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본의 대표적인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우울하고 퇴폐적이라고 비판받지만, 독자들의 꾸준한 사랑을 받는 스테디셀러다. 이유는, 다자이가 인간 내면의 불안과 모순을 정직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삶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젊은 독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받는 인기 작가다.
그의 작품 중 단편 “직소”는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가룟 유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다자이는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성경을 문학적으로 사랑했다. 성서 이야기에 문학적인 관심과 애정을 가진 작가는 “직소”에서 유다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리며 자신만의 독특한 시선을 덧칠했다.
“직소”는 유다가 예수를 대제사장에게 넘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사람을 살려두어선 안 됩니다. 온 세상의 원수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유다는 동시에 “그 사람은 저의 주님이며, 저는 그를 누구보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한다. 격한 혐오 뒤에 왜곡된 집요한 사랑이 숨어 있다.
유다는 자신만이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며, 다른 제자들은 탐욕적이고 가식적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예수로부터 인정받지 못한다는 열등감은 점차 분노로 발전하고, 이 모순된 감정은 작품 후반부로 갈수록 더욱 격렬해진다. 예수로부터 사랑받고 싶었으나 사랑받지 못한 좌절이 분노를 낳았다. 작가는 유다의 악행에 숨은 동기가 좌절된 애정에 핀 극단적 증오라고 푼다.
유다는 예수를 팔아넘긴 이유가 돈 때문이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은 삼십을 받으며 자신을 조롱하듯 “그토록 업신여기던 돈으로 그 사람에게 복수하는 겁니다”라는 말로 돈을 통해 혹은 돈을 위해 복수했다고 선언한다. 유다는 정말 돈에 눈이 멀었던 걸까?
“직소”에서 유다는, 자신은 처음부터 예수를 믿지 못했고, 다만 그의 아름다움과 강인함에 매혹되어 그를 따랐을 뿐이라고 고백한다. 믿음에 기반 되지 않은 채 예수를 따랐다. 유다는 예수를 팔아넘기고, 그 선택을 “그분의 뜻을 이해한 유일한 제자”로서의 행위라고 합리화한다. 그는 사랑받고, 이해받고 싶었지만 끝내 사랑과 이해를 받지 못한 절망에 사로잡혀 분노했다.
작가 다자이는 유다를 통해 죄의식과 집착, 인정 욕망과 자기혐오가 뒤엉킨 인간 내면의 오물을 보여준다. 처음엔 유다의 분노와 과장이 불쾌하지만, 작품이 전개될수록 독자는 유다의 내면적 갈등에 스며든다. 다자이가 유다를 통해 독자들에게 유다 속에 숨겨진 우리 모습을 보게 한다. 물론 독자가 유다처럼 행동한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재해석한 유다 내면의 복잡성과 모순에서 우리 죄악을 직소한다는 것이 적절하다.
우리는 쉽게 가룟 유다를 비난한다. 맘에 안드는 이웃도 그렇게 비판한다. 하지만 유다를 ‘이야기 속 절대 악당’으로 밀어두는 순간, 교훈도 자기 발견도 함께 잃어버린다. 악인을 나와 동떨어진 존재로 치부해 버리면, 우리는 결국 자신 안에 꽈리를 틀고 있는 연약함과 악함에 눈감는 것이다. 우리는 이웃의 허물을 격렬히 비난하지만, 정작 자기 허물은 보지 못한다.
“직소”는 우리 자신이 가룟 유다가 될 수 있음을 직시하라고 가르친다. 자신을 보지 못하는 지식과 경험이 우리를 망치게 한다. 예수께서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직소(直訴)에서 직시(直視)의 지혜를 배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