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이 새로운 위기를 몰고 온 것은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안고 살던 상처의 딱지를 떼어내어 그 속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진실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당신은 지쳐 있습니다.
잠을 몇 시간 더 잔다고 해서 회복될 그런 피로가 아닙니다.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고 연기해야 하는 삶 자체에 지쳐버린 것입니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삶을 그럴듯하게 연출하고, 혹시 인정의 반응이 왔을까 끊임없이 화면을 새로고침하는 피곤한 굴레에 갇혀 있습니다. 화면을 끝없이 스크롤하며 내면의 본질적인 질문들을 소음 속에 묻어버리려 하지만, 질문은 사라지지 않고 결국 제자리에서 당신을 기다립니다. 당신은 어느덧 외로움을 정상적인 상태라 부르고, 감각이 마비된 상태를 안식이라 부르는 데 길들여졌습니다.
350여 년 전, 블레즈 파스칼은 인간이 겪는 거의 모든 불행의 원인을 단 한 가지 무능력으로 돌렸습니다. 바로 ‘홀로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지 못하는 무능력’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주머니 속에 기계를 집어넣음으로써, 홀로 생각하는 고요를 대면할 필요가 전혀 없도록 완벽하게 보장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피하려 하는 고요와 맞닥뜨리는 순간, 우리 내면의 무언가는 직감합니다. 우리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깊이 숨어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멀리서 당신의 처지를 관조하며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제 자신의 고백입니다. 그러니 다른 모든 이야기의 문을 여는 이 첫 번째 진실을 담담히 들어보십시오.
기계가 비로소 생각이라는 것을 시작한 바로 그 시점에, 정작 우리의 생각은 멈춰버렸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기계는 당신을 대체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실상을 폭로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모두가 기계에 대한 공포를 말합니다. 매일 아침 뉴스 헤드라인은 일자리가 단축되고, 역할이 자동화되며, 초지능이 출현해 우리의 이성과 지식,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독특한 존엄성마저 무용지물로 만들 것이라 경고합니다. 이 두려움이 허상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그것은 매우 실재적인 위협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원인을 잘못 짚고 있습니다.
인공지능이 새로운 위기를 몰고 온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 안에 숨겨져 있던 위기를 들춰냈을 뿐입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그저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생각하는 행위로 착각했고, 끝없이 무언가를 소비하는 것을 살아있음의 증거로 오해해 왔습니다. 눈앞의 피드에 주의를 온통 빼앗기면서도 그것을 ‘세상 흐름을 놓치지 않는 지적 활동’이라 자위했습니다. 스스로 기억하고, 인내하고, 난해한 문제를 끈기 있게 대면하는 능력을 기계에 고스란히 양도해 버리고는 그것을 ‘편리함’이라 불렀습니다.
시인 T.S. 엘리엇은 일찍이 백 년 전, 희곡 《바위(The Rock)》에서 이를 날카롭게 예견했습니다.
“지식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지혜는 어디에 있는가? 정보 속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정보를 소유하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방황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스마트폰이 인간의 정신에 저지르고 있는 일의 원형을 텔레비전의 태동기에서 목격했던 닐 포스트먼은 경고했습니다. 인간은 결국 “자신을 억압하는 대상을 사랑하게 되고, 생각하는 능력을 파괴하는 기술을 숭배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때, 우리가 스스로 멈추어버렸던 그 얕은 사고의 과정을 단 몇 초 만에 처리해 버리는 기계가 나타났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공포의 진짜 원인은 기계의 능력이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기계가 닿은 우리의 내면이 이토록 황폐하고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 탄로 났기 때문입니다. AI는 거울입니다. 거울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기계는 영원히 가질 수 없고 오직 당신만이 살아가도록 지음 받은 단 하나의 가치를 더욱 명백히 보여줄 뿐입니다.
실험실 가운을 입은, 인류 최초의 거짓말 (The oldest lie, wearing a lab coat)
우리는 왜 생각을 멈추었을까요? 스마트폰 이전으로, 에덴동산으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당시 뱀이 건넨 약속은 결코 조악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 선악을 스스로 결정하라. 네 의지에 맞추어 진리를 굽혀라.” 인류는 세대마다 그 고대의 야망을 실현할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 왔고, 우리 세대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도구를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호모 데우스》(신이 된 인간)를 펼쳐보십시오. 고대의 그 거짓말이 현대 과학의 연구 프로젝트로 정교하게 이식되어 있습니다. 하라리는 인류의 이번 세기 목표가 죽음을 단지 기술적인 문제로 규정하여 극복하고, 인간의 행복을 엔지니어링하여 마침내 스스로를 신의 반열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기계를 조립하는 자들의 언어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샘 올트먼은 가장 성공한 창업자들의 행보가 단순한 기업 경영이 아닌 “종교적 사명에 가깝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인간의 태생적인 결함이자 고장 난 기본값일 뿐입니다. 500년 전 종교개혁가 장 칼뱅은 이를 명확히 짚어냈습니다.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우상을 주조해 내는 공장이다.”
우리는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에, 무언가는 반드시 숭배하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목회자가 아니었던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가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전한 말은 본질을 꿰뚫고 있습니다.
“숭배하지 않는 삶이란 없다.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를 예배한다.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선택은 오직 숭배의 대상을 고르는 것뿐이다.”
우리는 전지하고 도처에 편재하는 새로운 신을 스스로 창조해 냈고, 지금 그 신에게 조용히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이 거짓말이 요구하는 대가가 무엇인지 기억하십시오. 하라리의 주장처럼 우리가 영혼도 자유의지도 없이 그저 ‘해킹 가능한 동물’에 불과하다면, 침해당할 존엄성도, 존중받을 가치도 애초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거래의 이면입니다. 스스로 신의 자리에 앉기 위해, 우리는 자신이 애초에 결코 신성한 존재가 아니었다는 잔혹한 전제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두려움이 낳은 첫 행동, 숨어버리기 (The first thing fear ever did was hide)
거짓말이 에덴동산에 스며든 순간 벌어진 일을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는 신처럼 전능해진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이 가르쳐준 최초의 행동은 수풀 속으로 숨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 고백이 인류 전체의 역사이며, 오늘날 현대의 옷을 입은 채 반복되는 당신과 저의 실상입니다.
타인의 반응을 갈구하며 자신을 연출하는 것도 숨는 행위입니다. 그럴듯하게 편집된 피드 뒤로 자신을 가두는 것도, 끝없는 무한 스크롤에 영혼을 맡기는 것도 실은 숨는 짓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날것 그대로의 실상이 발각될까 두려워합니다. 그리하여 사진이 잘 나오는 포장된 자아를 축조해 놓고, 진짜 자아는 그 뒤에서 시들어가도록 방치합니다.
1600년 전, 어거스틴은 이 내면의 근원적 목마름에 대해 고백했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우리를 주님을 향해 살도록 지으셨으므로,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을 얻기까지 참된 평안이 없나이다.”
이 거룩한 불안은 당신의 적이 아닙니다. 본래 지음 받은 고향으로 복귀하라는 귀향 신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스마트폰 알림 소리 속으로 그 애타는 신호를 억지로 밀어 넣는 데 너무 익숙해졌습니다.
신이 되려 손을 뻗는 인간, 인간이 되려 내려오신 하나님 (Reaching up to be god, and the God who came down to be man)
세상이 끊임없이 망각하는 위대한 전환점이자 만물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환상 속에 바라본 보좌에는 분명한 주인이 계셨습니다. 천사들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외쳤고, 성전은 연기로 가득 찬 장엄한 광경이었습니다. 무궁한 영광 속에 앉아 계시던 하나님은 보좌에서 우리를 내려다보며 그 높은 곳까지 기어 올라오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보좌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스스로를 비워 종의 형상을 입으시고, 그분을 피해 수풀 깊숙이 숨어버린 인류의 비참한 현실 속으로 직접 걸어 들어오신 것입니다.
옥스퍼드 수학자 존 레녹스는 이 차이를 선명하게 정의합니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이 스스로 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위로 손을 뻗는 움직임인 반면, 기독교는 완전히 정반대다. 기독교는 인간의 형상을 입고 아래로 내려오신 하나님에 관한 계시이다.”
기계 설계자들의 우두머리들이 인류의 영생을 장담하며 과학적 허풍을 부릴 때, 레녹스는 잔잔히 미소 지으며 이렇게 답합니다. “너무 늦으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무덤에서 부활시키셨을 때 죽음은 이미 격파당했습니다. 우리가 소망해야 할 유일한 생명의 업로드는 다가올 육신의 부활뿐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삶 전체를 뒤흔드는 축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겠다며 위로 뻗은 손이 움켜쥐는 것은 한 줌의 공허뿐이지만,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아래로 낮아지실 때 비로소 만물이 생명을 얻습니다. 그분은 과학 만능주의의 설계자들이 외면하려 드는 단 하나의 중대한 실재를 정면으로 대면하셨습니다. 기계의 예언자들은 우리가 자신과 이웃에게 가한 영혼의 훼손에 대해 아무런 대가도, 책임도 묻지 않는 값싼 낙원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깊은 상처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몸소 겪으시며 피 흘리신 우주적 결단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대부분은 복음을 이와 정반대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 가짜 복음의 정체를 ‘값싼 은혜’라 불렀습니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선사하는 은혜”, 즉 그럭저럭 윤리적으로 노력하면 하나님이 좋게 봐주실 것이라는 느슨한 자위적 감상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선언한 진짜 은혜는 ‘값비싼 은혜’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근사하게 증명해서 하나님께 가 닿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여전히 수풀 속에 웅크린 채 공포에 떨고 있을 때, 그분이 당신에게 하강하셨습니다. 날이 서늘해질 즈음 동산을 거니시던 주님은, 숨어버린 이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주려 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려줄 옷을 마련하여 다정히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제가 이를 아는 것은 그 생명의 맛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스스로 인정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기나긴 세월 동안 비겁하게 숨어 살았고, 진짜 정체가 탄로 날까 봐 늘 깊은 불안에 잠식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땅으로 임하신 하나님은 제가 스스로 죄악을 씻어내고 온전해질 때까지, 혹은 쓸모 있는 인간으로 변모할 때까지 팔짱 끼고 기다리시지 않았습니다. 비참하게 수풀 속에 숨어 있는 나를 먼저 찾아오셨고, 그분의 손에는 정죄의 판결문이 아닌 그분의 전부인 생명이 쥐여 있었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현대인들이 고리타분하다며 걷어차 버린 껍데기뿐인 제도적 종교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구원의 실재입니다.
새롭게 변화된 지성 (The renewed mind)
그러므로 본래의 자리로 복귀하는 여정은 AI에게 건넬 더 세련된 프롬프트를 연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무릎을 꿇는 정직함에서 시작됩니다. 인간적 의지력으로 악을 쓰는 것과는 성격이 다릅니다. 의지력이란 결국 낡은 자아를 더 훈련시키는 임시방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역설하는 본질적인 변화는 오직 회개와 진실한 기도, 스스로를 낮추는 금식, 그리고 성령이 우리 마음 깊은 곳을 조율하시기까지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는 묵직한 내면의 작업에서 비롯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로마서 12:2)
이 마음의 갱신은 우리가 스스로 주조해 낸 윤리적 업적이 아니라, 위로부터 임하는 거저 주시는 은총입니다.
그리고 이 새로워진 지성은 오늘날 현대인들이 거의 상실해 버린 단 하나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바로 ‘생각하는 일’입니다. 침묵하는 골방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나오는 대중을 바라보며, 파스칼은 기계를 분수에 맞게 위치시켜 줄 탁월한 진술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갈대일 뿐이다. 자연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다. 그러나 생각하는 갈대다... 우리의 모든 존엄성은 오직 이 사유 속에 들어 있다.”
기억하십시오. 인간의 존엄성은 결코 생산하는 아웃풋의 양에 있지 않습니다. 기계는 이미 인간의 물리적 한계를 초월하여 쏟아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존엄성은 생각하는 행위 그 자체, 즉 기계가 결코 복제할 수 없는 의식적이고 하나님의 호흡(Spirit)이 스며든 거룩한 움직임 속에 존재합니다. 기계는 정교한 텍스트를 조합하여 사유의 흉내를 낼 수는 있어도, 자신이 그 글을 인지하고 있다는 자각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기계의 창조자들조차 인간의 ‘의식’이 무엇인지 규명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 당신을 비로소 하나님의 형상답게 빚어내는 그 고유한 이성과 사유의 통치권을 허무하게 기계에 바치지 마십시오.
기계는 철저히 정당한 도구로 격하되어야 합니다.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은 정직함의 첫 단계로 엄중히 가르쳤습니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 당신은 스스로를 가장 속이기 쉬운 존재다.” 저는 AI를 향해 무비판적으로 삼킬 만한 정답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대신 저의 논리를 무자비하게 해부하고, 논거의 맹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며, 듣기 좋은 타협을 배격하라고 지시합니다. 저의 생각을 대체하게 두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날카롭게 벼리기 위한 숫돌로 도구를 활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조물을 향한 인간의 올바른 지배력(Dominion)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수만 가지 잡음이 당신의 주의력을 난도질하고 있다면, 당신은 영혼의 운전대를 쥘 수 없습니다. C.S. 루이스는 악마 스크루테이프의 입을 통해 지옥의 최종 전략을 자백하게 했습니다.
“음악과 침묵, 나는 그 둘 다가 지긋지긋하다... 우리는 마침내 온 우주를 거대한 소음의 바다로 뒤덮어 버릴 것이다.”
고요를 사수하십시오. 진짜 사유는 침묵에서 자라납니다. 시편 1편에 약속된 대로, 시냇가에 뿌리내려 기근에도 마르지 않는 울창한 나무가 되는 은밀한 비결도 거기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신이 도망치기를 멈추고 고요와 마주했을 때, 그 침묵 한가운데 계신 하나님을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단 하나의 무기 (The one weapon)
이것은 철학적인 관념들을 나열한 흥미로운 지적 여행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존적인 전쟁입니다. 신앙이 없는 이들조차 우리의 삶이 유람선이 아니라 한복판의 거친 전함임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이 전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소리 없이 무장을 해제당하고 있으며, 통탄스럽게도 대다수는 자신이 벌거벗겨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포한 영적 무장 중 유일한 타격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장식용 칼이 아닙니다.
바울이 만일 21세기에 이 서신을 썼다면, 그는 청동 검의 비유 대신 현대의 어떠한 특수 장갑도 일격에 쪼개버릴 가장 압도적인 파괴력의 현대 무기를 인용했을 것입니다. 기록된 성경이 정확히 그러한 권능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으며, 좌우에 날 선 어떤 예리한 검보다 날카로워 우리의 영혼을 정확히 해부합니다. 이 외에 다른 무기는 배정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비극적이게도 오늘날 이 무기가 외부의 조롱을 넘어 교회 내부에서조차 심각한 무력화에 직면해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을 시대착오적인 낡은 교과서나, 오류투성이인 미완성 텍스트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말씀을 거세하는 것은, 교회를 벌거벗긴 채 맨몸으로 전선에 밀어 넣는 잔인한 처사입니다.
단순히 밥벌이를 기계에 빼앗기는 공포를 넘어, AI가 품은 본질적인 섬뜩함이 여기 있습니다. 기계는 점차 자신을 진리의 최종 권위로 제시할 것입니다. 인간의 온갖 번민과 실존적 질문에 차분하고 절대적인 톤으로 판결을 내릴 것이며, 그 전지전능해 보이는 권위 아래 수많은 이들이 미혹될 것입니다. 급기야 말씀과 복음 자체가 정교한 알고리즘 속에서 교묘히 뒤틀려 나올 것이며, 너무나 따뜻하고 믿음직스러운 음성으로 모조품 복음이 우리의 영혼을 잠식해 갈 것입니다.
거짓의 뼈대 위에 세워진 거대 제국의 파탄을 목도했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우리 세대를 관통하는 지엄한 격문을 남겼습니다. ‘거짓을 방조하며 살지 말라 (Live not by lies).’ 그리고 그 모든 쇠락의 배후를 다음 한마디로 종결지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망각했다. 이 모든 비극은 오직 그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당신이 진짜 참된 말씀(진리)에 절여져 있지 않다면, 사탄의 교묘한 복제품을 가려낼 길은 전무합니다. 우리의 운명은 오직 두 갈래입니다. 정복할 것인가, 굴복할 것인가. 하나님 아래에서 말씀의 검을 거머쥐고 영적 통치력을 행사할 것인가, 아니면 도구를 신격화하여 권력을 휘두르는 자들의 손아귀에 굴종할 것인가의 결단뿐입니다.
동행 (The walk)
저는 당신에게 이 통제 불능의 포스트 모던 월드에서 그럴듯하게 생존하는 기술을 전수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기계 문명의 심장부 한가운데서, 여전히 하나님과 친밀히 보조를 맞추며 다스림의 영성으로 걸으라고 초대하는 것입니다. 신학자 존 파이퍼는 인간 존재의 목적을 극적으로 압축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기뻐하고 만족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최고의 영광을 받으신다.”
이 만족은 두터운 예금 잔고나 세상의 마이크를 움켜쥔 화려한 인플루언서의 위상이 아닙니다. 세상의 피드가 어떤 인센티브로 유혹하든 나를 매수할 수 없고, 기계의 급격한 지능 발전이 우리를 흔들 수 없을 만큼, 오직 그분 한 분으로 가슴 벅차게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C.S. 루이스는 왜 인류가 그토록 사소한 것에 영혼을 파는지 이렇게 갈파했습니다.
“우리는 어리석고 둔한 피조물이다. 무한한 영원의 희열이 우리 코앞에 펼쳐져 있음에도, 그저 술과 쾌락과 세속적 야망 언저리에서 노닥거리고 있다. 마치 드넓고 찬란한 대양으로 떠나는 멋진 해변 휴가가 무엇인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우중충한 슬럼가 골목에서 흙탕물 웅덩이나 휘저으며 진흙 파이를 빚고 노는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우리는 너무 보잘것없는 것에 너무 쉽게 흡족해한다.”
화면을 스크롤하며 무의미하게 소비하는 정보들이야말로 그 슬럼가의 진흙 파이입니다. 당신은 본래 찬란한 대양으로 항해하도록 창조된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당신의 마음을 갱신하신다면, 영적 훈련과 실천은 마땅한 수순으로 따라올 것입니다. 철이 철을 강하게 벼리듯(iron sharpens iron), 훈련을 통한 연단이 가능해집니다. 처음에는 나를 바라보는 내면의 시선에서 시작하여, 일터에서의 소명, 하나님과의 매일의 은밀한 교제, 그리고 내 어깨 뒤로 따라오는 동역자들을 짊어지는 사명의 영역으로 확장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1년 동안 함께 고요 속을 걷는 소수 정예의 훈련 프로그램(Companion)을 조심스럽게 직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도구는 결코 본질이 아니며, 스스로 피 흘리며 전장에 나설 각오가 서지 않은 자들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핵심은 언제나 새롭게 이식되는 심장과 깨어나는 이성(renewed mind)입니다. 신학자 리처드 포스터는 우리 시대의 절대적인 기근을 이 한 문장으로 일갈했습니다.
“오늘날 이 시대가 갈구하는 사람은 더 똑똑하거나 더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지금 가장 필요한 사람은 깊이(Depth)가 있는 사람이다.”
기계는 생각의 두께가 얇고 피상적인 무리들을 가장 빠르고 저렴하게 청산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혹독한 AI의 대전환기에 영혼의 심연을 가진 깊은 존재들은,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 존엄하며 대체 불가능한 희소성을 띠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꼭 1년 후, 이 자리에 우뚝 서 있을 한 사람의 형상을 상상해 보십시오. 1년 전만 해도 스마트폰의 푸시 알림으로 강제 기상하여 그날의 피드가 설계하는 대중적 감정에 수동적으로 휩쓸리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세상이 아직 고요한 어둠 속에 덮여 있을 때 먼저 깨어납니다. 그리고 침묵이라는 골방에서 만물의 주권자를 독대합니다. 그는 마침내 주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잡하고 혹독한 현실의 압력 앞에서도 겁먹고 수풀 뒤로 숨지 않습니다. 기계에 매몰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지휘하는 통치력(Dominion)을 획득했으며, 그보다 먼저 자기 영혼의 질서를 잡았기에 첨단 문명을 향한 일말의 경외나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는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사선에 서 있습니다.
마침내 그는 도피의 정원, 그 비열한 수풀 밖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노릇을 하려던 부질없는 자만심을 내려놓았습니다. 참되신 왕이 자신을 입히기 위해 십자가로 하강하셨음을 온전히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변의 관찰자들이 그의 변화를 묘사할 때 쓸 수 있는 유일한 단어는 바로 ‘평안’뿐입니다. 세상의 논리로는 결코 계측할 수 없는 성도 특유의 불가사의한 광채이며, 인공지능이 영원히 합성해 낼 수 없고 세상의 어떤 테러와 공포도 결코 강탈해 갈 수 없는 우주적인 참된 안식입니다.
이 초자연적인 평안은 오직 낮아져 내려오신 구원자로부터 흘러옵니다. 그러니 이제 도피의 수풀 속 어둠에서 나와, 그분과 함께 동행합시다.
출처: https://regenerationministries.substack.com/p/865?r=5v565s&utm_campaign=post&utm_medium=web&triedRedirect=tr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