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야기를 하나 지어 보자. 2023년 봄,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는 한 젊은 스타트업 대표가 어느 교회 청년부 특강에 섰다. 그는 잠시 성경을 흔들어 보이더니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훌륭한 고전입니다. 그런데 GPT-4가 나온 이 시대에, 3,000년 된 책으로 오늘을 살아가라고 하면 정말 말이 됩니까?” 얼핏 그 말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이 질문에는 중요한 전제가 숨어 있다.
그런데 바로 그 GPT-4를 만든 회사, OpenAI의 AI 연구 과정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거대언어모델이 인간의 감정·윤리·서사 구조를 학습할 때 가장 밀도 높게 참고한 텍스트 중 하나가 성경이라는 것이다. 스타트업 대표의 말을 다시 뒤집어 놓으면 이렇게 된다. ‘구형을 폐기하기 위해 만든 기술이, 정작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 그 구형에 기대고 있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증거다.
성경은 정말 낡은 책인가? 이 질문은 신앙의 문제이기 이전에, 지성의 문제다. 어떤 텍스트가 시대를 건너 계속 읽히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단순한 문화적 관성이 아니라, 그 책이 ‘여전히 정확한 질문’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아무리 빠르게 변해도 이상하리만치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사람은 여전히 사랑받고 싶어 하고, 배신당하면 무너지고,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 권력을 가진 자는 더 원하고, 불의는 그럴싸한 명분 뒤에 숨는다. 기술이 바뀌고 언어가 바뀌어도 인간의 본성과 조건은 놀랍도록 일정하다. 성경은 바로 이 ‘변하지 않는 것’을 다룬다.
가인이 질투로 아벨을 죽인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이것은 단순한 고대 설화가 아니다. ‘비교에서 태어난 분노가 어디까지 가는가’에 대한 인류 최초의 케이스 스터디다. 소셜 미디어가 타인의 성공을 초 단위로 전시하는 오늘날, 정신건강의학과에서는 SNS 사용과 우울·분노의 상관관계를 반복적으로 보고하고 있다. 창세기 4장은 그 메커니즘을 알고리즘 이전에 이미 해부했다.
“오래되었다고 다 옳은가?”라는 질문은 정당하다. 역사 속에서 폐기된 사상들도 적지 않다. 솔직히 말하자면, 성경 역시 흑인 노예제 옹호와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데 오남용된 역사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텍스트의 결함이 아니라, 텍스트를 권력의 도구로 삼았던 독자들의 배반이었다. 폐기된 사상들은 대부분 특정 시대의 권력 구조를 정당화하는 데 복무했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 권력이 무너지자 근거도 함께 사라졌다. 반면 성경의 핵심 윤리, 곧 약자를 먼저 돌보라는 것, 권력은 섬김이라는 것,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어떤 시대의 지배 질서도 편안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것은 제국 로마에서 불온했고, 중세 교권에서도 불편했으며, 오늘날 성과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불편하다. 어느 시대도 그것을 완전히 길들이지 못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 메시지의 초역사성을 반증한다.
예수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했을 때(요한 8:32), 그 진리는 추상적 명제가 아니었다. ‘어떻게 서로를 대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해 사는가’에 대한 선언이었다. 이 질문은 소크라테스도 물었고, 칸트도 물었고, 오늘 밤 로스앤젤레스의 누군가도 잠 못 이루며 묻고 있다. 나 역시 오랫동안 이 질문 앞에서 머물렀고, 그 물음에 답해 온 성경의 언어가 여전히 가장 정직하다고 느낀다. 시대가 달라도 질문이 같다면, 그 질문에 정면으로 맞서 답을 살아낸 삶의 이야기는 여전히 살아있는 것이다. 진리가 낡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다루는 질문이 낡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정보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지혜의 가뭄’을 호소한다.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처리하지만 ‘왜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 사람에게 답을 주지 못한다. ChatGPT에게 “내가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으면, 통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이 동의한 답을 돌려줄 뿐이다. 그러나 성경은 다수결로 진리를 결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다수가 틀렸을 때 홀로 다른 방향을 가리켰던 목소리들의 기록이다. 그 목소리는 지금도 우리에게 묻는다. 너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네 옆의 사람을 오늘 어떻게 대했는가.
그 스타트업 대표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3,000년 된 책으로 오늘을 살아가라고 하면 말이 됩니까?” 이렇게 답할 수 있다. 인간이 계속 사랑하고, 배신당하고, 용서를 구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말이 된다. 아니, 그 어떤 최신 버전보다 더 정확하게 말이 된다. “사랑하라. 정의를 행하라.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걸으라”(미가 6:8). 이 문장은 3,000년 전에 쓰였다. 그리고 오늘, 이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을 향하는 언어를 나는 아직 찾지 못했다.
스마트폰은 3년마다 구형이 된다. 그러나 진리는 구형이 없다. 진리는 처음부터 완성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