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들의 미주 이민사에서 태권도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의 많은 태권도 사범들이 미국으로 건너와 태권도를 가르쳤고 현재 미국 내에는 7000여명의 한국인 사범이 최강대국인 미국에서 미국인들을 가르치고 있음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전 새크라멘토 주립대 교수인 강명규 장로도 그 중 한 명이다.
세계에서 10단이란 명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6명뿐이다. 무덕관 10단, 대한태권도협회 공인 9단인 강명규(75) 장로(새크라멘토 시온장로교회)도 그 반열위에 있다. 그러나 정작 그는 태권도 대부라 칭함 받기 원치 않는다. 태권도의 무질서와 의리 상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국 젊은이들에게 애국심과 감사를 가르치고 태권도를 현재와 미래가 필요로 하는 무도로 개혁해야 한다고 말하는 강명규 장로를 만나기 위해 새크라멘토로 향했다.
도장을 찾은 날 강명규 장로는 새크라멘토 한인복지봉사실에서 민원을 처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도장이 곧 새크라멘토 한인복지봉사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강명규 장로가 지역 한인들의 어려움을 돕는 마음으로 시작한 봉사회 일이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작게는 하루 2,3건 많을 때는 10건 정도 문의가 들어온다고 한다. 문을 열자 반갑게 기자를 맞이해 주는 강명규 장로의 짧은 머리에 흐트러짐 없는 눈과 탄탄하고 균형 잡힌 체구는 칠순이 훨씬 넘은 나이를 무색케 했고 가슴과 팔 근육의 단단함이 옷 밖으로 내비쳤다.
1964년 새크라멘토에 정착한 후 태권도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지역 한인들의 역사를 지켜온 강명규 장로를 만나 무도인의 삶을 들어 봤다.
◆미국 무술 협회 AAU에 태권도 정식 종목으로 승인 받아
북가주에서 태권도 전파에 공헌한 사람을 뽑으라면 UC버클리 전 무도연구소장 민경호 명예교수와 새크라멘토에 강명규 전 새크라멘토주립대 교수를 말할 수 있다.
강명규 장로가 새크라멘토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1964년 문교부 장관의 승인으로 태권도 사범으로 미국 온 이후부터다. 공부하고 싶었던 열망이 컸던 그는 새크라멘토주립대로 초빙돼 체육학 학위 취득, 인체기능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새크라멘토주립대에서 35년 동안 태권도와 유도를 가르치며 교수로 재직했다.
강명규 장로는 태권도가 미국에서 정식 무도로 공인받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에서 공인하는 스포츠 종목이라는 의미를 가진 AAU(Amateur Athletic Union)에 태권도를 정식 등록한 것이 그것이다. 미국에서 공인하는 무도는 곧 세계에서 공인하는 무도가 된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정식 종속으로 채택된 것도 태권도의 AAU등록이 결정적이었다. 이것을 강명규 장로와 UC버클리 전 무도연구소장 민경호 명예교수와 함께 이루어 냈다.
강명규 장로는 태권도의 미래에 대해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혁신적인 머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산 43년 동안 수많은 무술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그는 태권도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선 골동품 놓고 장사하는 안이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태권도 사범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태권도만 하지 말고 세계의 무술을 다 배워 가르칠 수 있고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것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강 장로는 태권도의 개혁을 말하며 “전통적 무술로서 그리고 경기 위주의 스포츠로서, 또한 배우기 쉽고 즐기면서, 시범적 그리고 드라마적 예술의 무술로 개혁을 제안하기도 했다.
◆새크라멘토 최초 한인교회 도장에서 시작돼, 진정한 교육의 결실은 감사함을 아는 것
중국 심양에서 태어난 강명규 장로는 유교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기독교인인 어머니가 시집 온 이후 집안 거의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됐다. 그는 6.25 사변으로 전쟁에도 참여 했는데 3개월 동안 포로로 잡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기간은 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기간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후 목사가 되기로 다짐도 했던 그는 영등포 장로교회에 출석, 마산과 진해를 다니며 어린이 부흥회를 이끄는 등 부흥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강명규 장로는 새크라멘토에 처음으로 한인 교회를 세운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64년 미국에 왔을 때 북가주에는 샌프란시스코 한국인연합감리교회만 있었기에 새크라멘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버스를 타고 교회에 갔었다. 강 장로가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자다 일어나 단을 쌓은 것 같이 새크라멘토에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다. 그 당시 새크라멘토에는 교포들이 몇 없었고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30여명쯤 되는 사람이 모여 우리 도장에서 한인연합장로교회 교회를 65년도에 시작하게 됐고, 현재 새크라멘토 30여개 교회의 모체가 됐다.
강명규 장로는 “도장에서 성경을 펼치고 가르치지는 안지만 내 말 한마다 한마디를 주님이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앞차기, 옆차기, 발차기, 엎치기 같은 것을 배우지만 태권도는 내가 추구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지 최종목적이 될 수는 없다"며 "진정한 교육의 결실은 감사함을 아는 것이다”고 말했다.
“작건 크건 감사할 줄 아는 사람, 부모에 대해서 감사하고 형제에 대해서 감사하고 선생에 대해서 감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참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고 강명규 장로는 말한다.
그는 무도인의 길 뿐 아니라 한인들의 연합과 복지에 힘썼다. 새크라멘토는 미국 어느 지방보다 한인들이 화목하고 따뜻하게 지낸다고 말하는 그는 이 지역에 처음으로 한인회를 조직해 5번 회장을 했다. 독재가 아니라 한인회를 만들었는데 없어지려고 하고, 하려는 사람도 없고, 없앨 수가 없어 다시 하고 또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한인회를 사랑한다. 그는 연말에 60,70,80년에 이민 온 한인들의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교회에 가면 고향과 같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우리 향우회도 교회와 같이 고향의 따뜻함과 돕고 아끼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곳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명규 장로는 인터뷰 말미에 어린 날의 일화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가 어릴 때 일흔이 넘은 친 할아버지가 뒷들에 조그만 대추나무를 심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 그렇게 나이가 많이 드셨는데 지금 이것을 심어 언제 잡수세요”라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이 나무를 심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덧 그때 할아버지의 나이가 된 강명규 장로는 어릴 때는 몰랐으나 사람은 항상 지향적인 의지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몸이 아프고 늙고 지식이 없어서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 하면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내일 죽더라도 천년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이야기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한 분야에서 경지에 이른 다는 것은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그가 무도인의 길을 통해 깨닫게 된 인생철학을 듣고 싶었다. 태권도 10단이 말하는 삶의 궁극 목표는 무엇일까? 그는 ‘감사’라고 답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강명규 장로은 “때로는 지갑에 5불이 없어 ‘주님 점심 먹을 돈이 없습니다’”라고 주님께 말하기도 한단다. 그러나 “없어도 만족하며 감사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주님이 주신 신앙의 지혜이다”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강명규 관장의 초연한 뒷모습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게 했다.
연락처) 916-447-8989
세계에서 10단이란 명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6명뿐이다. 무덕관 10단, 대한태권도협회 공인 9단인 강명규(75) 장로(새크라멘토 시온장로교회)도 그 반열위에 있다. 그러나 정작 그는 태권도 대부라 칭함 받기 원치 않는다. 태권도의 무질서와 의리 상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국 젊은이들에게 애국심과 감사를 가르치고 태권도를 현재와 미래가 필요로 하는 무도로 개혁해야 한다고 말하는 강명규 장로를 만나기 위해 새크라멘토로 향했다.
도장을 찾은 날 강명규 장로는 새크라멘토 한인복지봉사실에서 민원을 처리하고 있었다. 자신이 운영하는 도장이 곧 새크라멘토 한인복지봉사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강명규 장로가 지역 한인들의 어려움을 돕는 마음으로 시작한 봉사회 일이 어느덧 20년이 흘렀다. 작게는 하루 2,3건 많을 때는 10건 정도 문의가 들어온다고 한다. 문을 열자 반갑게 기자를 맞이해 주는 강명규 장로의 짧은 머리에 흐트러짐 없는 눈과 탄탄하고 균형 잡힌 체구는 칠순이 훨씬 넘은 나이를 무색케 했고 가슴과 팔 근육의 단단함이 옷 밖으로 내비쳤다.
1964년 새크라멘토에 정착한 후 태권도의 세계화에 기여하고 지역 한인들의 역사를 지켜온 강명규 장로를 만나 무도인의 삶을 들어 봤다.
◆미국 무술 협회 AAU에 태권도 정식 종목으로 승인 받아
북가주에서 태권도 전파에 공헌한 사람을 뽑으라면 UC버클리 전 무도연구소장 민경호 명예교수와 새크라멘토에 강명규 전 새크라멘토주립대 교수를 말할 수 있다.
강명규 장로가 새크라멘토에 정착하게 된 계기는 1964년 문교부 장관의 승인으로 태권도 사범으로 미국 온 이후부터다. 공부하고 싶었던 열망이 컸던 그는 새크라멘토주립대로 초빙돼 체육학 학위 취득, 인체기능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새크라멘토주립대에서 35년 동안 태권도와 유도를 가르치며 교수로 재직했다.
강명규 장로는 태권도가 미국에서 정식 무도로 공인받기 위해 무수한 노력을 기울였다. 미국에서 공인하는 스포츠 종목이라는 의미를 가진 AAU(Amateur Athletic Union)에 태권도를 정식 등록한 것이 그것이다. 미국에서 공인하는 무도는 곧 세계에서 공인하는 무도가 된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태권도가 정식 종속으로 채택된 것도 태권도의 AAU등록이 결정적이었다. 이것을 강명규 장로와 UC버클리 전 무도연구소장 민경호 명예교수와 함께 이루어 냈다.
강명규 장로는 태권도의 미래에 대해 “새로운 전통을 만드는 혁신적인 머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산 43년 동안 수많은 무술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그는 태권도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승자가 되기 위해선 골동품 놓고 장사하는 안이한 태도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태권도 사범들에게 강조하는 것이 태권도만 하지 말고 세계의 무술을 다 배워 가르칠 수 있고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것을 강조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강 장로는 태권도의 개혁을 말하며 “전통적 무술로서 그리고 경기 위주의 스포츠로서, 또한 배우기 쉽고 즐기면서, 시범적 그리고 드라마적 예술의 무술로 개혁을 제안하기도 했다.
▲어릴 적 교회 전도사님이 빌려준 괴짜 같은 사진기를 쓴 이후부터 강명규 장로는 사진을 즐긴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삶을 사진을 통해 어제의 시간을 지금 보유하고 미래에 다시 볼 수 있는 매력이 있다”고 말했다.. | |
◆새크라멘토 최초 한인교회 도장에서 시작돼, 진정한 교육의 결실은 감사함을 아는 것
중국 심양에서 태어난 강명규 장로는 유교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기독교인인 어머니가 시집 온 이후 집안 거의 모든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됐다. 그는 6.25 사변으로 전쟁에도 참여 했는데 3개월 동안 포로로 잡혀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들었던 기간은 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한 기간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 후 목사가 되기로 다짐도 했던 그는 영등포 장로교회에 출석, 마산과 진해를 다니며 어린이 부흥회를 이끄는 등 부흥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강명규 장로는 새크라멘토에 처음으로 한인 교회를 세운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64년 미국에 왔을 때 북가주에는 샌프란시스코 한국인연합감리교회만 있었기에 새크라멘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버스를 타고 교회에 갔었다. 강 장로가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잠자다 일어나 단을 쌓은 것 같이 새크라멘토에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때다. 그 당시 새크라멘토에는 교포들이 몇 없었고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30여명쯤 되는 사람이 모여 우리 도장에서 한인연합장로교회 교회를 65년도에 시작하게 됐고, 현재 새크라멘토 30여개 교회의 모체가 됐다.
강명규 장로는 “도장에서 성경을 펼치고 가르치지는 안지만 내 말 한마다 한마디를 주님이 인도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앞차기, 옆차기, 발차기, 엎치기 같은 것을 배우지만 태권도는 내가 추구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지 최종목적이 될 수는 없다"며 "진정한 교육의 결실은 감사함을 아는 것이다”고 말했다.
“작건 크건 감사할 줄 아는 사람, 부모에 대해서 감사하고 형제에 대해서 감사하고 선생에 대해서 감사하고 하나님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결국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고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참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고 강명규 장로는 말한다.
그는 무도인의 길 뿐 아니라 한인들의 연합과 복지에 힘썼다. 새크라멘토는 미국 어느 지방보다 한인들이 화목하고 따뜻하게 지낸다고 말하는 그는 이 지역에 처음으로 한인회를 조직해 5번 회장을 했다. 독재가 아니라 한인회를 만들었는데 없어지려고 하고, 하려는 사람도 없고, 없앨 수가 없어 다시 하고 또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한인회를 사랑한다. 그는 연말에 60,70,80년에 이민 온 한인들의 모임을 준비하고 있다. 교회에 가면 고향과 같은 행복감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우리 향우회도 교회와 같이 고향의 따뜻함과 돕고 아끼고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곳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명규 장로는 인터뷰 말미에 어린 날의 일화를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가 어릴 때 일흔이 넘은 친 할아버지가 뒷들에 조그만 대추나무를 심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 그렇게 나이가 많이 드셨는데 지금 이것을 심어 언제 잡수세요”라고 물었다. 할아버지는 “이 나무를 심는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너를 위한 것이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느덧 그때 할아버지의 나이가 된 강명규 장로는 어릴 때는 몰랐으나 사람은 항상 지향적인 의지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그는 “몸이 아프고 늙고 지식이 없어서 못한다고 스스로에게 이야기 하면 아무것도 못하게 된다. 내일 죽더라도 천년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후손들에게 이야기 해 주고 싶다”고 말했다.
한 분야에서 경지에 이른 다는 것은 존경받을 만한 일이다. 그가 무도인의 길을 통해 깨닫게 된 인생철학을 듣고 싶었다. 태권도 10단이 말하는 삶의 궁극 목표는 무엇일까? 그는 ‘감사’라고 답했다.
인터뷰를 마치며 강명규 장로은 “때로는 지갑에 5불이 없어 ‘주님 점심 먹을 돈이 없습니다’”라고 주님께 말하기도 한단다. 그러나 “없어도 만족하며 감사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주님이 주신 신앙의 지혜이다”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강명규 관장의 초연한 뒷모습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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