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기자이자 평론가인 브랜든 쇼월터 기자의 기고글인 '찰리 커크의 죽음이 드러낸 복음주의 교회의 정치적 침묵'(What Charlie Kirk's death exposed about Evangelical political silence)을 9월 9일 게재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1년 전인 9월 10일 발생한 찰리 커크의 암살 사건은, 기독교인이 정치와 공적 영역에 어떻게 참여해야 하는가를 두고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온 논쟁을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 논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 문제의 핵심은 단순하지 않다.
신학적으로 정통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많은 복음주의자들은 최근 몇 년간 "복음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며 정치를 초월한다"고 강조해 온 일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껴왔다. 물론 그 주장에는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다. 복음은 어느 정당의 정치 강령으로 환원될 수 없고, 교회가 특정 정치 세력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일부 복음주의자들은 이런 원칙이 현실에서는 특정 문화적·도덕적 문제를 회피하는 명분으로 사용돼 왔다고 느낀다. 특히 대학과 언론, 문화산업, 교육계 등 사회의 주요 문화 형성 기관들이 특정한 정치·문화적 방향으로 기울어 있다고 보는 이들에게, 교회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중립' 요구는 오히려 일방적인 침묵처럼 느껴질 수 있다.
일부에서는 이런 접근을 '제3의 길(third wayism)'이라고 부른다. 지지자들은 좌우 어느 진영에도 종속되지 않고 복음의 관점에서 공공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건강한 기독교적 태도라고 주장한다. 반면 비판자들은 제3의 길이 실제로는 양쪽 모두를 비판한다고 말하면서도, 보수 진영의 잘못에는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반면 진보 진영의 문제에는 상대적으로 침묵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한다.
또 다른 형태의 입장은 더욱 단순하다. "우리는 정치에 관여할 필요가 없다. 복음을 믿고 전하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이런 주장 가운데 어디에 서든, 찰리 커크라는 인물이 이 논쟁을 피해 갈 수 없게 만든 것은 분명하다.
커크는 대학 학위 없이 독학으로 자신의 정치 활동을 구축했고, 미국 대학 캠퍼스를 직접 찾아다니며 젊은이들과 논쟁했다. 그는 확고한 보수적 입장을 취했고, 여러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기독교 신앙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그의 방식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그는 정치와 문화의 논쟁적인 영역에서 신앙적 확신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활동은 정치적 충돌을 최소화하고 보다 온건한 방식으로 문화에 참여하려 했던 일부 복음주의 지도자들의 접근과 뚜렷한 대조를 이뤘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그 차이를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켰다. 필자는 이 문제 안에 분명한 긴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정치 집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교회의 예배가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을 위한 선거 집회로 변해서는 안 된다.
복음을 당파 정치와 지나치게 결합하는 데 대한 우려는 충분히 타당하다. 정치와 사역이 뒤섞일 경우 교회의 사명이 왜곡되고, 특정 정치 지도자나 정당에 대한 충성이 신앙적 충성과 혼동될 위험도 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진 경우도 있으며, 그럴 때 교회는 자신의 우상숭배적 태도를 돌아보고 회개할 필요가 있다.
목회자와 장로들이 감당하는 부담 역시 가볍지 않다. 매주 쏟아지는 뉴스와 사회적 논쟁 하나하나에 대해 즉각적인 입장을 밝히고 설교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지혜롭지 않을 수 있다. 정치적 문제를 다루는 방식 하나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불필요하게 갈라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회적 논쟁을 강단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반대편의 오류도 존재한다. 정치적 논쟁을 피하는 것 자체를 곧 경건이라고 생각하는 태도다.
필자는 찰리 커크의 삶과 죽음이 많은 사람에게 바로 이 질문을 던졌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정치적 당파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유로, 정작 공적인 도덕 문제에 대해서까지 침묵해야 하는가.
어떤 교회에서는 "우리는 정치를 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전합니다"라는 태도가 이상적인 신앙처럼 받아들여진다.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하며 가난한 사람을 섬기지만, 사회적으로 논쟁적인 문제에는 가능한 한 발을 들이지 않는 방식이다.
표면적으로는 매우 경건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이런 태도가 책임 있는 분별이라기보다 어려운 문제와 마주하기를 피하는 방식이 될 수도 있다.
침묵도 하나의 선택이다
교회가 모든 정치적 문제에 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침묵한다고 해서 반드시 중립적인 것도 아니다.
특정한 사회적 문제로 교인들이 직접 고통받고 있는데도 교회가 그것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면, 그 침묵 자체가 하나의 메시지가 될 수 있다.
필자는 최근 몇 년간 성별과 젠더, 의료적 전환, 부모의 권리와 교육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지켜보면서 이런 고민을 반복해서 하게 됐다.
이 문제들은 매우 복잡하며, 당사자들의 경험 역시 다양하다. 따라서 이를 다룰 때는 정확한 의학적 정보와 세심한 목회적 배려가 필요하다. 트랜스젠더 개인을 하나의 정치적 상징이나 적대적인 집단으로 취급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가 생물학적 성, 인간의 몸, 부모와 자녀의 관계, 미성년자에게 적용되는 의료적 개입의 윤리성 등에 대해 성경적·도덕적 판단을 아예 포기해서도 안 된다.
필자는 자녀의 성별 정체성 문제와 의료적 결정 때문에 깊은 갈등과 고통을 겪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여러 차례 접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다. 진지한 신학적 성찰과 정확한 정보, 실제적인 목회적 도움이다.
그러나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문제를 지나치게 논쟁적이라는 이유로 사실상 피하려 했다. 무엇을 말하든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때로는 무엇을 말하지 않는 것 역시 도덕적인 선택이 된다.
'상냥함'과 용기는 서로 반대말이 아니다
복음주의 문화에서 '상냥함(winsomeness)'은 오랫동안 중요한 미덕으로 강조돼 왔다. 상대를 모욕하지 않고, 친절하게 말하며,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공정하게 이해하려는 자세는 분명 기독교적 덕목이다.
문제는 상냥함이 진실을 말하지 않는 명분으로 바뀔 때다. 그리스도인은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신념을 숨길 필요가 없다. 반대로 자신의 신념을 말하기 위해 상대의 존엄을 짓밟을 필요도 없다.
필자에게 필요한 것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아니다. 진실과 사랑을 동시에 붙드는 것이다. 때로 기독교 문화 안에서는 '뉘앙스'와 '온건함'이 마치 가장 높은 수준의 도덕적 성숙처럼 취급될 때가 있다. 그러나 어떤 문제에서는 지나친 모호함이 오히려 책임 회피가 될 수 있다.
잘못이라고 믿는 것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동시에 그 말을 듣는 사람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찰리 커크의 죽음 이후 달라진 사람들
찰리 커크 암살 1주기를 맞으며 필자는 최근 여러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특히 남성들이 많았고, 그중 일부는 생전 커크의 정치적 견해나 활동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공적 문제에 참여하는 태도가 달라졌다고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정치적 견해가 무엇이든, 한 사람이 공개된 장소에서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는 장면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충격을 남긴다. 사건 이후 온라인 공간에서 그의 죽음을 조롱하거나 가볍게 소비하는 반응들이 나타났다는 사실 역시 일부 사람들에게 강한 불쾌감과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필자에게 반복해서 한 말은 비슷했다.
이제는 중요한 문제에 대해 단지 논쟁을 피하기 위해 침묵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무조건 공격적으로 행동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하지 않고 말해야겠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이 반응을 이해한다. 그러나 동시에 한 사람의 범죄와 특정 사회집단이나 정치적 사상 전체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범죄자의 개인적 배경이나 관계, 온라인 활동이 무엇이었든 그것만으로 광범위한 집단 전체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하다.
정치적 폭력은 어느 방향에서 발생하든 단호하게 거부돼야 한다. 그럼에도 커크의 죽음이 많은 기독교인에게 던진 질문은 남는다: "두려움 때문에 침묵하고 있지는 않은가?"
윌버포스가 던지는 오래된 질문
이 대목에서 필자는 2006년 영화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영국 의회에서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싸우면서, 정치에 남아 싸워야 할지 아니면 보다 직접적인 종교적 사역에 헌신해야 할지를 고민한다.
그때 한 동료가 그에게 말한다 "당신은 그 두 가지를 모두 할 수 있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이 장면이 주는 질문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기독교 신앙과 정치 권력을 결합하는 것은 위험하다. 교회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거나 특정 정당을 하나님의 도구처럼 취급하기 시작하면, 신앙은 쉽게 권력의 언어로 변질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위험을 피하겠다는 이유로 공적인 악과 불의에 대한 모든 발언을 포기하는 것도 성경적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노예제 폐지 운동을 생각해 보라.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윌버포스와 노예제 폐지론자들에게 "이 문제는 너무 정치적이니 조금 더 조심스럽게 말하라"고만 조언했다면 과연 그것이 더 경건한 선택이었을까?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정치에 참여하느냐 참여하지 않느냐의 단순한 이분법이 아니다. 어떤 방식으로 참여하며, 무엇에 충성하고, 어떤 기준으로 권력을 판단하느냐가 중요하다.
교회의 침묵은 언제 경건이고 언제 비겁인가
찰리 커크의 삶과 죽음이 복음주의 교회에 남긴 가장 중요한 질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일지도 모른다.
언제 침묵해야 하고, 언제 말해야 하는가? 성경은 두 가지 모두를 가르친다. 말할 때가 있고 잠잠할 때가 있다. 그러나 침묵이 언제나 지혜로운 것도 아니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언제나 용기인 것도 아니다.
교회가 특정 정당의 선전기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동시에 정치적 논란을 피한다는 이유로 인간의 존엄과 생명, 가족, 정의와 같은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목회자들은 당파적 선동가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리를 공적인 삶과 전혀 연결하지 못하는 사람으로 남아서도 안 된다. 그리고 그 기준은 좌파냐 우파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정당이나 정치인도 성경적 검증에서 면제될 수 없다. 보수적 정치 세력이 잘못하면 비판해야 하고, 진보적 정치 세력이 잘못해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의 궁극적인 충성은 어느 정당에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커크의 죽음은 그 사실을 다시 불편하게 상기시켰다.
복음은 정치보다 크다. 그러나 복음이 정치보다 크다는 사실이, 정치와 문화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에 대해 침묵하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이 더 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어떤 정치 세력에도 완전히 예속되지 않은 채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랑을 잃지 않으면서도 진실을 말하고, 진실을 말하면서도 사람의 존엄을 잃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지금 복음주의 교회가 다시 배워야 할 공적 용기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