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예수쟁이들은 왜 귀찮도록 끈질기게 예수 믿으라고 하나?”왜 그럴까요? 그렇지요 우리는 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나면 고집이 생기는 법입니다. 좋은 것 나누어 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강원도 태백이나 황지에 가면 탄광이 있는데 탄광의 광부들을 막장인생이라고 합니다. 40도가 넘는 깊은 땅굴 속에서 8시간 노동을 하고 그 속에서 시커멓게 먼지가 앉은 점심을 먹고 온 몸이 땀범벅이 되어도 참으며 일합니다. 공기가 너무나 탁해서 연탄가루 돌가루가 몸속으로 들어가 허파에 쌓여 나중에는 규폐증이라는 병이 듭니다. 결국은 폐가 점점 굳어져서 폐기능이 약화되어서 병원 신세를 지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것이 대부분의 광부들의 운명입니다. 그래서 막장인생이라고 합니다.

여기 탄광 광부의 아들이 쓴 시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하니까 광부가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버지께서는 " 난 어차피 못 배워 광부가 되었으니 열심히 갱 속에서 일해야 되겠지마는 너는 커서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죽어도 광부는 되지 마라 " 고 하신다.

얼마나 기막힌 이야기입니까? 막장인생을 사는 가슴에 피가 맺힌 아버지의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갱 속에 들어오는 광부는 되어서는 안 된다는 아버지의 절규. 이게 아들을 못살게 구는 잔소리도 들리겠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광부의 생활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일인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아들만은 이곳에 오지 못하도록 말리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보니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나니, 사랑하는 남편 혹 가족 혹 친구에게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이렇게 강권하여 예수 믿어라, 교회 나가자 하는 것입니다.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는데 방관만 할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내가 진리에 눈을 뜨고 보니 하나님이 계시고 영원이 있고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는데 어찌 입 다물고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구원입니다. 영생을 받아야 합니다.

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 하는 것은 지난 시간에 걸쳐서 우리가 보았습니다.

(롬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우리말 성경에는 번역이 안 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그러나 라는 접속사로부터 본문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말은 반전을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즉 전절에 결론이 무엇이었지요. 네 율법으로는 의를 얻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되는가? 그럼 다 죽을 수밖에 없지 않는가? 라는 절망 앞에 바울은 희망을 제시하기 위해서 그러나 라는 접속사를 앞세웁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 말은 희망이 보이는 말입니다. Turning Point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정죄가 아니고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과 선지자 - 즉 구약의 핵심은 메시야를 통해 얻게 되는 구원입니다.

(사 46:13) 내가 나의 의를 가깝게 할 것인즉 상거가 멀지 아니하니 나의 구원이 지체치 아니할 것이라 내가 나의 영광인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원을 시온에 베풀리라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로마서 1장 17절에 인용한 하박국 선지자의 예언도 바로 이런 것에 대한 증거인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WITH US GOD'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의'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 이것이 로마서의 주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어떤의인가? 여러 가지가 있지요.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신 것, 아니면 하나님을 의롭게 하는 것. 아니면 하나님이 의롭게 만드시는 것. 여러분은 이 세가지중 어떤 것이라 생각 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를 의롭게 보시고, 여기시고, 만드시는 것이 복음이요, 구원의 핵심인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 즉 구약 성경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일 년에 한 번씩 대 속죄일- 욤키퍼-를 지켰습니다. 대 제사장은 하나님이 명하신대로 두 마리의 염소를 택합니다. 한 마리는 잡아서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법궤 위에 뿌리고 또 한 마리는 광야로 내 보냅니다. 그리곤 일 년 동안 이스라엘의 죄 값이 지불 되었다고 선언 하십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이 아사셀 염소는 바로 예수님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 주님이 오셔서 자신이 대제사장으로 그전엔 염소피로 속죄물 삼았는데 이제는 자신의 몸으로 속죄물 삼고 우리 죄를 대속하신 것입니다.

(히 9:22)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케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히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있는 지성소)-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22절에 하나님의 의는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늘 본문 23절과 24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하셨습니다.

"믿음의 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의 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뿐만 아니라 구원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 믿음에 오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나는 믿음이 부족하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도 열심히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적고 많고의 양의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대상이 누구냐인 것입니다. 그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을 믿으면 그것으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내 믿음의 사이즈로가 아니고 내가 믿는 하나님의 스케일입니다. 내가 담은 내 많은 기도와 교회 봉사와 공적이 아니고 그분이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그분이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인정하고 믿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28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옛사람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근본적으로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엡2:8~9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신약시대, 곧 복음시대는 믿음으로 구원 받지만, "구약시대 곧 율법시대에는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았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롬4장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변증하였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구약시대에는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며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신약시대에는 이미 오신 그리스도를 믿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인간 구원의 길은 오직 믿음의 길이며, 인간의 공로를 철저히 배격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과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선물로 주어진 믿음입니까? 아니면 또 다른 믿음입니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고 내적으로 방황하는 신앙을 가리켜 "꽃꽂이 신앙"이라 하겠습니다. 꽃꽂이는 겉으로는 대단히 화려해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고, 향기를 날리며 아름답다는 칭찬을 듣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말로가 이미 예고되어 있습니다. 언젠가는 말라 죽게 됩니다. 얼마간은 생기가 있고 싱싱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화병 속의 꽃처럼 오래 가지 못합니다. 견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바람에도 약하고 잘 견디지 못해서 이내 시들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반면 구원관이 뚜렷한 "뿌리 깊은 신앙"을 가진 사람은 실생활에서도 가장 강한 성도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새 교회가 든든한 교회가 되려면 우리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으로 무장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렘17:7~8절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며 여호와를 의뢰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가 그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 아니하며 그 잎이 청청하며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고 결실이 그치지 아니함 같으리라"고 했습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