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로버트 F. 코크런 주니어의 기고글인 'MAGA(메이크 아메리카 그레이트 어게인) 기독교인들의 다음 행보는 무엇인가?'(What's next for MAGA Christians?)를 최근 게재했다.
로버트 F. 코크런 주니어(Robert F. Cochran, Jr.)는 페퍼다인 대학교 로스쿨의 루이스 브랜다이스 명예교수이다. 그는 60편이 넘는 논문과 10권의 저서를 출간했으며, 대표작으로는 《기독교적 관점에서 본 법사상》(Yale University Press), 데이비드 반드루넨(David VanDrunen)과 함께 집필한 《법과 성경》(InterVarsity Press, 2013), 그리고 재커리 칼로(Zachary Calo)와 공저한 《아가페, 정의, 그리고 법》(Cambridge University Press)이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찰리 커크(Charlie Kirk)는 최근 한 대학 캠퍼스의 공개 포럼에서 청년들과 대화하던 중 피살됐다. 그의 장례식에서 여러 인사들이 메시지를 전했다. 아내 에리카 커크(Erika Kirk)는 남편을 살해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를 용서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며, 찰리가 했을 일입니다. 증오의 해답은 증오가 아닙니다. 복음이 말하는 해답은 언제나 사랑입니다. 원수까지도, 우리를 박해하는 자들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연단에 올랐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찰리는 자신의 반대자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들에게도 최선을 원했습니다. 그 점이 찰리와 내가 달랐던 부분입니다. 저는 저를 반대하는 자들을 미워합니다. 그들에게 최선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제 에리카와 여러분이 저를 설득해볼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저의 반대자를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이 두 사람의 극명한 대조는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질문을 던진다. 개인의 신앙은 공적 삶과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쳐야 하는가? 사랑과 용서인가, 아니면 증오와 보복인가? 오늘의 거친 정치 세계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역할은 무엇인가?
역사를 돌아보면, 기독교인들은 문화와 정치에 대해 다섯 가지의 상이한 접근법을 취해왔다. 그것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어떤 길을 택해야 할지를 가늠하게 한다.
1. 분리주의자(Separatists)
필자는 침례교회에서 자라며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강조하는 가르침을 받았다. 정치란 "세속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투표는 하더라도, 우리의 본분은 "천국에 가는 것이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그 길로 이끄는 것"이라는 말이 반복되었다.
로저 윌리엄스(Roger Williams)는 교회와 국가 사이의 "분리의 벽"을 주장했다. 그는 "세상의 황무지로부터 교회의 정원을 보호하기 위해" 그것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시간이 흐르며 이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의 부르심과는 모순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변혁주의자(Conversionists)
변혁주의자들은 세상 속으로 들어가 복음의 가치로 문화를 변화시키려 한다. 그들은 창세기 2장과 시편 8편에서 "다스림의 소명"을 읽어낸다. 찰리 커크 역시 이런 접근을 취했다. 그는 대학 캠퍼스에서 "나를 반박해보라(Prove Me Wrong)"라는 공개 토론을 열며 사람들과 직접 부딪혔다. 필자는 그의 모든 견해에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동의하는 사람끼리만 말하는 시대에 그는 대화의 장을 열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역사적으로 이 노선을 대표하는 인물은 존 칼빈(John Calvin)이었다. 그는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극장"이라고 말했다. 법의 목적은 "이웃 사랑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칼빈의 사상은 미국 건국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은 "언덕 위의 도시"를 세워 온 세상의 빛이 되려 했다. 물론 이들은 로저 윌리엄스를 추방하는 등 경직된 면도 있었지만, 노예제 폐지·아동 노동 금지·시민권 운동 같은 정의의 운동을 주도한 것도 이 노선의 유산이다.
3. 종합주의자(Synthesists)
종합주의자들은 세속 문화와 기독교적 가치를 조화시키려 한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결합시켰다. 그는 "이성"을 통해 인간이 번영할 도덕법을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전통은 미국 건국 시기에도 나타났다. 기독교인, 유신론자, 계몽주의자들이 오랜 대화를 통해 헌법의 기초를 놓았다. 찰리 커크의 공개 토론 역시 이런 "대화적 종합주의"의 현대적 실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길은 상대방의 진지한 성찰과 존중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오늘날처럼 분열된 사회에서 이런 대화가 가능할까? 필자는 여전히 가능하다고 믿고 싶다.
4. 이원론자(Dualists)
이원론자들은 기독교 신앙과 세속 세계의 가치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본다. 그러나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 마르틴 루터는 이런 입장을 대표했다. 그는 통치자들에게 "그리스도께 묻지 말고 세속 법률에 따라 다스리라"고 말했다.
오늘날 이원론자들은 교회에서는 에리카 커크의 사랑을 따르되, 정치에서는 트럼프의 증오 방식을 따르는 사람들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신앙과 정치를 분리하면, 결국 정치적 증오가 가정과 신앙의 영역으로 스며든다.
예수는 이런 이중적 삶을 지지하지 않았다. 그분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사랑에 달려 있다"(마 22:40)고 가르치셨다. 사랑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법과 행동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5. 문화순응자(Culturalists)
마지막 부류는 가장 위험하다. 이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시대정신에 맞게 왜곡한다. 토머스 제퍼슨은 신약성경에서 "이성에 반하는" 구절을 칼로 잘라냈다. 그렇게 만들어진 "제퍼슨 성경"에는 초자연적 예수가 사라지고, 계몽주의적 도덕교사만 남았다.
오늘날에도 일부 기독교인들은 세속 문화의 방식을 "기독교적"이라 포장한다. 정치 권력을 얻겠다는 명분 아래 세상의 방법을 답습한다. 이때 기독교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기독교를 변화시킨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는 "이 세상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야 한다"(롬 12:2).
결론: 사랑의 법, 공공의 책임
필자는 하나님께서 "섬기는 자로 다스릴" (마 20:20-28) 지도자들을 세워주시기를 기도한다. 또한, 정치와 법이 예수의 중심 도덕 기준인 '이웃 사랑' (막 12:31)을 반영하기를 소망한다.
기독교인의 정치 참여는 특히 "과부, 고아, 나그네, 가난한 자"(슥 7:10) 를 위한 정의의 행위여야 한다. 미국은 지금 극도로 분열되어 있다. 필자는 때때로 이 나라가 버텨낼 수 있을지 두렵다. 정치적 복수의 악순환이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누군가가 다른 뺨을 돌릴 때까지"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에리카 커크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 말이 진심이 되길 기도한다. 그리스도의 빛과 이웃 사랑이 우리의 정치 속에서도 드러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