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트하우스선교회 대표 박광철 목사
(Photo : 기독일보) 솔트하우스선교회 대표 박광철 목사

7. 영적 리더에 대한 도전

요즘에는 교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 일종의 출세와도 같고 그와 함께 경제적인 혜택이나 특권도 따라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서 큰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면 매월 상당한 금액의 사례금을 받고 또 목회 활동비를 포함하여 여러 항목의 경제적 도움을 받는다. 그래서 좀 크다고 알려진 교회에 목회자 자리가 나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으로 지원서를 내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다수의 지원자들은 큰 교회에서 여러 모로 좋은 대우를 받고 명예까지 거머쥐고 싶은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 교회와 사도 바울 시대에 교회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곧 고난을 자처하고 생명의 위협을 받으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종의 위험한 위치에 처하는 것이다. 즉 당시 교회의 지도자가 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유대교와 외부 세력의 박해와 고난을 감수하겠다는 불타는 열정을 가진 것을 의미했다. 결코 더 높은 자리나 좋은 대우 또는 권위를 갖는 자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예수의 두 제자는 주님이 훗날에 영광을 받으시면 자기들을 주님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있다. 만일 그런 자리가 있다면 그것은 누구보다도 더 막중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지도자의 자리이다. 그런데 이 두 제자는 섬기려는 마음이 아니라 섬김을 받으려는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마 10:42-44). 지금도 몇몇 나라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와 공격이 심하기 때문에 지도자가 된다는 말할 때에 그것은 많은 위험과 도전을 감수하겠다는 어려운 결단을 요구하고 있다.

영적 리더십에 관한 고전적인 책을 집필한 오스왈드 샌더스의 저서 가운데 소개된 어느 무명씨의 글이 나의 마음을 깊이 두드렸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들은 커지려고 하기에 주님은 작아지셨다. 우리는 허리를 굽히지 않기에 주님은 스스로 낮아지셨다. 우리는 다스리려고 하기에 주님은 섬기려고 오셨다." 진정한 영적 리더십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다.

모든 전도자는 영적 전쟁터에 나선 십자가의 군병이다. 한가한 소풍이나 캠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의 불화살이 쏟아지고 세상 유혹이 사방에서 파고드는 영적 싸움의 현장에 나서는 것이다. 특히 마귀는 일반적인 성도 수 십 명보다는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목사나 선교사들 등의 영적 지도자를 과녁으로 삼고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지도자 한 사람을 넘어뜨리면 그에게 배우고 추종하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넘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도자에게는 일반인들이 겪지 않는 남다른 도전들이 있을 수 밖에 없다. 실제로 전쟁에서도 사병들보다 지휘관을 먼저 공격하면 그 부대의 존립이 흔들린다. 예수님의 재림 전까지 우리의 영적 전쟁은 계속될 것이며 천국에 가서야 비로소 모든 수고가 그친다. 현대 교회들이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도전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1) 변화하는 문화

현대 사회는 점차 더욱 하나님을 대적하는 문화가 팽창하고 있다. 미국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도 마찬가지이다. 미국은 이미 "동성 결혼 합법화"가 대법원에서 결정되었다. 그로 인해서 가정이 더욱 무너지고 있다. 그리고 목사가 동성결혼 주례를 거부하면 법적 소송에 걸린다. 어느 제과점 주인은 동성결혼자의 결혼 케익 제작을 거부했다가 법적 소송에 휘말려서 많은 고생을 했다. 모두 개인의 인권보호라는 명목으로 행해지고 있다.

우리는 현실적인 문화를 무조건 거부하고 살 수는 없다. 성도라도 이 세상을 벗어나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항상 대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살면서 복음의 능력으로 그것을 변화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변화하는 문화 속에 살지만 문화에 동화되지 않아서 흙탕 물 속에도 맑은 물을 내는 샘이 되어야 한다. 진흙 구덩이에서 자라지만 깨끗한 연꽃을 생각해 보라.

이제는 공예배가 마치 록 음악회가 열리는 콘서트 장처럼 되어서 조명이 요란하고 기타 음악이 귀를 찌르는 곳이 적지 않다. 이제는 교회 예배에서 전통적인 찬송가를 부르는 것이 흔치 않고 다만 새로운 복음송가와 현대적인 찬송이 훨씬 많다. 어느 교회의 예배에서는 처음부터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가스펠 송을 부르니 연령이 많은 회중은 거의 따라 하지 못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예배 마지막에 전통적인 찬송을 부르니 그제서야 따라 하는 것이다. 그런 최근 "유행하는" 노래를 부르고 음악을 연주해야 젊은이들이 관심을 보이고 모인다는 것인데, 감정적인 호감을 살 수는 있어서 실제로 깊은 영적 변화를 받기가 어려워 보인다. 우리가 오랜 전통만 고수할 수는 없지만 사탄적인 요소가 섞인 현대 문화에 대해서는 특히 조심해야 한다.

2) 교회의 세속화

전에 한국에서는 대개 나무로 된 마루 바닥에 방석을 깔고 예배드리고 새벽에도 거기에 엎드려 기도했다. 무릎을 꿇어야 하기 때문에 힘들었지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것이므로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교회당에 편안한 의자가 들어오면서 앉아서 예배하는데 점차 더 편안하고 안락한 것을 찾는다.

교회당 시설도 극장 형태가 되었고 음악과 영화와 연극도 예배의 한 부분이 되었다. 모두 복음을 전하기 위한 보다 효과적이며 현대적인 방편이기 때문에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자칫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의 경건성을 상실하고 편리성만 강조하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이런 것들보다 심각한 문제는 교회 자체를 하나의 기업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영적 최전선이 아니라 사람들을 많이 모으고 규모를 확장하여 세력을 갖추는 일종의 "종교적 기업 집단"이 되는 것이다. 미국의 모 교회에서는 어느 장로가 교회의 "사장"(CEO)이라고 정부에 등록하고 그들이 중심이 되어 담임 목사를 고용하거나 해임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래서 일부 목사는 목회를 생명을 구하는 복음 사역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인 일을 하는 직업으로 생각하고 월급을 챙기며 사례가 더 좋은 곳이 있으면 쉽게 옮기게 되는 것이다.

세속화는 세상과 닮아간다는 의미이다. 성경은 성도가 세상을 본받지 말라고 말하지만 현실적으로 세상의 흐름과 역류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세상은 하나님과는 반대의 길로 달리고 있다.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요일 2:16). 사회적 교제를 위해서 취하지 않을 만큼 술을 마시고 음담패설도 하며 세상에 빨려 들어가는 성도들이 적지 않은 것은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