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태어날 때부터 한 평생을 죄와 허물로 가득한 죄인 중의 죄인으로 살아왔는데,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부름꾼으로 살아오고 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부족하고 또 부족한 죄인이 하나님께서 쓰시는 심부름꾼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망극하신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으로 된 것이지만 또한 귀중한 신앙의 선배님들의 사랑과 가르침으로 된 것이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부족한 저에게 귀중한 신앙의 유산들을 물려주신 신앙의 선배님들에 대한 감사와 사랑과 존경의 이야기들을 아주 간단하게 줄여서 하려고 합니다.
1.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
첫째로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가난과 고난과 순교의 신앙을 물려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께서는 처음에는 북한 신의주 제2교회에서 9년 동안 목회하시고 그 다음에는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2년 동안 목회하셨는데, 일본 시대에는 신의주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한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가시는 고난을 당하셨고 공산주의 시대에는 평양에서 공산 정치를 반대한다고 자주 감옥에 잡혀 잡혀가시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저는 자주 감옥에 붙잡혀 가시는, 그리고 나중에는 순교의 길로 가시는 아버지를 바라보면서, 가난과 고난과 순교의 신앙을 조금씩 몸에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2.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
둘째로 제가 평양에 있을 때 평양 서문밖교회 주일학교 선생님들인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로부터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 신앙을 분명하게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인복, 명선성, 최병목 선생님들은 저에게 주일성수와 새벽기도와 순교 신앙이 가장 귀중한 신앙이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저는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주일을 종일 성수했고 새벽기도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고 순교 신앙을 가장 귀중한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때 평양 제5인민학교에 2년 동안 다녔는데, 일요일에 학교에 오지 않는다고 월요일마다 벌을 서고 정학을 당하게 되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3. 한국교회의 무디 이성봉 목사님
셋째로 제가 11살 때인 1948년 7월 주일성수의 신앙을 지니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기 위해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넘어 서울에 와서 이모님 집에서 이별의 슬픔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누리는 감사를 지니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2년 후인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 대구로 가서 3년 동안 피난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한국교회의 무디'라고 불리시는 이성봉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부흥회에 12번 참석하면서 너무나 큰 은혜와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말씀을 들었고 금요일에는 철야기도를 했고 토요일 새벽에는 이성봉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12번 받으면서 좋은 목사가 되기를 다짐하곤 했습니다. 결국 회개와 기도와 은혜 사모와 성결과 청빈과 재림 신앙의 영성을 조금씩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는데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4. 한국교회의 예레미야 김치선 목사님
넷째로 제가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 서울 창동교회에 다니면서 '한국교회의 예레미아'라고 불리시던 김치선 목사님으로부터 눈물의 회개와 은혜 사모와 기도와 전도와 헌신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김치선 목사님께서는 새벽기도회 때마다 "애통하며 회개할 맘 충만하게 합소사" 찬송을 부르시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시곤 하셨고, 저도 새벽기도 후 남산으로 올라가서 30여분 이상 더 기도하고 내려오곤 했습니다.
저는 김치선 목사님께서 인도하시는 산 기도회에는 삼각산과 관악산은 물론 대구 주암산까지 따라가곤 했습니다. 그리고 2만 8천여 동네에 우물을 파게 대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시던 김치선 목사님의 기도와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저는 고3 때와 대1 때 토요일과 주일 왕십리 들판에 나가서 찬송을 부르고 전도를 하면서 어린이들과 어른들을 불러모으고 천막교회를 세우기도 했는데,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5.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다섯째로 저는 손양원 목사님으로부터 순수한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함께 희생적인 섬김과 순교 신앙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서울고등학교 2학년 학생일 때, 여름 어느 날 남대문 네 거리에 있는 기독교 서점에서 <사랑의 원자탄>이란 책을 사서 들고 제가 새벽기도 후에 날마다 올라가서 기도하곤 하던 남산 어느 숲 속으로 가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사랑의 원자탄>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울고 또 운 일이 있었습니다.
나병에 걸려있는 아이들의 점심을 빼앗아 먹었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리고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양 아들로 삼았다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하면서 감동의 눈물을 흘리면서 울고 또 울었습니다. 그 후부터 손양원 목사님은 제가 제일 존경하고 사랑하고 닮고 싶은 목사님이 되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6. 한경직 목사님
여섯째로 저는 1살 때부터 평생 한경직 목사님의 친밀한 사랑과 가르침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회개와 기도와 온유와 겸손과 사랑과 섬김과 가난과 고난과 화해와 평화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셨고, 월남 후 영락교회에서 목회하시는 동안에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정성껏 돌아보시는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보린원, 모자원, 경로원, 노인요양소, 농아원, 장애아원, 어린이 집, 재가노인복지 상담소등을 세우셨습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는 은퇴 후 남한산성의 아주 작은 집에서 26년 동안 불편하게 사셨는데, 3무 4무 5무의 가난과 고난과 청빈의 삶을 사셨습니다. 제가 남한산성을 제일 많이 찾아가곤 했는데, 한경직 목사님을 마지막까지 돌아보시던 백운경 장로님이 "한 목사님이 김 목사님이 오면 제일 좋아하지요" 라는 말을 하곤 했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7. 정진경 목사님
일곱째로 저는 정진경 목사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과 포용과 협력과 따뜻함과 격려와 칭찬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정진경 목사님께서는 부족하고 또 부족한 저를 누구보다도 너무너무 사랑해주시고 아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칭찬해주셨습니다. 저는 온유 겸손하신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도 분에 넘치는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정진경 목사님으로부터는 더욱더 친밀한 사랑과 격려와 칭찬을 몽땅 받았습니다.
저는 백두산을 비롯한 중국, 일본, 러시아,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스리랑카, 홍콩 등 세계의 수많은 곳을 정진경 목사님과 함께 여행하면서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을 가졌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이 배웠는지 모릅니다.
한국교회에 훌륭하신 분들이 많이 계시지만, 정진경 목사님과 같이 항상 가까이 친밀하게 사귈 수 있는 분들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정진경 목사님의 지극한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온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8. 박윤선 목사님
여덟째로 저는 총신과 합신에서 교수 생활을 하면서 박윤선 목사님으로부터 기도와 말씀, 소박함과 진솔함, 착함과 따뜻함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박윤선 목사님께서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께 완전하게 붙잡히신 분이셨고 그래서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신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너무 소박하시고 진솔하시고 착하시고 따뜻하신 인간미를 몸에 지니신 분이셨습니다.
부족한 저에게 자주 전화를 거시고 가슴에 지니신 안타까운 생각들을 진솔하게 말씀하시면서, "이 말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지 마" 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곤 하셨습니다. 정진경 목사님과 비슷하신 진솔함을 지니신 분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마지막 한 주 동안 입원하고 계시던 영동 세브란스 병원에 매일 찾아 뵈면서 친밀한 교제와 기도의 시간을 가지곤 했는데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9. 방지일 목사님
아홉째로 저는 방지일 목사님의 사랑과 보살핌을 많이 받으면서, 순수함과 섬세함과 정확함과 따뜻함과 사랑과 섬김과 눈물의 영성을 조금씩 물려 받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는 부족한 저에게 특별한 사랑의 손길을 따뜻하게 펴시며, 진솔한 말씀들을 해 주시곤 했습니다. "김 목사, 점심 대접할게" 라는 송구한 말씀을 수십 번 하셨고, 제가 달려가면 일산으로, 강화도로, 경기도로, 서울 곳곳으로 저를 데리고 가서 맛있는 음식을 사 주셨고,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계시는 생각들을 저에게 진솔하게 이야기해 주시곤 했습니다.
저는 방지일 목사님을 모시고 중남미 도미니카로, 모스크바로, 몽골로, 태국으로 다니면서 선교대회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선교사들과 현지인들은 물론, 저도 너무너무 깊은 감동과 은혜를 받곤 했습니다.
방지일 목사님께서 하신 귀중한 말씀들이 너무너무 많은데 한 가지만 소개합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그리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나 혼자 있을 때면 우는 때가 많아요. 깊은 밤중에 일어나 우는 때도 있고 혼자 길을 걸으면서 우는 때도 적지 않아요.
어린아이는 잘 울어요. 배가 고파도 울고, 보고 싶어도 울고, 기저귀가 젖어도 울어요. 어린 아이는 우는 방법밖에 알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의미에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해요.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고 통달하려다 보니, 울지 않게 된 것이에요. 기도의 최고봉은 눈물의 기도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한테서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방지일 목사님과 친밀한 교제의 시간들을 가진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계속>
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명예회장, 강변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