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게임>, 이전투구하는 청년 세대 가련한 자화상
그러나 국가와 사회는 이들 돌보는데 소홀한 게 현실
사회 노예화된 이들 해방시키는 지혜, 교회사에 담겨
영혼의 생명뿐 아니라, 현실적 삶의 수단까지 도와야

최근 방송계와 시청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유튜브 웹예능 <머니게임>.
최근 방송계와 시청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킨 유튜브 웹예능 <머니게임>.

◈<머니게임>과 일본 빙하기 세대: <머니게임>에 앞선 생존물, <도박묵시록 카이지>와 <라이어 게임>

<머니게임>과 유사한 설정을 가진 작품들은 여럿 존재했다. 특히 일본 대중문화계 쪽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머니게임> 설정 중 상당 부분은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었던 만화 <라이어 게임>과 유사하다. 참가자들을 밀폐된 시설에 모으고 서로 경쟁하게 해서 상금을 주거나 빚을 지운다는 점에서는 <도박묵시록 카이지>의 설정과도 일부 닮아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도박묵시록 카이지>(1996년 연재 시작)와 <라이어 게임>(2005년 연재 시작,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었음)의 연재 시작 시점이 모두 헤이세이 불황기, 소위 잃어버린 10년(1992-2007) 중이라는 점이다.

당시 일본에서는 1980년대 내내 이어진 거품경제, 헤이세이 버블이 꺼지면서 기업과 가계가 심각한 부채위기를 맞이했다.

기업들의 종신고용 시스템은 붕괴되었고, 일부 고학력 구직자들을 제외한 청년 세대 상당수가 비정규직과 단기 아르바이트, 일용직을 전전했다.

당시 얼어붙은 취업 시장 상황, 그리고 이로 인한 청년들의 심적, 경제적 고통과 좌절감을 표현한 말이 바로 '빙하기 세대'이다.

'빙하기 세대' 가운데 생겨난 심각한 사회문제로 니트족(취업에 대한 의지 자체가 없는 이들) 급증과 혼인율 급감이 있다.

그들의 부모 세대, 즉 취업과 종신고용이 보장되었던 단카이 세대(전후 베이비붐 세대)와 자신들의 삶의 처지가 비교되면서, 더 나은 삶에 대한 의욕을 잃고 결혼마저 포기한 젊은이들이 급증했다. 니트족 가운데 일부는 더 극단적으로 폐쇄된 삶을 사는 히키코모리가 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도박묵시록 카이지>나 <라이어 게임>은 빙하기 세대 젊은이들의 삶의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한 설정 덕에 큰 호응을 얻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미래에 대한 희망은 접어두고 밀폐된 공간에 스스로를 가둔 채 살거나, 끊임없는 실직 위기 속에서 치열한 생존경쟁을 이어갔다.

이렇듯 각박하고 암울한 현실을 반영하면서 젊은 독자들에게 위로와 대리만족을 주어 공감을 이끌어낸 것이 두 서바이벌 작품의 성공 비결이었다.

도박묵시록 카이지 라이어 게임
▲일본 만화 <도박묵시록 카이지>와 드라마 <라이어 게임>. 빙하기 세대의 고통스러운 삶의 모습을 반영한 작품들.

한국은 약 20년 정도 격차를 두고 일본의 경제와 사회 발전 궤도를 따라간다. 현재의 한국 청년세대는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반 일본 빙하기 세대가 겪었던 문제들을 거의 유사하게 감내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 확산은 이미 심화되어 있던 이런 문제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N포 세대'라 불리는 우리 젊은 세대에게 <머니게임>과 같은 작품이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는 시기인 것이다.

이 세대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심각한 정신적, 정서적 퇴락을 겪는다. 우선 동세대에 편만한 좌절감 때문에 앞날에 대한 희망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이 습관이 되어 단념에 능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더 나은 앞날을 위한 희망 때문이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는 압박감과 불안감으로 인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제적 이익을 취득하려 한다.

여기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사기나 갈취 등 범죄행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온갖 양태의 투기나 도박에 뛰어드는 행태까지 포함한다.

◈<머니게임>과 한국 N포 세대: 생존게임에 붙들린 젊은 세대를 해방시키는 교회

<머니게임>에서 출연자들이 보인 앞날없는 행동들, 그리고 상금을 차지하려는 계략과 갈등, 음해 시도 등은 모두 해법 없이 가로막힌 삶의 갈림길에서 택할 수 있는 자연스럽고도 유일한 저항의 방편이다.

그런 행동으로 빠져드는 젊은 세대를 무조건 질책하기만 할 수는 없다. 그만큼 상황이 젊은 세대에게 불리하게 돌아간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데는 오늘날 사회적 영향력과 경제력을 독점하고 있는 40대 이상 기성 엘리트 계층의 책임이 크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치경제적 한계도 큰 원인이지만, 그런 한계 앞에서 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타인을 위해, 지역사회를 위해, 그리고 후세대를 위해 봉사하려는 노력과 고민이 전혀 없이, 오로지 자기 잇속 챙기기에만 몰두했던 탓이 더 크다. 그들이 젊은 세대를 <머니게임>의 늪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20대, 30대 청년들이 얼마 가지지도 못한 자산을 기반으로 레버리지를 극대화하면서 가상화폐 같은 위험자산, 투기자산에 '영끌' 투자를 하는 것 역시 한국 젊은 세대의 해법 없는 앞날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저항과 몸부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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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젊은 세대의 현실판 <머니게임>을 주도하고 있는 가상화폐 '영끌' 투자. ⓒ픽사베이

다만 기독교 신앙을 가진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저항 방식이 올바르게 여겨지지는 않는다. 현재 한국의 젊은 세대가 기성 세대의 압박을 극복하는 길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래서 실패의 위험이 큰 개인의 도박과 같은 이익 추구가 아니다.

그보다는 먼저 기성세대 엘리트들이 주입한 왜곡된 삶의 가치를 해체하는 데 주력할 필요가 있다. '삶의 질, 웰빙'이라는 말로 포장된 일정 수준의 경제적 윤택함을 이룩하는 것을 '잘 사는 것'의 기준으로 삼는 세뇌를 벗어나야 한다.

삶의 윤택함을 무조건 죄악시하는 금욕주의적 태도를 갖고 살자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삶의 윤택함만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맹목적 욕심, 반성없는 욕심을 조절하고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강남의 아파트, 외제차 소유가 성공한 삶의 절대 기준으로 인정받는 세태, 이러한 세태를 차분하게 들여다보면 그 기원은 바로 그 부모와 선배 세대 엘리트들로부터 유래된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가 사실상 가질 수도 없는 것을 성공 기준으로 정해 놓고, 그 기준 안에 들도록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경제적 질서에 예속되어 살게 한 것이다.

여기에 예속될 것인지, 아니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세워 그것을 추구하며 살아갈 것인지는 각자의 선택이다.

많은 종교들은 이와 같은 시기에 각각의 방식대로 해방의 길을 보여주곤 했다. 기독교회는 신앙으로 묶인 공동체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살 수 있도록 청년들을 지원하고 지도해 왔다.

초대교회 구제 공동체, 중세의 수도원들, 종교개혁 이후 각 교파 초기 공동체들, 그리고 근현대 시기 전 세계로 퍼져나간 각종 선교 공동체들은 모두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전적으로 헌신하기로 결심한 이들이 서로의 삶을 부양하고 돌봐주는 강력한 복지의 기능을 갖추고 있었다.

초대교회 병원 한국 조선
▲1910년대 부산 나환자병원 건립 기념사진. 한국 초대교회는 국가 전체의 어려운 정치적, 경제적 사정에도, 믿음의 삶에 전력질주하는 이들의 영혼 구원뿐 아니라 현실적인 삶까지 지탱하는 강력한 복지 기능을 갖고 있었다.

자본주의 논리, 엘리트주의 독점욕, 그리고 기복적 신앙행태 때문에 이런저런 약점을 보이는 현재의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이런 교회사적 지혜를 실천하는 사례를 찾기보기 어렵다.

하지만 한국교회도 구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쳐 6.25 전쟁 직후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전도와 봉사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의 삶을 책임지고, 주변의 어려운 이들을 경제적으로 돕는 강력한 복지 기능을 이행해 왔다.

청년 세대가 현실판 <머니게임>의 굴레에 예속되어 고뇌하는 현재, 교회가 그들에게 신앙을 통한 삶의 참된 해방과 초월을 경험하게 해주기 위해서는 과거 교회들이 갖췄던 구제와 복지 역량을 오늘날의 현실에 맞게 혁신해서 회복해야만 한다.

국가와 사회가 돕지 못하고 구제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삶을 교회들이 돕고 올바르게 이끌 수 있다는 신뢰를 보여야 한다.

음지에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청년 공동체 운동을 일으키려 힘쓰고 있고 이러한 점에서 한국교회는 언제나 그랬듯 희망적이다. 이는 영혼과 육체를 포괄하는 전인적 구원을 위해 힘쓰라 가르치는 복음의 정신과 지혜를 따르는 이들이 당연하게 추구하는 실천이다.

단지 이런 노력들이 초심을 잃고 기업화된 교회들, 복음이 가르치는 가치를 잊고 세속의 기성세대 엘리트들이 추구하는 가치에 오히려 예속되어버린 일부 교회들 때문에 묻히고 있는 상황이 안타깝게 여겨진다.

머니게임
▲이기적인 계략과 이전투구가 지배하는 <머니게임>. 오늘날 한국 젊은 세대의 고통스러운 삶을 보여주는 풍자극이라 할 수 있다.

결언하자면, <머니게임>은 한국의 기성 세대가 세워놓은 이기적이고 비현실적인 가치체계에 얽매여 좌절과 불안의 부정적 정서 속에서 서로 이전투구하는 청년 세대의 가련한 자화상을 보여준다.

국가와 사회는 이들을 돌보는 데 소홀하다. 교회사에는 이렇게 노예화된 이들을 해방시키는 지혜가 담겨 있다.

교회들은 믿음으로 사는 삶에 전력하는 이들에게 영혼의 생명뿐 아니라 현실적인 삶의 수단들까지 찾을 수 있게 힘써 왔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생존게임에 허덕이는 청년 세대를 돕기 위해 이러한 기능을 반드시 회복해야 한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 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냈다면 쉽게 공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