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두 머리를 가졌습니다. 하나는 죄(罪)의 머리 아담이고, 하나는 의(義)의 머리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인 됨과 의인 됨이 이 두 머리에 의해 결정되도록 하셨습니다.
인류는 자기 개인의 죄(罪) 때문에 죄인이거나 개인의 의(義) 때문에 의인이 아니라, 첫 머리 아담 때문에 죄인이고 두 번째 머리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의인입니다. 개인의 사사로운 죄와 의(義)는 그 다음입니다.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8-19)."
성경은 더 구체화시켜 진술합니다.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노릇 하였나니(롬 5:14)." 인류가 아담과 같은 죄를 안 지었어도 죄의 머리 아담아래 있으므로, 죄와 사망이 그들을 지배하게 됐다는 뜻입니다.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롬 5:14)." 죄인 되는 원리와 동일하게, 그들의 의인됨도 오실 자 그리스도 아래 있음으로 된다는 뜻입니다.
물론 죄의 대표성 원리가 개인의 죄책(罪責)을 면하게 하지 못합니다. 원죄를 유전받은 자가 죄를 피할 순 없다 해도, 자기 죄를 핑계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아담의 원죄를 강조했고, '도덕폐기론'을 연상시킬 만큼 죄의 근원적 책임을 원죄 탓으로 돌렸습니다만(롬 7:17-20),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스로를 "죄인 중의 괴수(딤전 1:15)"라며 자신의 죄책(原罪)을 인정했으며, 일생 죄와의 사투를 벌였습니다(롬 7:22-25).
루터 역시 그리스도인을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simul justus et peccator)"이라며 피할 수 없는 죄의 숙명성을 말했지만, 이것을 자신의 죄를 당연시하거나, 의책(義責)을 면제시키는 빌미로 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의의 투쟁을 위한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시종 흔들림 없이 원죄자(原罪者), 원의자(原義者)가 아담과 그리스도임을 언명했으며, 이 기반 위에서 대속의 교리를 전개시켰습니다. 인류의 머리 아담이 전 인류를 공동운명체로 묶고, 그의 죄로 인류 모두가 죄인이 된 것은, 아담이 인류의 뿌리라는 사실에 근거합니다.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개역); 하나님께서는 한 조상에게서 모든 인류를 내시어(공동번역, 행 17:26)."
그러나 '보편'이란 실제가 없고 '개체'만이 참되기에, '인류'라는 실재는 없다고 보는 오캄(William of Ockham)의 '유명론(唯名論, nominalism)'-후에 서양 개인주의의 촉매가 된-에 세뇌된 사람들에게는, 아담을 머리로 인류를 하나로 묶는 인류의 공동운명체론(원죄론)이 생경합니다. 이 주장대로라면,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론(Universalism)'에 가까운 유물론적 사회주의가 원죄론을 수용하기 더 쉽다는 논리가 성립되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인류를 공동 운명체로 보는 아담의 대표 원리는 개인주의를 허락지 않습니다. 일부에서 기독교를 서구 개인주의의 근간으로 보는 것은 근거가 없습니다. 아담을 인류의 머리로 보는 원죄론(공동운명체론)에서는, 개인의 죽음을 바다의 수많은 모래알 중 한 알갱이의 소멸이 아닌, 인류라는 거대한 나무의 한 가지(branch)의 소실(消失)로 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인류 개인을 점도(粘度) 없는 모래알 같은 개체로 만든 것이 아니라,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처럼 인류를 상호 유기체로 만들었습니다. 뿌리인 아담이 죽으므로 뿌리에서 파생된 가지들, 잎들 곧 인류 모두가 다 죽게 했습니다.
고통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원죄의 유전으로 인류에게 파생된 고통은 누구에게도 예외가 없으며, 자신을 그것에서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그가 혹 타인 같은 극심한 고통을 공유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다만 은혜로 그것을 경감받았을 뿐, 자신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공동운명체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된 성도가 다른 성도의 고통을 지체(肢體)의식으로 체휼해야 할 당위성도 이 때문입니다.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도 함께 즐거워하나니(고전 12:26)." 예수님의 고난에 대해 갖는 그리스도인의 연민 역시, 자신과 연합된 대속적인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대표 원리는 성경으로부터 또 하나의 이론적 지원을 받는데, 곧 아담과 하나님의 연합 교리입니다. 성경 저자들이 인간 족보의 최상위에 아담을 놓는 것(창 5:1, 대상 1:1)과는 달리, 예수님의 제자 누가는 인간 족보를 아담으로 종결지우지 않고 아담 위에 하나님을 존치시켰습니다.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눅 3:38)."
이는 단지 인간(아담)이 하나님에게서 기원했다거나, 아니면 어떤 이단들의 주장대로 인간을 신적 소생(the son of God)으로 놓는 인간 신격화의 근거를 지지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인류의 머리로서(행 17:26)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 됨을 가르칩니다. 곧 아담 한 사람의 언약이행 여부에 따라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도록 그를 인류의 머리로 삼았다는 뜻입니다.
사단은 이러한 아담의 인류 대표성을 간파했으며, 아담을 타락시킴으로서 아담에게 붙은 인류 모두를 하나님에게서 떼어놓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실제로 아담이 범죄했을 때, 그 자신은 물론 그에게 붙은 인류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됐습니다.
이렇게 아담의 죄로 말미암은 인류와 하나님의 단절은, 단지 개인의 윤리적인 죄 개념을 뛰어넘는 '죄의 공공성' 개념을 담지합니다. 곧 인류 모두가 하나님과 의 단절과 저주를 함께 공유하게 됐습니다.
오늘 계몽주의 기독교인들이, 타락을 지나치게 개인적 윤리적 차원으로 국한시키고 구원을 개인의 윤리적 완성으로 보는 것은, 죄의 공공성 개념을 배제시킨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마귀가 아담을 유혹한 것은, 그를 타락시켜 다만 그 개인에게 육체의 죽음과 고통을 안겨주는데 있지 않고, 아담에게 붙은 인류 전체를 하나님에게서 분리시켜 그의 생명에서 떠나도록 하는 공공성에 목적을 두었습니다.
두 번째 머리 되신 그리스도가 원의자가 되어주시고, 그에게 붙은 인류 택자를 구원하는 것 역시 의의 공공성 개념을 담지합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고전 15:22)." 죄의 머리 아담에게 붙은 인류가 죄와 사망에 참여했듯이, 의의 머리 그리스도에게 붙은 택자들이 그의 의와 생명에 참여합니다.
이 공공성 원리는 성경의 "접붙임 원리(롬 11:17-18)"와 "부활의 원리(고전 15:23)"에 의해 잘 설명되었습니다. 인류의 첫 머리 아담을 통해 세상에 들여진(롬 5:12) 공적인 죄가, 두 번째 머리 그리스도의 공적인 의로 해결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태초에 인류의 머리 아담을 통해 인류와 관계를 맺었듯이, 두 번 째 머리 그리스도를 통해 택자와 연합하십니다.
오늘 원죄론(공동운명체론)을 부인하는 개인주의자들, 자기 죄에만 죄책을 진다는 죄형법정주의자들, 그리고 죄를 개인의 윤리 차원에만 국한시키는 계몽주의자들은, 원죄론(原罪論)과 원의론(原義論)을 논하여, 죄책을 아담에게 돌려 죄를 남용하고 의책(義責)에서 벗어나려는 자들의 빌미라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오히려 원죄와 원의를 부정함으로서, 죄책과 의책의 공공성을 제거하여, 죄를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사로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인류 개개인을 어떤 연대성도 없는 모래알들로 만들고, 나아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대속의 필요성도 부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할렐루야!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byterian@hanmail.net)
저·역서: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쉽게 풀어 쓴 이신칭의(CLC), 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