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주 기독일보가 오프라인 지면 통권 1000호를 넘어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민교회와 함께 걸어온 지난 23년을 돌아보며, 미주 기독일보는 이민교회의 역사를 함께 일궈 온 우리 주변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를 싣는다. 낯선 땅에서 억척스럽게 삶의 터전을 닦고 교회를 세워 온 이들의 목회와 간증은 한인 이민사의 생생한 기록인 동시에, 저마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드러낸다. 이번 순서에서는 필그림선교교회를 개척해 오늘까지 이끌어 온 양춘길 목사의 목회 여정을 들어봤다.
양춘길 목사의 목회 여정은 외형적 성장에 머물지 않고 교회의 본질을 끊임없이 묻고 그 답을 찾아온 과정이었다. 안정된 엔지니어의 길을 걷던 그는 어린 시절 품었던 목회자의 소명을 다시 붙들었고, 신학교와 부목사 사역을 거쳐 담임목회의 길에 들어섰다. 교회의 괄목할 만한 성장을 경험했지만, 그 성공의 한가운데서 오히려 자신의 야망과 영적 메마름을 마주하는 깊은 내적 위기를 통과했다. 그 과정에서 “교인은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라는 깨달음을 얻은 그는 필그림교회를 개척해 평신도가 사역의 주체로 서는 말씀 중심의 공동체를 세웠다. 이후 양적 성장의 한계를 넘어 교회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 나라에 두는 선교적 교회로의 전환을 이끌어 왔다.
엔지니어의 길에서 다시 붙들린 어린시절 부르심
양 목사는 원래 목회에 뚜렷한 비전을 두고 신학의 길로 들어선 것이 아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연구개발 부서에 들어가 엔지니어로 일했다. 주변에는 대부분 석사나 박사 출신들이 있었고, 자신이 그 자리에 들어간 것 자체부터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돌아봤다. 그러나 입사한 지 6개월쯤 지나 회사 게시판에 붙은 사람들의 은퇴 공지를 반복해 보면서, 자기 인생의 끝이 너무 분명하게 보였다고 했다. 양 목사는 “나도 여기서 30년, 40년 회사 오고 가며 페이체크 받아 가다가 인생이 끝나겠구나 싶었다”라며 “그때 갑자기 인생이 무의미하게 느껴졌고, 어릴 때 목사가 되겠다고 했던 꿈이 다시 생각났다”고 했다. 그는 그 시간을 지나고 나서 그 때를 하나님이 자신을 다시 부르신 소명의 시작이었다고 받아들였다.
그 부르심은 하루아침에 결론 난 것이 아니었다. 양 목사는 아내와 함께 오랜 시간 대화하고 기도하며 약 3년 동안 갈등했다. 사실 어린 시절만 해도 목회자의 길은 낯선 소명이 아니었다. 기도를 많이 하던 외할머니는 늘 그에게 목사가 돼야 한다고 말했고, 어머니 역시 자식 가운데 목회자로 하나님께 드릴 사람을 내어놓겠다는 헌신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교회 안에서도 활발하게 섬기며 자라온 그는 한때 자연스럽게 자신은 목사가 될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미국 고등학교 시절을 지나며 생각은 달라졌다. 이제는 미국에서 잘 살아보겠다는 꿈,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이 더 크게 자리 잡았고, 실제로 좋은 직장까지 얻게 됐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다시 본래의 부르심을 일깨우셨다고 그는 회고했다.
신학교 시절에도 그의 관심은 단지 학문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신학교에 한인 학생이 30~40명 있었지만, 공부를 하면 할수록 오히려 영적으로 메말라 가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래서 몇몇 학생들과 함께 기숙사 지하실에 모여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양 목사는 “신학교 공부를 하면 할수록 내면의 뜨거움이 식어 가는 것 같았다”라며 “몇 사람이 우리끼리라도 새벽기도를 하자고 해서 기숙사 지하실에서 기도회를 시작했다”라고 돌아봤다. 그에게 신학 공부는 지식을 쌓는 일만이 아니라, 영적 중심을 잃지 않는 싸움이기도 했다.
목회 여정 또한 단숨에 개척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신학교를 마친 뒤 당시 미국에서 가장 큰 한인교회 가운데 하나였던 나성영락교회에서 5년간 부목사로 훈련을 받았다. 이후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에서 4년간 담임목회를 했고, 그 뒤 1년 동안 자신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을 지나 뉴저지에서 개척의 길로 나아갔다. 그는 지나고 보니 하나님이 개척을 위해 단계적으로 준비시키신 것 같다고 했다. 나성영락에서 다양한 목회 경험을 쌓게 하시고, 첫 담임목회지에서 담임목회의 무게를 배우게 하시고, 미시간에서는 자신을 성찰하며 목회자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다시 돌아보게 하셨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다.
양적 성장의 성공 뒤에 찾아온 깊은 위기
그러나 이 과정에서 큰 전환점은 첫 담임목회지에서 찾아왔다. 36세에 비교적 안정된 중형교회의 담임으로 청빙을 받았을 때, 그는 젊지만 유능한 목회자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고 털어놓았다. 교회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눈에 보이는 성장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부담이 컸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회는 크게 성장했다. 그러나 외적 부흥과 달리 내면은 점점 메말라 갔다. 양 목사는 “겉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잘하는 것 같은데 내면에는 기쁨이 없었다”라며 “돌아보니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목회가 아니라 사람들의 기대를 채우고 나 자신을 증명하려는 인간적인 야망이었다”라고 했다.
결국 그는 목회자로서 깊은 위기에 봉착했고, 스스로의 부족함을 절감한 끝에 사임했다. 그리고 그 위기 속에서 그의 목회를 바꾼 한마디가 있었다. 은퇴를 앞둔 한 이민목회자로부터 들은 “교인은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라는 말이었다. 그는 그전까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교인들을 교회 성장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처럼 본 면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교회 성장에 도움이 될 사람은 앞세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다른 방식으로 대하는 식의 태도가 자신 안에 있었음을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이다. 양 목사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있는데, 그것을 목회자의 목표를 이루는 도구처럼 삼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크게 깨달았다”라며 “그때부터 목회는 사람을 활용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섬기는 일이라는 것을 다시 배우게 됐다”라고 했다.
그 깨달음은 뉴저지에서 필그림선교교회를 개척할 때 목회의 근간이 됐다. 그는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을 ‘우리 교회에 도움이 될 사람’인가 아닌가로 평가하지 않으려 했다고 했다. 대신 하나님이 왜 이 사람을 보내셨는지, 어떤 필요와 아픔을 품고 있는지 먼저 생각하려 했다는 것이다. 양 목사는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을 우리에게 도움이 되겠느냐는 눈으로 보지 말자고 했다”라며 “하나님이 이 사람을 왜 보내셨는지, 우리가 어떻게 섬겨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자고 했다”고 회상했다.
교회 이름 역시 이런 방향성과 무관하지 않았다. 양 목사는 이민교회 상황에 맞고, 1세와 2세가 함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이름을 고민하던 중, 신학교에서 배운 이상현 박사의 이민신학을 떠올렸다고 했다. 그가 기억한 핵심 표현은 “순례자로 부름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 이민자들의 정체성까지 관통하는 이 표현이, 자신들이 세우려는 교회와 잘 맞는다고 여겨 ‘필그림’이라는 이름을 택했다고 설명했다.
필그림교회 성장의 핵심, 평신도 사역과 말씀 중심 목회

양 목사는 필그림선교교회의 성장 원인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전제했다. 교회의 성장은 본인이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보내주셔야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다만 그는 필그림교회 개척시절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를 살피기 위해 노력했다고 돌아봤다. 또한 무엇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 평신도 사역, 그리고 기초를 튼튼히 세운 말씀 중심의 목회를 이러한 성장의 중요한 배경이 됐을 것이라고 봤다. 새가정반을 통해 교회 소개를 넘어 구원의 확신을 점검했고, 일대일 제자양육으로 그리스도 안의 삶을 다졌으며, 커피브레이크 소그룹 성경공부를 개척 초창기부터 도입해 말씀 중심의 분위기를 세웠다는 것이다. 그는 “목회자가 하는 대로 평신도들이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있는 하나님의 목적에 맞춰 섬겨야 한다고 생각했다”라며 “평신도들이 사역의 주체가 되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라고 했다.
또 지역사회를 향한 섬김도 교회 초기부터 분명한 방향이었다. 필그림교회는 개척 2년 만인 1999년, 예배 공간을 마련하는 일에 앞서 지역사회를 섬기기 위한 필그림사역센터를 교회 부속기관으로 시작했다. 센터는 노숙자와 노인, 장애인, 환자와 재소자를 돌보는 사역을 비롯해 장학사업과 해외선교 지원 등을 펼쳤다. 이후 사역 범위가 넓어지면서 2007년 비영리법인 ‘필그림하우스’로 공식 출범했고, 청소년 상담과 선도, 장학 및 사회복지 지원 등 보다 전문적인 사역을 갖추기 시작했다. 2011년에는 한인 밀집 지역인 팰리세이즈파크로 옮겨 지역 주민들과의 접점을 넓혔고, 2015년에는 명칭을 ‘네이버플러스’로 변경하며 교회에서 독립한 지역사회 봉사재단으로 새롭게 자리 잡았다. 현재 네이버플러스는 정부 복지프로그램 안내와 신청 지원, 호스피스와 환자·가족 돌봄, 청소년 상담, 싱글부모 지원, 노숙자 사역과 직업교육 등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의 실제적인 필요를 채우는 일을 이어 가고 있다. 이는 지역사회 섬김이 필그림교회의 성장 이후 덧붙여진 프로그램이 아니라, 개척 초기부터 교회가 붙들어 온 목회의 한 축이었음을 보여 준다.
급성장의 그림자와 84.6% 수평이동의 충격
필그림교회 개척 후 예배장소를 위해 세 곳을 옮겨 다녀야 했다. 클리프턴에서 시작해, 7개월 만에 잉글우드의 웨스트사이드교회로, 다시 같은 지역의 다른 교회로 옮겨 갔다. 교회가 성장하면서 더 큰 공간, 더 많은 한인들이 모여 있는 지역으로 옮겨 다닌 것이다. 그러다 파라무스의 성전을 구입하게 됐는데, 당시 교인 수로는 감당하기 쉽지 않은 규모였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 건물을 함께 둘러보고 기도할 때마다 “이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건물”이라는 고백을 했다고 그는 회상했다. 양 목사는 “모두가 하나가 되어 마음을 모으고 기도하면서 그 건물을 준비했고, 그 건물에 들어간 뒤 교회가 급격히 성장했다”라고 말했다.
그가 또렷이 기억하는 장면은 평신도들이 지역사회 섬김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모습이다. 특히 수년 동안 뉴욕 할렘에 나가 노숙자들을 섬기던 사역을 그는 큰 은혜의 시간으로 꼽았다. 흑인교회와 협력해 식사를 제공하고 예배를 드리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 성도들이 기쁘게 참여하는 모습을 보면서, 평신도들이 교회 안을 넘어 교회 밖으로까지 사역의 주체로 서 가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장에는 또 다른 그림자도 있었다. 양 목사는 교회가 급성장하면서 평신도 리더들을 충분히 훈련시키지 못한 채 사역을 맡기게 된 점을 안타까운 경험으로 꼽았다. 더 큰 문제는 새로 온 성도들의 다수가 다른 교회에서 이동해 온 경우였다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한 시기에 새가족들을 분석해 보니 84.6%가 수평이동이었다. 양 목사는 “교회는 성장하지만 이웃 교회는 교인을 잃는다면, 이것이 과연 교회의 본래 목적에 맞는 성장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다”라며 “교회가 은혜를 주고받는 차원을 넘어 정말 영혼 구원으로 이어지고 있는가를 놓고 깊이 고민하게 됐다”라고 했다.
이 문제는 사실 첫 담임목회지에서도 경험했던 것이었고, 필그림교회에서는 평신도 사역을 강조하며 그것을 극복해 보려 했지만 여전히 반복됐다고 했다. 그는 처음에는 “다른 교회에서 온 사람들이 우리 교회에서 은혜를 받고 더 열심히 신앙생활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지만, 실제로는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오래된 갈등은 결국 분립, 지교회, 교구의 교회화 같은 여러 돌파구를 고민하게 만들었고, 나중에는 선교적 교회로의 전환을 모색하는 배경이 됐다.
교단 탈퇴와 선교적 교회 전환
결정적인 전환은 교단 탈퇴와 건물 포기 이후 찾아왔다. 양 목사는 그 과정을 지나며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온 성도들과 함께 깊이 공유하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2018년 초, 전통적인 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변화되도록 돕는 워크숍에 참여하면서, 자신이 오래 고민해 온 문제의 실제적 돌파구를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미 그 전부터 선교적 교회에 대한 관심과 갈등을 안고 있었지만, 교단 이탈과 건물 포기라는 광야의 시간을 지나며 그것이 실제 방향으로 굳어졌다고 했다.
또 ‘필그림선교교회’라는 이름도 처음부터 치밀하게 계획해 붙인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기존 교단 이름을 더 이상 쓸 수 없게 되자 급히 새 이름이 필요했고, 은행 계좌까지 열어야 하는 상황에서 ‘선교’를 넣어 필그림선교교회라고 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그것 역시 하나님이 교회를 선교적 방향으로 이끌어 가시는 큰 흐름 안에서 이뤄진 것 같다고 회고했다.
양 목사는 선교적 교회를 “일상에서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공동체”라고 설명했다. 교회의 목적은 개교회 성장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도구로 쓰임받는 데 있고, 성도들 역시 누군가를 선교지로 보내는 사람들에 앞서 이미 각자의 삶의 자리로 보냄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선교적 교회는 무엇인지 충분히 교육하는 것부터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는 단순히 프로그램 하나를 더하는 일이 아니라, 교회의 DNA와 문화를 바꾸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 이해는 교회 구조와 문화의 변화로 이어졌다. 예배 속에는 매주 선교를 나누고 기도하는 순서가 들어갔고, 예배 마지막에는 모인 교회가 이제 흩어진 교회로 세상 속에 나아간다는 파송의식이 강조됐다. 부흥회 대신 선교 컨퍼런스가 자리잡기 시작했고, 선교적 삶 워크숍을 통해 성도들이 각자의 소명을 발견하도록 도왔다. 어떤 이는 싱글맘 사역으로, 어떤 이는 노숙자 사역으로, 또 어떤 이는 병원 사역이나 음악 사역으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방향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양 목사는 “개인의 선교적 삶이 계속 늘어나면 그것이 곧 선교적 미니스트리로 발전하고, 다시 선교적 공동체가 만들어진다”라고 설명했다.
양 목사는 선교적 교회를 강조한다고 해서 해외 선교가 약화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오히려 일상에서 선교적 삶을 사는 성도들이 해외 선교에도 더 큰 관심을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한인교회는 선교를 말할 때 해외 선교에 치우친 경향이 있었지만, 선교적 교회로 전환되면서 “지금 여기”가 우리의 사명지임을 깨닫게 하고, 동시에 해외 선교와의 균형을 맞춰 가는 것이 건강한 방향이라고 했다.
팬데믹 역시 필그림선교교회에는 오히려 성도들의 선교적 삶을 가속하는 계기가 됐다. 사랑의 마스크 운동, 소망의 텃밭, 병원 종사자들에게 보내는 카드, 홈리스들을 위한 샌드위치 나눔, 지역 식당과 병원을 연결한 음식 지원 등이 그 시기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양 목사는 “어려움은 다른 교회들과 마찬가지로 있었지만,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선교적 삶을 살 것인가를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됐다”라며 “그때 선교적 삶이 더 구체화됐다”라고 했다.
팬데믹은 건물 구입에도 역설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셧다운 직전 새 건물 구입을 결정했지만 다운페이를 마련해야 하는 상황에서, 모이지 못하는 몇 달 동안 기존 렌트비가 나가지 않으면서 그 비용이 오히려 보탬이 됐다는 것이다. 그는 그 시기에도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원칙을 더 분명히 했다고 했다. 그래서 더 큰 건물을 추구하기보다, 선교의 센터로 쓸 수 있는 적절한 공간을 선택했고, 실제로 건물 외벽에도 ‘필그림선교센터’라는 이름을 더 크게 내걸어 이곳이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센터라는 정체성을 드러냈다고 했다.
이민교회의 미래와 다음 세대
양 목사는 앞으로의 이민교회에 대해서도 분명한 전망을 내놓았다. 한인 1세 중심의 이민교회는 이미 쇠퇴기에 들어섰고, 앞으로는 다민족을 품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민자 유입은 줄고, 2세와 3세는 영어권 공동체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되지는 않더라도 그 방향을 정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필그림교회 역시 영어목회가 독립해 나간 경험이 있고, 이후 다시 시작한 영어목회는 자연스럽게 다민족 공동체로 형성돼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음 세대에 대해서도 그는 단순히 붙잡아 두는 대상으로 보지 말고, 선교의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만큼 먼저 예수를 개인적으로 만나게 하고, 이후에는 자신들에게 맞는 공동체와 교회로 나아갈 수 있게 풀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무조건 우리 곁에 늘 있게 하겠다는 생각은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라며 “보내기 전에 확실한 신앙을 갖게 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했다. 이를 위해 다음 세대 지도자를 세우는 일도 중요하다고 보았고, 필그림교회는 신학생과 젊은 목회자들에게 인턴 기회를 제공하며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고 했다.
목회 여정을 돌아보며 양 목사가 가장 먼저 꼽은 감사는 개척 초기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함께 교회를 시작해 준 가정들이었다. 교단과 건물을 뒤로하고 진리를 따라 나서야 했던 때, 온 교회가 흔들리지 않고 하나가 되어 준 일도 잊을 수 없는 감사로 남아 있다고 했다.
반면 그의 목회 가운데 가장 오래 지속된 어려움은 특정한 사건보다 내면에서 반복된 질문이었다. 교회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과연 그 성장이 영혼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교회의 본래 목적에 부합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어야 했다. 외형적으로는 주목받는 교회가 됐고 성도들의 신뢰도 받았지만, 많은 사역을 감당하는 동안 자신의 영성은 충분히 자라고 있는지에 대한 갈증도 놓이지 않았다. 양적 성장을 이루고도 마음 한편에 남아 있던 이 갈등은 교회의 목적을 개교회 성장에서 하나님 나라로 돌리고, 필그림선교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전환하면서 비로소 풀리기 시작했다.
이 같은 자신의 여정을 돌아본 양 목사는 앞으로 목회 현장이 지금보다 더 어려워질 수 있다는 현실을 후배 목회자들이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러나 어려운 환경 자체가 목회의 실패를 뜻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 가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양 목사는 “상황과 환경에 지나치게 눌리지 말고, 여전히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췄으면 좋겠습니다”라며 “목회가 어려워질수록 오히려 하나님을 더 크고 깊게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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