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주님은 이제 성령에게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 주님이 시험받으러 가신 것은 자신이 스스로 가신 것이 아니라 성령에게 이끌리어 가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시험받으신 것에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다.

시험(temptation)이라는 것은 그것을 통과해야만 증명되고 확증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다. 그가 믿음이 있고 또 순종하는 사람이지만 정말 순종하는지 정말 믿음을 갖고 하나님만을 따르는 사람인지 하나님은 알기 원하신다. 여기에 시험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드리도록 명하셨다. 결국 그가 아들을 제물로 드리려고 손을 들어 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금지하셨으며 그가 진실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임을 알았다고 하셨다. 그런 다음 하나님은 그를 축복하셨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에게 어떤 시험이 닥쳤을 때 그것을 우연히 발생한 일로 여기지 말고 그것이 어떤 목적이 있는 시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을 참으로 통과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하나의 연단을 거쳐 하나님 앞에서 증명이 되는 것이다.

우리 주님도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으시고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으시고 그런 다음 시험장으로 가셨다. 시험장이 어디였는가? 광야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십 년 간 광야에서 방황하였다. 한 면으로 그들은 사십 년 간 방황한 것이고, 또 한 면으로 그들은 사십 년 간 시험을 당한 것이다. 사십 년 혹은 주 예수님이 시험 당하신 사십 일 등 사십이라는 숫자는 시험의 숫자이다.

그러나 한 면으로 시험은 마귀가 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아들이 시험당하는 것을 허락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의 유혹(temptation)은 에덴동산에서의 유혹과 비슷하다. 동산에서 사람이 창조된 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사람이 나타났을 때 마귀는 유혹을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사천 년 후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을 입고 오셨을 때 마귀는 다시 도전을 한 것이다. 마귀는 헬라어 원어로 디아볼로스(diabolos)로서 훼방자라는 뜻이다.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서 이 꾀는 자에게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시험을 이기셨다.

2절,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모세도 시내 산에서 40일간 금식한 적이 있고(출 24:18), 엘리야도 그러했다(왕상 19:8). 그러나 주님의 금식 과정에서 특별한 것은 금식 과정에서 주리신 것이 아니라 금식하신 후에 주리셨다는 점이다. 오늘날 믿음의 체험을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스스로 영적인 체험을 위하여 금식을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금식 중에 배고픔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금식이라는 것은 정말로 어떤 부담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가 없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사역과 기도의 위임과 부담으로 인해 정말 밥을 먹을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금식을 하는 것이다. 주님은 금식하시는 동안 하나님께 간구하고 기도할 마음만 간절하기 때문에 배고픈 것을 모르셨던 것이다. 어쩌면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주님은 앞으로의 3년 반의 공생애와 중대한 구속의 사역을 앞에 두고 모든 일을 기도하면서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셨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날 수가 더해져서 사십 일을 마쳤을 때에 비로소 주님은 주리셨다고 했다.

사단이 언제 오는가 하면 바로 이때이다. 필요가 있을 때이다. 사람이 가장 약할 때에 사단은 찾아 온다. 주님을 위해서 무언가 투쟁하고 일할 때에는 사단이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일들을 끝내고 주님을 위한 역사를 수행하고 이제 쉴 때에 자녀들의 필요가 보이고 남편의 필요가 보이고 혹은 아내의 필요가 보이고 가족들의 건강이 걱정되고 자녀들의 장래가 걱정되고 한다. 이렇게 약간 풀어진 그때에 사단이 가까이 와서 살며시 ‘네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것이냐?’ 한다. 그래서 사역자들이 시험에 빠지는 수가 많다.

3절,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시험하는 자(tempter)는 마귀이다. 창세기 3장의 그 뱀인 것이다. 그 자가 이제 여기서 성부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라고 선포했을 때 그 소리를 듣고 당황하여 시험할 뜻을 가진 것이다. 마귀는 그때 먹을 것을 만드는 기적을 행하라고 주님께 제의를 했다. 그 시점에서 주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하라고 한 것이다. 마귀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과 관계를 끊어놓기만 하면 성공이다. 그의 모든 시험의 초점이 거기에 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스스로 뭔가를 하라고 한 것이다. 하실 수 있는 것으로 말한다면 주님은 돌을 떡이 되게 하실 뿐 아니라 돌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떡을 만들 수 있을 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만드실 수 있다. 그분은 능히 그런 능력을 행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주님은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사탄의 말을 듣고 움직일 필요가 없으셨다.

아담은 동산에서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을 했다. 그것이 곧 불순종이요, 거역인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시지 않는 입장을 취하셨다. 아직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에게 무언가 하라고 하신 게 없다. 그러니 그분은 움직이지 않으신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고 한 것은 사탄이다. 이에 대하여 주님의 대답은 어떤가?

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는 그 분의 입장을 분명하게 지키셨다. 사탄의 제의에 전혀 요동하지 않으셨다. 사탄의 영역은 물질적인 세계였지만 그분의 움직이는 세계는 믿음의 세계이다. 그 분은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실 때도 성령의 인도하심인 줄 아셨고, 금식이 끝난 것도 하나님과의 교통 가운데서였으며 그분은 배고프신 중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계셨다. 그 분은 모든 일을 아버지께서 해 주신다는 믿음이 있으시다. 그러니 주님은 요동할 필요가 없다. 아버지의 인도와 공급하심만을 의지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 예수님은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신다.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계셨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 그것만 갖고 있으면 된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할 필요가 없다. 사단이 하는 일은 바로 위치를 떠나게 하는 것이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게 만드는 것이다. 주님은 이미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인정받으셨으며 어떤 사람들에게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증명하기 위해 또 다시 무언가를 하실 필요가 없으셨다.

주 예수님은 이 음식의 필요를 이기셨다. 사십 일간 주리시고 배고프셨음에도 음식의 필요를 이기신 것이다. 아담은 동산에서 사단에게 실패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는 성공하셨다. 하와는 동산에서 먹는 것에서 실패했고, 마지막 아담은 먹는 문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이겼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언가 기적적인 역사를 해 내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원래 우리에게 주신 위치에 서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서 있으라고 하시는 위치에 서 있으면 된다. 우리 주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증거를 얻으셨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특별히 돌을 떡으로 만드실 필요가 없었다.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로 증명되는 것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이다(롬 1:1-3). 사탄은 주 예수님께 그런 긴 과정을 거치지 말고 지금 아들인 것을 증명해 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분은 자신의 필요를 위해서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 분이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게 하기 위해 떡 만드는 일을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바로 정당한 위치인 것이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그에게 명하지 않은 어떤 일을 스스로 행하였기 때문이다(민 20:7-12). 사탄은 그분이 아버지를 떠나서 스스로의 능력과 의지로 돌들을 떡덩이가 되도록 행동했다면 끝장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 자는 예나 현재나 교활하고 간교한 자이다. ‘기록되었으되’란 전쟁할 때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믿음으로 선포하는 것으로서 승리의 비결이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면 사탄은 도망간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법원의 판결과 같다. 그 말씀을 믿고 의지할 때 모든 사탄적인 의문들과 시험들은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어떤 때에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 위에 서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각종 대적들을 이길 수 있다.

여기서 주님이 사람이라고 하신 것은 의미가 있다. 마귀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하였지만 주님은 ‘사람이’라고 하셨다. 주님은 이 땅에 사람으로 오셨다. 그 분은 사람으로서 마귀를 대적하셨다. 이는 의미가 깊다. 아담은 동산에서 하나님과 같이 되고자 하다가 실패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 분명하지만 그분이 이 땅에 오신 것은 ‘하나님과 동등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어 오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분은 자신을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니 아담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려다가 실패하였지만 주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사람의 위치를 굳게 지키심으로 마귀를 이기셨다. 그 분이 때로 하나님의 권위를 사용하시고 나타내신 적은 있지만 그것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사람들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그 분은 구원의 역사를 위하여서는 언제나 사람의 위치에 서 계셨다.

또한 마귀가 이렇게 한 것은 주님으로 하여금 사람의 위치를 떠나도록 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만일 그 분이 사람의 위치를 떠나신다면 그분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신분을 잃게 된다. 구속을 위해서는 우리를 위해 죄 없으신 한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주님은 이와 같이 사람으로 오셨고 그 분의 위치를 견고하게 지키신 것이다. 사탄은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들을 떡이 되게 함으로서 하늘의 위치로 돌아가게 하여 그 분의 성육신을 무효화 시키려고 한 것이다. 주님이 이렇게 대답하신 것은 신명기 8장 3절을 인용한 것이다. 주님의 생활 원칙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다. 아담은 동산에서 말씀을 소홀히 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사셨기에 승리하신 것이다. 그 분은 굶주리셨지만 말씀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그 기록된 말씀을 붙잡았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동산에서 주님보다 배도 안고프고 형편이 좋았지만 말씀을 소홀히 한 것이다. “죽을까 하노라”한 것은 말씀을 굳게 잡은 태도가 아니며 임의로 변개한 것이다. 자기에게 좋은대로 말씀을 굽힌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기록되었으되” 하시며 말씀에 대한 권위를 최대한 인정하시고 그 말씀에 입각하여 사셨다. 주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바는 이렇다. “물론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셨지만 나는 여기에 사람으로 왔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고 하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신 것이다. 주님은 실제적으로 배고프셨고,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능력도 있었고, 배고프시니까 잡수실 수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합법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임의로 하기를 원치 않고 말씀을 따라 행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주님은 사탄의 공격에 맞서기 위해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을 사용했다. “기록되었으되”라고 하신 것이다. 사탄은 ‘이 돌들을 떡덩이로 만들어라’고 했고,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하셨다. 사탄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은 기록된 말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며 그 말씀이 우리 속에 항상 충만하고 강하게 새겨져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