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의 율법으로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탁월한 것입니다. 아직 죄의 권세가 완전히 정복된 것은 아니었지만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 휘장으로 가리시고 함께 거하신 것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큰 유익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따라 살지 못하고 넘어졌습니다. 이방인 중에 하나님의 이름을 나타내고 증거 해야 하는데, 마치 자식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이름이 더러워지는 것처럼 율법을 범하므로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게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장막에서 자고 일어나며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눈앞에 하나님의 성막을 보고 살았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고 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하여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여 이방인의 권세 아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언약을 지키지 않아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의 권세로 심판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해서 이방인을 인도하는 빛으로 세우셨는데 이것을 이스라엘이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언약을 지키지 않음에 대한 상당한 보응을 하실 것을 이미 신명기에서 경고했었습니다.
신명기 28:15, 36-37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램과 속담과 비방 거리가 될 것이라."
이방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리고 말씀을 전파해야할 제사장으로 삼으셨는데 그 일을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은 도리어 이방인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럼 문제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연이어 두 번째 질문으로 제기 합니다. 로마서 3:3-4입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을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믿지 아니하고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완전히 진멸하시지 않았습니다.
구약을 통해서 보면 이스라엘은 무수히 하나님을 반역하여 마땅히 죽어야 했는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부르실 것을 언약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그 백성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30:3-4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 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어떤 신실하심 입니까?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라함과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을 맺는 언약식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고대에서 계약을 맺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조건부 계약 이냐, 아니면 무조건적인 계약이냐가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맺은 일곱 개의 계약 혹은 성약 이 있는데 (나중에 시간을 내서 다시 공부 하도록 하겠습니다) 창 15:18-21에 보면 계약 식을 합니다. 거기에는 계약 당사자와, 계약 내용과 물증이 나옵니다. 그런데 계약을 맺는 모습을 잘 보십시오. 누가 이 계약 식에 참여 합니까? 하나님 혼자 이십니다. 즉 여기에 약속한 계약 내용의 성취가 아브라함의 행동 여하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 혼자서 재물들 사이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창 15: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창 15: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창 15: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창 15: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창 15: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창 15:16)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창 15: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 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 15: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창 15: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창 15: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일방적인 계약, 무조건적인 계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스라엘이 배반하고 거역하여도 징계는 하시지만 영원히 버리시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어도 하나님은 참 되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말하면 시편 51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쫓아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지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가 다윗의 왕국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열방들이 다윗의 보좌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야를 전쟁터의 일선에 내세워 죽게 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말하면 다윗은 살인한 죄로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가장 잘 나타난 때에 아울러 그 범죄도 가장 강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다윗도 모세의 율법, 그러니까 첫 언약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셨습니다. 왜? 다윗과 맺은 언약도 무조건적인 일방적인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왕국은 은혜의 왕국이요, 자비와 인자함이 넘치는 왕국의 예표입니다. 구약 역사 가운데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이 가장 잘 드러났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사람은 다 죄악 중에 출생하여 다 거짓된 자들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어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증거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하신 언약은 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 법적으로 하면 다윗이 범죄 하였을 때에 아무리 다윗이라 할지라도 다 폐하고 진멸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시고 참되십니다. 인자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사람이 불의하고 다 범죄 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미쁘심을 따라 하나님의 의를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이 참되시고 의로우심은 이처럼 법정적인 의가 아닙니다. 하나라도 못 지키면 사망, 다 지키면 천국,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면 저는 벌써 골백번 집으로부터 쫓겨났을 것입니다. 이미 부모 자식과의 관계는 끝났어야 마땅합니다. 또 부모님께서도 부모의 권위를 세우려면 마땅히 쫓아내었어야 합니다. 그것이 법적으로 마땅한 조치입니다. 그런데도 여태까지 제가 이렇게 무사(?)한 것은 부모와 자식은 법적인 관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서 오늘까지 참고 기다리셨던 신실함이 저를 이만큼이나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냥 참고 기다리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약속한 것을 잘 지키도록 격려하고 도와주고 여러 가지 방법들을 백방으로 동원하십니다. 자신들의 희생을 무릅쓰기까지 하면서 자녀를 돕는 것입니다. 잘 지킬 수 있도록 더 나은 의를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부모님의 미쁘심 때문에 자식은 장성한 자녀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하셨다고 해서 부모님들 보고 불의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다시 세 번째 질문이 이어집니다.
5절에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바울은 여기서 궤변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을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고 또 우리가 악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니까. 결국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냐? 즉 우리의 악행이 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심을 공평하지가 않다" 하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지적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악한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궤변에 대해서 사도는 그 답을 합니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모든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면 어찌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하나님이 세상을 판단하는 표준은 공평하며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네 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이 질문은 바로 전 질문의 연장입니다. '자 한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행한 모든 악한 것,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게 한 것이라면, 어찌 하나님이 나에게 죄인이라 하실 수 있으며, 내가 왜 심판을 받느냐 하는 논리입니다.
(롬 3: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예를 들면 어떤 주부가 저녁을 준비하다가 칼에 손가락을 베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갔더니 의사가 '참 잘 오셨습니다. 이 상처에 아주 탁월한 효과를 내는 약이 있습니다.' 하면서 약을 처방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 약이 효과가 있어서 금방 상처가 아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주부가 너무 좋아서 매번 일부러 상처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의 명성을 더 빛나게 되기 때문이라나요? 바울이 말하는 논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빕니다. 그럼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죄는 용서 받았지만 그 결과는 스스로 거두도록 하십니다. 죄를 지음으로서 오는 결과를 사람들이 간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주부처럼 매번 약을 발라서 상처는 낫지만 그 흉터가 남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면 정말로 어리석은 논리의 희생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는 정죄 받아 마땅하다고 바울은 선언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이제 바울은 9절에서 마지막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기소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질문입니다.
(롬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다섯 가지 질문은 인간이 하는 다섯 가지 변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독특성, 하나님의 신실성, 하나님의 공의성, 하나님의 진실성, 그리고 마지막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성 즉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라는 죄악성에 대한 질문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나으뇨? 이것은 바로 유대인들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로마서 첫 번째 Section에 대해서 결론을 짓습니다.
(롬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시14:1-3) 즉 구원은 양이 구세주를 찾는 것이 아니고 목자가 양을 찾는 것입니다.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결국 저들은 찾기는 찾는데 잘못된 것을 찾음이고 자기들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름에 기인한 삶입니다. 결국은 그 결과가
(롬 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시5:9
(롬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시10:7
(롬 3: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59:7-9
(롬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 3: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죄 아래 놓여있습니다. 문명이 앞서가던 뒤서가던, 지식이 있건 없건, 도덕적으로 흠이 있건 없건, 종교적으로 자기를 수행하던 안하던 간에 그 결과는 영원한 사망이며,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고 예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적 타락의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 오늘까지는 Bad News-다음 주부터는 Good New로 바뀝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20절과 21절은 성경의 그랜드 캐년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깊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장막에서 자고 일어나며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눈앞에 하나님의 성막을 보고 살았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대면하고 산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거역하여서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여 이방인의 권세 아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언약을 지키지 않아 하나님은 그들을 이방의 권세로 심판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노릇을 해서 이방인을 인도하는 빛으로 세우셨는데 이것을 이스라엘이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 언약을 지키지 않음에 대한 상당한 보응을 하실 것을 이미 신명기에서 경고했었습니다.
신명기 28:15, 36-37입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 여호와께서 너와 네가 세울 네 임금을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나라로 끌어가시리니 네가 거기서 목석으로 만든 다른 신들을 섬길 것이며 여호와께서 너를 끌어가시는 모든 민족 중에서 네가 놀램과 속담과 비방 거리가 될 것이라."
이방인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알리고 말씀을 전파해야할 제사장으로 삼으셨는데 그 일을 이스라엘이 순종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스라엘은 도리어 이방인의 종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럼 문제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리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것을 연이어 두 번째 질문으로 제기 합니다. 로마서 3:3-4입니다.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을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믿지 아니하고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완전히 진멸하시지 않았습니다.
구약을 통해서 보면 이스라엘은 무수히 하나님을 반역하여 마땅히 죽어야 했는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부르실 것을 언약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범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 때문에 그 백성을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신명기 30:3-4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너의 쫓겨 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어떤 신실하심 입니까?
창세기 15장에는 아브라함과 여호와 하나님이 언약을 맺는 언약식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 고대에서 계약을 맺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조건부 계약 이냐, 아니면 무조건적인 계약이냐가 가장 중요한 핵심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맺은 일곱 개의 계약 혹은 성약 이 있는데 (나중에 시간을 내서 다시 공부 하도록 하겠습니다) 창 15:18-21에 보면 계약 식을 합니다. 거기에는 계약 당사자와, 계약 내용과 물증이 나옵니다. 그런데 계약을 맺는 모습을 잘 보십시오. 누가 이 계약 식에 참여 합니까? 하나님 혼자 이십니다. 즉 여기에 약속한 계약 내용의 성취가 아브라함의 행동 여하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하나님 혼자서 재물들 사이로 지나가신 것입니다.
(창 15:9)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창 15:10)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창 15:11)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창 15:12) 해질 때에 아브람이 깊이 잠든 중에 캄캄함이 임하므로 심히 두려워하더니
(창 15:13)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창 15:14)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5) 너는 장수하다가 평안히 조상에게로 돌아가 장사될 것이요
(창 15:16) 네 자손은 사 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관영치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
(창 15:17)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창 15:18) 그 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창 15:19) 곧 겐 족속과 그니스 족속과 갓몬 족속과
(창 15:20) 헷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르바 족속과
(창 15:21)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여부스 족속의 땅이니라 하셨더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일방적인 계약, 무조건적인 계약을 맺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스라엘이 배반하고 거역하여도 징계는 하시지만 영원히 버리시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신실함 때문인 것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어도 하나님은 참 되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참되심을 말하면 시편 51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쫓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쫓아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이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한 후에 지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하나님의 나라가 다윗의 왕국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열방들이 다윗의 보좌에 함께 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 때 다윗은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야를 전쟁터의 일선에 내세워 죽게 하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취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말하면 다윗은 살인한 죄로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가장 잘 나타난 때에 아울러 그 범죄도 가장 강하게 드러난 것입니다. 다윗도 모세의 율법, 그러니까 첫 언약 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함에도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셨습니다. 왜? 다윗과 맺은 언약도 무조건적인 일방적인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왕국은 은혜의 왕국이요, 자비와 인자함이 넘치는 왕국의 예표입니다. 구약 역사 가운데 다윗에게서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하심이 가장 잘 드러났습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사람은 다 죄악 중에 출생하여 다 거짓된 자들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어서 모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은 증거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 언약하신 언약은 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실 법적으로 하면 다윗이 범죄 하였을 때에 아무리 다윗이라 할지라도 다 폐하고 진멸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미쁘시고 참되십니다. 인자와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키시는 하나님이 십니다.
사람이 불의하고 다 범죄 하였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미쁘심을 따라 하나님의 의를 나타냈습니다. 하나님이 참되시고 의로우심은 이처럼 법정적인 의가 아닙니다. 하나라도 못 지키면 사망, 다 지키면 천국,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부모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경우를 생각하면 저는 벌써 골백번 집으로부터 쫓겨났을 것입니다. 이미 부모 자식과의 관계는 끝났어야 마땅합니다. 또 부모님께서도 부모의 권위를 세우려면 마땅히 쫓아내었어야 합니다. 그것이 법적으로 마땅한 조치입니다. 그런데도 여태까지 제가 이렇게 무사(?)한 것은 부모와 자식은 법적인 관계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모님께서 오늘까지 참고 기다리셨던 신실함이 저를 이만큼이나 세워 주신 것입니다. 그냥 참고 기다리기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녀가 약속한 것을 잘 지키도록 격려하고 도와주고 여러 가지 방법들을 백방으로 동원하십니다. 자신들의 희생을 무릅쓰기까지 하면서 자녀를 돕는 것입니다. 잘 지킬 수 있도록 더 나은 의를 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러한 부모님의 미쁘심 때문에 자식은 장성한 자녀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하셨다고 해서 부모님들 보고 불의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다시 세 번째 질문이 이어집니다.
5절에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바울은 여기서 궤변에 대한 또 다른 도전을 합니다. "만약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고 또 우리가 악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니까. 결국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증거 하는 것이 아니냐? 즉 우리의 악행이 선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벌하심을 공평하지가 않다" 하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지적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악한 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 궤변에 대해서 사도는 그 답을 합니다. "결코 그렇지 아니하니라 모든 사람이 악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면 어찌 하나님이 심판을 하실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세상을 심판하시리요 하나님이 세상을 판단하는 표준은 공평하며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네 번째 질문을 합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나도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
이 질문은 바로 전 질문의 연장입니다. '자 한걸음 더 나아가 봅시다' 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행한 모든 악한 것,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을 더 풍성하게 만들고 그의 영광이 되었다면,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나타내게 한 것이라면, 어찌 하나님이 나에게 죄인이라 하실 수 있으며, 내가 왜 심판을 받느냐 하는 논리입니다.
(롬 3:8) 또는 그러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 하지 않겠느냐
예를 들면 어떤 주부가 저녁을 준비하다가 칼에 손가락을 베었습니다. 그래서 의사에게 갔더니 의사가 '참 잘 오셨습니다. 이 상처에 아주 탁월한 효과를 내는 약이 있습니다.' 하면서 약을 처방 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이 약이 효과가 있어서 금방 상처가 아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주부가 너무 좋아서 매번 일부러 상처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약의 명성을 더 빛나게 되기 때문이라나요? 바울이 말하는 논지는 바로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빕니다. 그럼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용서해 주십니다. 그러나 죄는 용서 받았지만 그 결과는 스스로 거두도록 하십니다. 죄를 지음으로서 오는 결과를 사람들이 간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주부처럼 매번 약을 발라서 상처는 낫지만 그 흉터가 남는 것을 생각지 못한다면 정말로 어리석은 논리의 희생자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 논리는 정죄 받아 마땅하다고 바울은 선언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정죄 받는 것이 옳으니라..
이제 바울은 9절에서 마지막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기소장의 결론에 해당하는 질문입니다.
(롬 3:9) 그러면 어떠하뇨 우리는 나으뇨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다섯 가지 질문은 인간이 하는 다섯 가지 변명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독특성, 하나님의 신실성, 하나님의 공의성, 하나님의 진실성, 그리고 마지막은 모든 사람들의 공통성 즉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라는 죄악성에 대한 질문인 것입니다. 그럼 우리는 나으뇨? 이것은 바로 유대인들에게 하는 질문입니다. 바울은 이제 로마서 첫 번째 Section에 대해서 결론을 짓습니다.
(롬 3:10)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롬 3: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시14:1-3) 즉 구원은 양이 구세주를 찾는 것이 아니고 목자가 양을 찾는 것입니다. (눅 19:10)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결국 저들은 찾기는 찾는데 잘못된 것을 찾음이고 자기들이 찾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름에 기인한 삶입니다. 결국은 그 결과가
(롬 3: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시5:9
(롬 3: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시10:7
(롬 3: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59:7-9
(롬 3: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롬 3: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롬 3:18) 저희 눈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롬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죄 아래 놓여있습니다. 문명이 앞서가던 뒤서가던, 지식이 있건 없건, 도덕적으로 흠이 있건 없건, 종교적으로 자기를 수행하던 안하던 간에 그 결과는 영원한 사망이며, 그렇기 때문에 구원이 필요하고 예수가 필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적 타락의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 오늘까지는 Bad News-다음 주부터는 Good New로 바뀝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20절과 21절은 성경의 그랜드 캐년 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너무나 깊은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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