것이다. 백성들이 7일 동안 성벽 주위를 행진하고 난 후에, 여리고의 벽은 믿음으로 인해 무너졌던 것이다 (히브리서 11:30).
여리고는 세속적 학문으로는 성경과 일부 일치하지 않더라도 성경의 기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놀라운 영적 교훈이 되고 있다.
때로는 우리도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요새와 같은 성벽에 직면하곤 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의 계명을 따른다면, 하나님께서는 크고 비밀한 일을 행하셔서(예레미야 33:3) 우리를 승리케 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