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그렉 로리 목사의 기고글인 '마지못해 하는 전도사들에게: 하나님은 자격을 갖춘 사람을 부르지 않으신다'(Dear Reluctant Evangelist: God doesn't call the qualified)를 1일 게재했다.
로리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 단체인 하베스트(https://harvest.org) 설립자이자 목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베스트셀러 작가, 영화 감독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이야기 하나로 시작하고자 한다. 때로는 가장 깊은 진리가 농담처럼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느 날 경찰이 한 남자를 세우더니 뒷좌석에 있는 펭귄 두 마리를 보고 말했다. "선생님, 이렇게 멸종위기 동물을 데리고 다니면 안 됩니다. 동물원에 데려다 주세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 그런데 다음 날? 같은 남자, 같은 펭귄. 이번에는 펭귄들이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경찰이 말했다. "동물원에 데려다 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남자가 대답했다. "데려다 줬어요. 오늘은 해변에 가는 길이에요."
웃긴 이야기지만, 동시에 아프게 다가온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렇게 살고 있기 때문이다. 찬양하고, 섬기고, 공부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여전히 복음이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할지 고려해 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가라"고 하셨다.
그런데 연구에 따르면, 그리스도인의 95%가 한 번도 누군가를 그리스도께 인도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지난해 비신자 친구를 교회에 초대한 사람은 2%에 불과했다. 우리는 기꺼이 타코 트럭, 넷플릭스 시리즈, 헬스장 앱을 추천하지만, 예수님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입을 다문다.
왜 그럴까?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 때문에 입을 다문다. 거절은 아프다. 정죄하거나 강압적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다. 하지만 혹시 상대가 불쾌해하기는커녕 감사해한다면? 소망을 갈망하고 있다면?
또 어떤 사람들은 불안 때문에 입을 다문다. 질문을 받으면 대답을 못 할까봐. 하지만 진실은 이렇다. "모르겠다"고 말해도 괜찮다. 우리는 논쟁에서 이기려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얻으려는 것이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은 이렇게 말한다.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하라." 이것이 전도의 기본이다. "이기려거든, 먼저 매력적이어야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들 이미 들었겠지"라고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이다. 성경적 문맹이 새로운 표준이 됐다. 최근 독일에 갔을 때, 인구의 2%만이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 했다. 미국에서도 절반 이상의 성인이 신앙 대화에 열려 있다고 말한다. 친구나 가족 사이에서는? 90%가 넘는다.
필자도 그런 사람이었다. 방황하던 시절, 그리스도인들은 필자를 피했지만, 전도지를 건네주는 사람은 붙잡았다. 전도지가 더 필요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설명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불편한 진실 하나가 있다면 우리 중 일부는 사실 관심이 없어서 말하지 않는다 것이다. 불신자를 포로가 아닌 적으로 본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2장 26절은 그들이 마귀의 올무에 잡혀 있다고 말한다. 포로지만 소망 없는 존재는 아니다.
무신론자 펜 질레트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천국과 지옥을 믿는다면, 전도하지 않는 것은 그 사람을 증오하는 것이다."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요나서를 보자. 요나는 실패가 두려웠던 것이 아니다. 성공할까봐 두려웠다. 하나님이 "니느웨로 가라"고 하셨을 때, 그는 "싫어요"라며 정반대 방향의 배를 탔다. 니느웨는 단순히 영적으로 길을 잃은 도시가 아니었다. 폭력적이고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 고대의 ISIS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선지자를 보내셨다. 요나는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실까봐 가기 싫었던 것이다.
결국 바닷속 물고기 뱃속에 들어간 후, 요나는 가서 단 한 문장만 외쳤다. 그러자 도시 전체가 회개했다.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부흥 중 하나는, 가장 마지못해 간 설교자를 통해 일어났다. 익숙한 이야기 아닌가? 어쩌면 캘리포니아가 우리의 니느웨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떠나고 있다. 비싸고, 혼란스럽고. 하지만 필자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예수 운동(Jesus Movement)은 여기서 시작됐다. 하루에 4,500명이 세례를 받았다. Harvest Crusade? 여전히 여기서 열리고 있다. 하나님은 다시 하실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을 통해서도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예상 밖의 사람들을 부르셨다. 모세는 말이 어눌했다. 예레미야는 너무 어렸다. 베드로는 예수를 부인했다. 나사로는? 죽어 있었다.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자격 있는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자를 자격 있게 하신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데는 기쁨이 있다. 시편 126편은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둔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한 죄인이 회개할 때 하늘에 기쁨이 있다고 하셨다. 필자가 아는 가장 행복한 그리스도인들은 SNS에서 신학 시비를 가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눈물로 잃어버린 영혼을 사랑의 음성으로 부르는 사람들이다.
요나의 이야기는 경고이기도 하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그는 점점 더 '내려갔다.' 욥바로, 배 안으로, 바다로, 물고기 뱃속으로, 그리고 깊은 곳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항상 값비싸고, 고달프다. 어쩌면 이 메시지는, 당신이 전도해야 할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 주신 부르심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지는 않은가? 두려움, 피로, 좌절 때문에 순종의 소리를 묻어버리진 않았는가?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크고 아름답다.
예수님은 "가라"고 하셨다. 당신은 "싫어요"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제가 여기 있습니다 주님. 저를 보내소서"라고 할 것인가? 세상은 상처받아 있다. 복음은 강력하다. 추수할 때는 지금이다. 망설이지 말고 순종하며 나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