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이란 말은 구원을 말합니다. 왜 구원이란 말은 구속이라 하는가 하면 구속이란 값을 치르고 샀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마치 옛날 노예를 값을 치르고 사듯이 예수님께서 우리 죄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죄 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내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내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왜 복음을 믿지 아니합니까? 왜 복음을 안 받아드립니까? 가장 큰 이유는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데 구원을 공짜로 준다는 말인가? 그런 것 있으면 너나 믿으라고 합니다. 맞습니다. 세상에 공짜 없는 세상이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구원이란 엄청난 선물을 받지를 못합니다.

제가 한번은 심방을 갔는데 어떤 성도님이 떡 한 보따리를 싸 주시는 것입니다. 무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다니면서 심방을 할 수가 없어 어떡하나 생각을 하는데 문득 시외버스 정류장에 지게꾼 있습니다. 그분을 보니까 마음이 안됐어요. 그래서 이거가지세요 하고 주었더니 저를 한참 쳐다봐요? 왜? 그렇습니까? ‘세상에 떡을 한 보따리 공짜로 주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거죠? 그런데 오늘 성경은 24절에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었느니라 고 합니다. 은혜란 공짜라는 말입니다. 믿기만 하면 공짜로 구원을 얻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 얻은 성도들이 그렇게 감격하며 세상 것 다 주어도 내가 얻은 구원과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구원이란 무엇이냐? 의롭다 함을 얻었느니라, 즉 구원이란 하나님과 관계회복을 말합니다. 죄인이 용서를 받고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인정받게 되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함으로 우리의 본래의 삶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 인간은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한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살아가는 자는 항상 가난하여도 부요함 속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인간은 항상 욕심을 부리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만족이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죄인이라는 증거입니다.

아이가 우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왜 우는 거니?" "500원짜리 동전을 잃어 버렸어요." "울지 마라, 엄마가 줄게." 아이는 어머니가 주는 동전을 받고 잠시 기뻐하더니 다시 울기 시작했습니다. "왜 또 울어?" "500원을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합쳐서 1000원이 된단 말이에요." 하면서 우는 것입니다. 정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거기서 나오는 것이란 불행뿐입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자력으로 절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롬3:10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도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말은 인간은 자기 힘으로 절대 하나님이 주신 복된 삶을 회복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몇 년 전에 불교계의 유명한 『성철』이라는 승려가 죽었을 때 세간의 주목을 일으켰던 적이 있었습니다. 많은 매스컴들이 그의 죽음을 일제히 대서특필 했습니다. 사실 이 사람은 인간적인 면으로만 본다면 참으로 대단한 일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물론 혹자는 이 승려가 한마디로 고생만 죽도록 하다가 죽은 사람이라고 평하기도 하지만 이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지 아십니까?

이 사람은 결혼 직후에 부모와 아내에게도 말 한마디 없이 출가했는가 하면 부모가 찾아와도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하면서 만나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16년 동안 솔잎가루하고 쌀가루만 먹고 살았고, 10년 동안 철조망을 치고 굴속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무려 8년 동안이나 눕지도 않고 앉아서 잠을 잤다고 합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어쨌든 놀라운 삶을 살았던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행하므로 구원을 받습니까? 이런 것들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입니까? 성철 승려가 외쳤다는 "열반송"에 진리가 다 고백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열반송'을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한평생 무수한 사람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차 수미산보다 더하니 산채로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 지라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 있구나』라고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이냐면 "내가 사람들을 많이 속였다. 그래서 죄가 수미산보다 더하니 나는 이제 지옥에 떨어진다"는 뜻입니다. 그의 고행과 함께 한 그 숱한 사람이 자기를 구원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자기의 속임수의 가르침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불교신자의 최고의 목표는 자신이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부처가 된 후로 3000년이 지나도록 누가 부처가 되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아마도 이 많은 불교 신자들 부처가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까요? 아니지요. 시간이 지난다고 될 수 있을 까요?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 삶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즉 구원받는 길은 한 가지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얻습니다.

(롬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 유월하심-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자기 의를 나타내심은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 믿는 자들도 의롭다 하려 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화목제물로 세우셔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사실 예수를 화목제물로 주심은 구약에 반복적으로 나타나 있었습니다. 이 화목제는 다른 제사와 달리 하나님은 물론 제사장과, 드리는 자, 이 삼자가 다 즐거이 참여하는 독특한 제사입니다. 여기에 담긴 영적인 의미는 우리 죄인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큰 의미는 인간이 하나님과 죄로 인한 불편한 관계가 해소된 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웃을 수가 있습니다. 울 수도 있습니다. 전에는 얼굴을 제대로 쳐다 볼 수 없는 서먹한 사이였는데 화해로 인해서 관계가 회복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희생의 제물을 보시고 당신의 자녀들에게 의로움을 주시니 이제는 사람들이 믿고 하나님의 영광에 나아오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중에 거하셔서 자기 백성이 하나님께로 나아와서 하나님과 교제토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는 의미는 죄 값이 치러진 것이요, 하나님의 정의가 채워진 것이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앞에 놓여진 장벽이 허물어 진 것을 의미 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 Redemption, Propitiation, Reconciliation(구속, 속죄, 화해)이 세 가지인 것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 이루었노라” 우리가 할 일은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룰 일은 없습니다. 오늘 이 십자가의 은혜를 다시 새롭게 기억하시고, 감격을 다시 느끼는 축복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