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방향이 다른 기독교

오늘날 기독교는 각 교파마다 서로 반목하고 서로 폐쇄적이며 교류가 안되고 있다. 그들은 각자 성도들의 영성을 성장시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구원의 이정표를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자기들의 교파를 지키는 방어적 교리로만 사용하였지 정작 그 교리의 기능인 믿음의 성장을 통한 구원 측면에서는 간과하고 있다.

혹 그것을 활용하고 있다고 해도 피상적으로 이야기 할 뿐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목적지를 향하여 떠나는 배가 나침반과 지도없이 가는것과 같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신앙 성장의 뚜렷한 목적 의식 없이 무모하리만큼 자신의 방향도 좌표도 모르는 채 무조건 믿었고 막연히 열심을 내었다.

그럼 여기서 대표적인 교파들의 구원의 서정 단계를 살펴보자.
1)가톨릭(구교)- ①충족은혜 ②주입은혜 ③협력은혜 ④연옥의 고통 ⑤구원의 준비단계 ⑥칭의 ⑦선행에 의한 공로만족
2)칼빈(개신교)- ①소명 ②신앙 ③중생 ④회심 ⑤성화 ⑥칭의 ⑦예정 ⑧부활
3)루터(성공회)- ①소명 ②조명 ③회심 ④중생 ⑤신앙 ⑥칭의 ⑦신비적 연합 ⑧갱신 ⑨보존
4)알미니안(감리교)- ①소명 ②회개 ③신앙 ④칭의 ⑤중생 ⑥성화 ⑦견인
5)개혁파(일반적 견해)- ①소명 ②중생 ③회심 ④칭의(양자) ⑤성화(견인) ⑥영화

이와 같이 내용이나 순서들이 제각각 교파마다 다름을 볼 수 있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한 하나님을 섬기며 추구하는 이념도 같은데 말이다. 이것은 성경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학자들의 학설을 좇았기 때문이다.

성경적 구원관의 필요성

구원이 언제 이루어지는가 하는 문제는 예수님이 오신지 2천년이 지나면서도 아직도 하나로 정립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대개 둘로 양립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하나는 믿는 순간 구원을 얻는다는 순간구원을 주장하는 쪽과 그 반대로 믿음이 서서히 성장함으로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시간적 구원을 주장하는 쪽이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전자인 순간 구원론을 믿고 있다. 그래서 전도할 때나 초신자가 교회에 나오면 사도신경에 나오는 내용들을 이야기 해 주고 믿느냐고 묻고 ‘믿습니다’고 대답하면 ‘이제 당신은 구원을 얻었습니다’라고 선언을 한다.

물론 성경에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구절이 있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은 기정사실이나 그것은 구원으로 들어가는 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요충족 조건을 의미하는 것이지 바로 그것 자체가 구원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구원이 그렇게 단순하고 쉽게 얻어지는 것이라면 왜 주님은 구원의 길은 넓은 길이 아니요 좁은 길이라 하셨고 구원받는 사람은 많은 사람이 아니요 적은 자들이라 하셨는가? 또 왜 입술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는가? 이에 대한 명쾌한 논리가 있어야 된다.

또한 혹자들은 각 교파들마다 가지고 있는 구원의 단계에 대해서도 이것은 구원의 논리일뿐 구원은 순간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한다.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라면 구원의 교리를 왜 만들었는가. 이것은 억지일 뿐 논리성이 전혀 없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만물의 원리는 발전적 성장 과정이 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즉 시작이 있으면 과정이 있고 끝이 있게 마련인데 오늘날 기독교에는 그 과정이 생략된 듯하다.

오늘날 기독교가 사회로부터 냉대를 받고 타락의 길로 가고 있는것도 바로 그 원인이 통일되지 못한 불분명한 구원관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구원의 교리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이정표이다

기독교의 핵심이 구원에 있다면 구원의 교리야말로 중요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원의 교리를 각 교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실제적이고 실용적이 아닌 장식용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 교리가 제대로 작동된다면 응당 성도들은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변화되어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를 맺어야 하지 않겠는가?

구원관이 통일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

애석하게도 우리는 구원에 이르는 중요한 성장의 단계를 성경에서 발견치 못하고 신학자들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진 수많은 학설들 중 자신들의 구미에 맞는 것을 골라 사용해 왔다.

이에서 서로 다른 교파가 생겨나게 되었고 그들은 제각각 다른 구원의 이론을 가지게 되었다. 학자들의 견해는 하나의 학설이지 그것이 진리는 아니다. 왜냐하면 진리의 답은 하나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오늘날 기독교는 수많은 구원의 답을 내어놓고 서로 자기 것이 정답이라고들 한다. 사공이 많다 보면 배는 산으로 올라 가는 법이다. 정작 중요한 구원교리에 대한 믿음성이나 확실성이 상실되어 구원의 교리들이 제구실을 다하지 못하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므로 그 결과는 성도들의 믿음의 영적 진단이나 믿음의 상태를 척량하지 못하고 영적이 아닌 외형적인 모습만 보고 믿음을 평가하는 우를 범하게 되었다.

이러한 결과들은 구원의 단계교육이 안된 데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 이유는 믿음의 성장은 바로 구원의 단계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또한 두번째 결과는 믿음 생활을 열심히 하는 참 성도들조차도 무엇인가 영적으로 마음이 차지 않아 허전하고 공허하여 갈증을 채우기 위하여 다른 곳을 기웃거리게 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청소년들에게도 성장의 동기와 단계별 비전을 주지 못하니 대학에 가면 교회를 떠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 이정표를 찾아라

하나님의 핵심 사역은 인간들의 구속 사역이다. 어떻게 하면 죄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저들을 죄에서 해방시켜 구원시키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위하여 치밀하게 계획하시고 진행시키셨다.

즉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구원의 언약을 하셨고 그 언약을 이루시고자 그 손자 야곱에게 열두 아들을 주신 다음 그들을 보호하시고자 당시 강대국인 애굽으로 보내사 그곳에서 큰 민족을 이루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애굽에서 광야로 불러 내시고 인류 구원의 선택받은 민족으로서 앞으로 오실 메시야의 구원 사역의 길을 내는 훈련을 시키기 위하여 성막을 짓게 하셨다. 이어 광야 사십년동안 본격적인 구원의 과정 훈련을 시키셨다.

당시 성막은 실존의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장소로 이스라엘 민족의 통치에 구심점이 되었고 삶 자체가 되었다. 그후 가나안 땅에 들어간 그들은 이스라엘을 세우고 정착하며 이동식 성막 대신 석조로 영구적인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에서 제사를 드리게 됐다.

그후 언약대로 그 민족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로 오시게 되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언약한대로 오늘날 무수한 믿음의 자녀들을 주시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구원 사역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을 간추려 보면 성막건축과 예수의 탄생이다. 예수님은 대속적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원 사역을 다 이루시고 하늘에 오르셨다. 그렇다면 성막은 무슨 역할을 했는가? 그것을 알아야 한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