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나치 과학자
"이렇게 우물쭈물하다가는 소련군에 끌려가 시베리아로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어떤 구실을 내세워서라도 남쪽으로 내려가 미군에 투항하는 것이 우리들이 살아남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1945년 1월도 저물어가던 어느 날, 제2차 세계대전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다. 패망을 앞둔 독일의 한 청년 과학자가 깊은 수심에 잠겨 있었다. 베를린 공과대학을 졸업한 이 과학자는 지금까지 줄곧 독재자 히틀러 밑에서 마음에 내키지 않는 연구를 계속하다, 이제는 또 한 명의 독재자인 소련의 스탈린에게 이용당할 기로에 서게 된 것이었다. 당시 소련군은 독일의 핵심 연구소인 '페네문데'의 점령을 위해 기갑 부대를 앞세운 채 내려오고 있었으며, 나치 고위층은 이 연구소를 사수하기 위해 각기 다른 10여개의 명령을 내릴 정도로 이성을 잃어가고 있었다. 비밀경찰, 육·해·공 참모총장, 히틀러 친위부대의 이동 명령이 날아오고 있었고, 이중에는 현 위치를 고수하라는 명령서도 있었다.
과학자들도 전쟁의 희생양이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과학자가 전쟁의 도구가 되는 것을 즐기겠는가. '페네문데연구소'의 기술 담당 소장으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이 로켓 전문가도 그런 과학자였다. 자신의 기술을 전쟁에 사용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이제 이 젊은 과학자는 평화적인 우주 개발에 자신의 연구와 여생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무신론적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보다는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유지할 수 있는 연합군을 택하여 항복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나치가 지시한 여러 명령서 가운데 남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서를 따라 남쪽으로 피신하게 된다. 소련을 피하려는 의도였다. 이 젊은 과학자는 우여곡절 끝에 동료 과학자 118명과 가족 등 300여명과 함께 미국군에 투항하였다.
그리고 곧 이 젊은 로켓 과학자는 미국의 뉴멕시코주에 있는 화이트 샌즈의 미사일 실험 기지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가 바로 20세기 가장 유명한 과학자 중의 한사람이었던 베르너 폰 브라운(Wernher von Braun, 1912~1977) 박사였다.
1969년 7월 21일, 온 인류는 숨을 죽이고 TV 앞에 모여 있었다. 미국의 유인 달 착륙 우주선 아폴로 11호가 '고요의 바다'라고 명명된 달 표면에 착륙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1957년 소련이 먼저 인공위성 소프트니크 호를 지구 궤도에 올려놓는 데 성공한 이후, 미국과 소련은 최초로 달에 인류를 보내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마지막 승자는 미국이었다. 소련의 인공위성 성공에 자극받아 뒤늦게 우주 계획에 심혈을 기울인 미국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인류 역사상 과학 기술이 이룩한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인 달 착륙이 성공하기까지에는 수많은 과학자들의 노고가 있었다. 하지만 그 열매의 가장 큰 부분은 아폴로 11호의 새턴 로켓과 그밖의 많은 로켓을 개발한, 미 항공우주국(NASA)의 국장을 지낸 폰 브라운 박사의 몫이었다.
폰 브라운 박사의 어린 시절
브라운은 독일의 비르즈이츠에서 태어났다. 브라운 집안은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귀족 집안으로서 아버지는 남작이었다. 브라운의 이름 앞에 붙은 '폰'은 바로 귀족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어린 시절 한때 소방차를 보고는 소방원이 되겠다고 소방차만 따라다녀 부모의 골치를 썩였던 이 괴짜 신동은, 수학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선생님에게 별자리에 관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은 이후, 이 괴짜 천재 꼬마는 일찌감치 천문학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게 된다.
1927년 6월, 독일에서 로켓광(狂)들이 모여 세계 최초로 본격적인 우주여행협회가 설립된 적이 있었다. 회장은 겨우 30세가 넘은 루마니아 태생의 헤르만 오벨트라는 사람이었으며, 회원 대부분은 20세 내외의 젊은이들 뿐이었다. 이들의 연구 목표는 "어떻게 달이나 화성, 금성 등에 사람이 가볼 수 있을까?"하는 것으로, 당시로서는 조금은 황당무계(?)해 보이는 시도였다. 하지만 이들의 열성만큼은 뜨거웠고. 매우 진지한 토론이 이어졌으며, 연구도 보기보다는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브라운도 이 협회의 회원이었다. 브라운은 1930년, 겨우 17세의 나이로 이 협회에 가입한 열렬한 우주여행 지망자였다. 이 소년 과학도 브라운은 협회에 가입한 그 해 8월 5일, 오벨트를 도와서 '원추형 엔진로켓'의 실험에 성공한다. 우주여행에 대한 그의 열망이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당연히 연구개발비는 없었다. 구경 온 사람들에게 로켓 실험에 대한 견학 요금을 받아서 개발 연구를 할 만큼 궁색한 실험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브라운은 그의 생애에 큰 영향을 준 도른베르거라는 독일의 장교를 만나게 된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때에도 포병 장교로 참전한 바 있었던, 독일의 로켓 개발 임무를 맡게 된 사람이었다. 당시 둘 사이의 나이차는 17살이었고, 브라운은 겨우 20살의 풋내기 베를린 공대생이었다. 하지만 그의 천재성과 로켓에 관한 집념을 알아본 도른베르거는, 있는 힘을 다해 브라운을 평생 동안 도와주게 된다. 1933년, 마침내 브라운은 A-1이라는 본격적인 액체 연료 로켓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1936년 8월, 발트해의 한 섬에 있는 페네문데라는 곳에 위치한, 5,000명에 달하는 과학자가 동원된 대규모 로켓 연구소와 공장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 공장의 위치는 바로 브라운이 선정한 곳이었다.
그러나 로켓 개발이 브라운의 의도대로만 진행되지는 않았다. 1939년 9월, 독일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폴란드를 침략한다. 그리고 곧바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오르게 된다. 브라운의 로켓 연구는 그만 히틀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1942년, 길이 14m에 달하는 A-4라는, 그 당시로서는 초대형의 액체 로켓이 개발되었다. 후에 V-2로 개명된 이 로켓은, 영국 사람들이 '악마의 사자'라고 불렀을 만큼 놀랄 만한 위력을 지녔던 것으로, 음속의 4배 속도로 날아 엄청난 피해를 주었다.
폰 브라운의 신앙
로켓이 전쟁의 도구가 되었다는 것은 본인의 의사에 의한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에 온 이후에도 브라운을 끊임없이 죄책감에 빠뜨리고 괴롭히는 일이었다. 특별한 열성도 없이 그저 하나님을 막연히 믿고 있던 그의 신앙도 그런 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망명지인 미국의 미사일 기지에 근무하던 어느 날, 한 낡은 버스가 지나가다 어떤 집 앞에 멈추는 것을 우연히 관심 있게 보게 되었다. 그 차에는 '엘파소 나사렛 교회'라고 쓰여 있었다. 통나무로 지은 막사에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사람들을 데리고 가려고, 그 교회 목사님께서 운전하는 낡은 버스였다. 매 주일마다 이 낡은 버스가 미사일 기지를 지나가는 것을 지켜보며, 브라운은 독일에서 어린 시절 그가 열심히 다녔던 루터란 교회의 추억들을 떠올리게 된다.
패전국의 사람으로 외로운 타향에서의 생활은 모든 것이 낯설기만 했다. 그리고 그의 신앙도 과학 분야에서 일하는 동안 세상 속으로 멀리 떠내려가 버리고 말았다. 브라운은 참으로 나약한 인간의 모습과 하나님 앞에서는 보잘 것 없는 과학의 참 모습을 이 작은 일들을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그 때에야 비로소 그는 막연히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던 자신의 믿음이 실은 빈껍데기 뿐이었음을 깨달았다. 브라운의 회심의 순간은 이렇게 찾아왔다. 전쟁을 통해 경험한, 인간의 추악하고 더러운 타락한 본성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은 과학 안에는 전혀 없었다. 타락한 세상을 치유하실 분은 오직 예수 뿐이었다. 인류를 위해 죽으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은 이제 그의 삶을 바꾸었다. 브라운은 성경 공부를 꾸준히 시작하며 헐버트의 「성경 이야기」를 열심히 읽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브라운 박사는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마치 하나의 계시처럼 나에게 다가왔습니다. 그 때까지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영접하지 않고 있었으며 이름 뿐인 그리스도인이었던 것이지요. 이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당시 미국은 로켓 개발에 아무런 흥미를 나타내지 않고 있었다. 폰 브라운은 로켓의 효용성을 강조하였지만, 원자탄과 수소탄의 개발에 몰두하던 미국은 이 패전국 망명 과학자의 말을 무시할 뿐이었다. 그런데 1949년, 페네문데를 점령해서 다수의 과학 기술자들을 데려간 소련이 V-2보다 훨씬 크고 사정거리가 645km나 되는 미사일을 개발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당황한 미국 당국도 서두르기 시작했다. 브라운과 도른베르거를 중심으로 미사일 개발에 몰두하여, 마침내 1957년 우수한 미사일을 완성하게 되었다. 이 미사일의 이름은 브라운의 우주 탐험에 대한 의지를 담은 '쥬피터'(목성)라고 명명되었다.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브라운은 조지 마샬 우주 비행 센터의 감독으로 임명되어 앨라배마주 헌츠빌로 가족들과 함께 이사를 하게 된다. 1955년에는 귀화한 미국 시민이 되었고, 쥬피터의 성공으로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으로부터 민간인 최고 훈장도 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믿음도 착실히 성장하여, 이곳에서 그는 그리스도 감독 교회의 주요한 일원이 되었다. 폰 브라운 박사팀이 설계한 강력한 로켓이 미 우주 비행 계획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한 계기가 마련된 것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리고 이 때부터 그의 개인적인 신앙도 과학적 명성과 더불어 자라나기 시작하였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의 자존심 경쟁
그런데 1957년 10월 4일, 미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주는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바로 소련이 로켓을 사용하여, 인류 사상 처음으로 인공위성 소푸트니크 1호 발사를 성공함으로써 온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이었다. 이제 미국이 그들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은 오직 폰 브라운 박사 뿐이었다. 1958년 1월 31일, 브라운은 곧바로 미국 최초의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1호'를 발사하여 성공시켰다. 우주 비행 계획에서의 명성은 그를 전국적인 유명 인사로 만들었다. 그는 수많은 연설과 저술 활동에 초대받게 되었다. 그는 시간적 여건이 허락하는 한 초청에 응하면서, 언제나 신앙에 관한 이야기에 우선을 두었다. 한번은 덴버시에서 있었던 콜로라도주 정보 요인 초청 조찬 기도회에서 '하나님에 대한 과학자의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 생애 동안에 이루어진, 놀랄 만한 과학의 진보에 대하여 존경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관찰하고 실험하고 또한 그 유효성을 측정하기 위해 가능성을 시험해 보는 모든 과학적인 과정에는 분명 놀랄 만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직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민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들이 태양을 보기 위해 구태여 촛불을 켜야만 할까요? 하물며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있는 우리들이 그분에 대한 과학적 증명을 필요로 할까요?"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브라운은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또 개인의 믿음의 중요성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온 인류에게 뿐 아니라 우리 개개인에게 관심을 가지신 인격적인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데 대하여 어려움을 느낍니다. 많은 현대 신학자들은 개인이나 현실적인 것보다는 '우리'나 '전 인류'를 더 강조합니다. 사람은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에 우리의 노력과 영감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비록 인공위성 발사는 소련이 앞서나가고 그 이후로도 소련은 우주 탐험에 있어서 한동안 미국을 앞질러나가기 시작했지만, 미국이 브라운 박사를 전폭적으로 신뢰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결코 우주 탐험의 경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브라운의 뒤에는 미국 시민들의 그를 향한 존경심과 기도가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소련은 미국을 앞서가고 있었다. 1959년 루나 1호를 발사하고, 뒤이어 루나 2호를 달에 도달시켰다. 루나 3호는 달 뒤의 사진을 찍어 지구로 보내와, 세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1961년에는 인류 최초의 우주 비행사 가가린이 탄 보스톡 1호를 쏘아 올려, 또 한 번 미국의 체면을 말이 아니게 만들었다. 드디어 미국의 존 에프 케네디 대통령은 1961년 5월 25일, 미국 의회에서 다음과 같은 약속을 하기에 이른다.
"미국은 60년대 말까지 기어코 인간을 달에 착륙시켜 무사히 귀환시킬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미국의 자존심의 선언이요, 냉전 시대 경쟁 상대였던 소련에 대한 또 다른 의미의 선전포고였다. 이 선언은 소련의 가가린이 처음으로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돈 43일 후에 발표된 것이었을 만큼, 미국의 사정은 아주 급박한 것이었다. 브라운은 이제 미국의 마지막 보루요 희망이었다.
폰 브라운이 개발한 새턴 로켓
케네디의 본격적인 미소(美蘇) 우주경쟁선언은, 폰 브라운에게 있어 그가 그토록 원하던 우주 탐험에 관한 일들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벅찬 순간이었다. 브라운은 '새턴 로켓'의 구상을 실천에 옮겨 1호, 1-B호 등 40m 길이의 로켓을 제작하였다. 1967년 11월 15일, 드디어 새턴 로켓 5호는 멋지게 하늘을 날았다. 인류 역사상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 외의 다른 곳에 사람의 발길이 닿는 이 황홀한 경험의 경주에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들에게 응답하고 계심이 분명하였으며, 미국이 소련을 앞지를 수 있는 실마리는 이렇게 마련되고 있었다. 한번은 달 착륙선 아폴로 11호가 비행을 하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준 아폴로 9호가 이륙하였을 당시, 마이애미 헤럴드지의 아돈 태프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브라운은 자신의 신앙적인 견해를 이렇게 밝히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우주적인 것이며, 어떠한 공간적 제한도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은 부도덕한 영혼은, 그 대가를 치르거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브라운의 외계에 대한 지극한 관심
사람들은 어찌된 일인지 천문학자가 기독교 신앙을 지녔다면 이상하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1920년대 브라운이 어린 시절 가입했던 우주여행협회의 회장이었던 헤르만 오벨트가 UFO 신봉론자라는 이유로, 폰 브라운도 그와 같은 외계인 숭배 사상이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근거 없는 주장을 가지고 이 과학자의 신앙도 이상스럽게 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가 근본주의적인 창조관에 완전 일치하는 생각을 가졌었다고는 필자도 고집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그의 신앙관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엔터프라이즈 미션>이라는 단체가 80년대부터 끊임없이 외계인 확인설을 퍼트리거나, 달 인공 구조물 존재설을 틀림없다고 96년 3월 발표하여 또 한 번 국내에서도 소동을 일으켰지만, 만일 그와 같은 일들이 사실이라면 가장 신속하게 그 같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브라운 박사였다. 양심적인 신앙인이었던 그가 그런 정보를 입수하고도 은밀히 숨기고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 거라고 보는가?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대통령이 되면 미국의 UFO 관련 비밀 문서를 공개하겠다는 공약을 하고 실천에 옮겼던(물론 UFO 마니아들은 그의 공개 수준이 미흡하다고 지금까지 주장하고 있다), 70년대 미 대통령이었던 카터의 변함없는 신앙생활을 참고하기 바란다.
그래도 그런 것을 믿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아폴로 15호 우주선 승무원이었던 제임스 어윈, 아폴로 16호를 타고 달 표면을 밟은 찰스 듀크를 미롯해 우주 탐험가였던 잭 루스마, 빌 포그 등, 12명에 달하는 달 탐색 우주선의 우주비행사들이 열심으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지난 80년대부터 모임을 만들어 하나님의 창조 섭리를 열심히 전하고 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물론 지금은 더 많은 우주비행사들이 복음을 열심히 전하고 있다. 그들이 이상한 무엇을 보았다면 그런 활동을 태평스럽게 하고 있을 수 있을까?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그들이 본 이상한 것을 전하기 위해서 발을 벗고 나설 사람들이다. 그래도 굳이 하나님보다 그런 것을 믿고 싶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브라운은 과학에 관해서도 또한 자신의 견해를 말한 적이 있다.
"과학은 어떠한 경우에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자연도 소멸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그 모습만 변화될 뿐이지요. 만일 하나님께서 그 기본적인 원리를 그의 우주의 가장 애매하고 보잘것없는 한 부분에 적용시키려 하신다면, 바로 하나님의 창조물 중의 걸작인 인간의 영혼에도 그것을 적용시키실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케네디가 암살된 후 이어 대통령이 된 존슨은 브라운 박사 부부를 초청하여 카우보이 모자를 주면서, 1960년대가 끝나기 전에 이 모자를 꼭 달에 전해 달라고 간곡히 미국민들의 소원을 전하기도 했다.
아폴로 11호 유인 우주선의 달 착륙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에 매달린 브라운은 드디어 그 약속을 지키게 된다. 1969년 7월 16일, 암스트롱을 선장으로 하고 올드린과 콜린스를 태운 아폴로 11호가 달을 향해 발사되었다. 그리고 7월 20일, 아폴로 11호에서 달 착륙선 이글호를 발사해 달 표면 '고요의 바다'에 착륙시켰다. 7월 21일, 인류는 마침내 달 표면에 역사적 발을 딛게 되었다. 우주인들은 7월 24일, 달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지구로 돌아왔다. 이것은 브라운 개인의 영광 뿐 아니라 미국의 영광이요 인류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나의 이 한 발자국은 비록 크기는 작은 것이지만 우리 인류를 위해서는 위대한 도약이다."
암스트롱은 자신의 감격을 이렇게 전해왔다. 그리고 이 광경을 마샬우주비행센터 소장실에서 TV로 지켜보던 폰 브라운 박사는 두 눈에서 눈물을 주루룩 흘렸다고 전해진다. 신앙인의 기도에 응답해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그의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 분명하다. 미 항공우주국의 부국장이 된 후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2천여 년 전 인류에게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세계는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전파에 의하여 완전히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꼭 같은 일이 우리들에게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하여 바뀌어왔듯, 오늘날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는 있다. 패전국의 한 로켓 전문가였던 폰 브라운 박사, 그도 그러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인간이 끊임없이 소원하여 왔던, 우주 비행과 달 착륙에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우주를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였던 이 금발의 과학자에게 그 명예를 허락하신 것이다.
1977년 6월 16일, 예순여섯 살의 나이로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살던 헌츠빌에는 나사의 마샬우주비행센터가 마련되어 있어, 인류의 우주 비행에 대한 끝없는 소원을 이루어가고 있다. 물론 이곳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우주박물관인 우주로켓센터가 있고, 브라운을 기념하는 폰 브라운실이 있어, 그의 우주여행에 대한 깊은 애정과 공적을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선진국 문턱에 바짝 들어서며 IT·조선업 등의 강국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가 훌쩍 지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까지도 유인 우주선은 커녕 무인 우주선 하나 쏘아 올리는 데도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이다.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겨우 우주선 발사에 구 소련(러시아)의 도움을 받아왔으나, 제대로 된 우주 탐험은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1960년대 후반 이미 달에 유인우주선을 보낸, 미국 나사와 폰 브라운의 탁월한 능력과 대비해 볼 때 조금은 부럽기조차 하다. 혹시 필자만의 생각일까?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