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 장로교에서는 담임목사 위임제도와 원로제도 때문에 많은 몸살을 앓고 있는 실정입니다. 아무런 문제없이 잘 하는 교회는 해당사항이 안되겠지만, 위임·원로 제도로 인한 분쟁의 요소가 늘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마땅히 이 제도는 폐지해야 합니다.
중대형교회의 나이 많은 목사·장로님들께서는 다소 서운하시겠지만, 장로교의 미래를 위해 이 제도는 반드시 폐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신앙인들이 많고, 그렇게 되는 것이 시대정신이기도 합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현재 각 분야별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기독교를 보면, 이것이 너무 먼 이야기 같이 들립니다. 아직도 이씨 조선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슬프기도 합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말씀은 변함 없겠지만, 말씀 가운데 필요한 프로그램은 시절을 따라 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복음을 나누던 시절과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던 시절, 그리고 구한말 복음이 전해지던 시절, 일제강점기와 6·25 같은 핍박의 시대, 그리고 요즘 같은 평온한 시대, 특히 스마트폰이 대중화된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각각 복음에 맞는 프로그램을 다르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오던 무렵 만들어졌던 법이 지금도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스러울 지경입니다. 오랜 시간 연로한 목사님들은 그들만의 기득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만의 잔치를 풍요롭게 하면서, 예수님께서 돌보라고 하셨던 어려운 이웃에게는 냉대하는 모습을 보면, 오늘날 교회는 주님의 가르침과는 무척 달라 보입니다.
한 번 목사님이 위임되고 나면, 총회법에서 정한 70세까지 시무하는데 아무런 장애가 없습니다. 이 제도의 병폐는 목사님의 무사안일이 교회 안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대형교회 목사의 추천서만 있으면 위임목사로 쉽게 청빙되는 것이 오늘날 현실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위임목사가 될 때까지는 갖은 약속과 행동으로 성도들을 위하는 척 하다가, 위임되고 나면 태도를 싹 바꿔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것도 바로 위임 제도 때문입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이 없고 목회자로서의 자질이 풍부하며 성도들을 품을 수 있는 따스한 가슴이 있다 해도, 대형교회 부교역자 출신이나 대형교회의 추천서를 받을 수 없는 목회자들은 어디 명함을 내밀 데가 없습니다. 대형교회 목회자들에게 잘 보이지 않고도 청빙을 받는 일은, 그야말로 '하늘에 별 따기'입니다.
교회에서 청빙을 진행할 때도, 청빙위원회 장로들이나 잘 아는 분들을 통해 성도들의 눈을 흐리게 한 뒤 청빙받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교회가 청빙을 진행할 때는 전 교인에게 잘 알려서 소통하고 오래 심의한 끝에 이뤄져야 하지만, 일부 교회 권력가들의 놀음판속에서 청빙이 이뤄지곤 합니다. 결국 그렇게 들어온 목사들은 말썽을 일으킬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청빙이 되어 위임목사만 되면 아예 끝이라는 생각으로, 사전에 치밀한 물밑작업을 통하여 위임목사로서의 권한을 쟁취하는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꼼수가 들어 있습니다. 위임식을 하기 전에는 많은 성도들에게 존경의 표시를 한다든지, 별의별 '쇼'를 다 합니다. 간이라도 내어줄 듯한 제스처를 취합니다. 무조건 위임식만 하고 보자는 식입니다. 위임식만 하면 정년이 보장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위임식이 끝나면 교회 안에서 분란이 싹트는 경우가 많습니다. 목회자가 본색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말과 행동에 있어 언행일치가 되질 않고 잇속 챙기기에 급급하다 보니, 목사에게 실망해 떠나가는 성도들이 늘어갑니다. 분쟁이 격화되면 교회가 둘로 쪼개지는 사태도 생깁니다. 일부 성도들이 그런 목사와 부화뇌동하면, 바른 생각을 가진 성도들과 갈등을 겪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목사도 있습니다. 토요일이라면 다음 날인 주일에 성도들에게 맛있는 '영혼의 꼴'을 먹이기에 최선을 다해야 할텐데, 결혼식 주례를 두 군데나 하는 것입니다. 한 곳은 부목사에게 맡겨도 될텐데 말입니다. 그 목사는 설교 준비를 언제 하는 것일까요? 주례를 하게 되면 거기서 나오는 주례비가 짭짤하기 때문에, 주일 설교 준비보다 결혼식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게 되면 설교는 옛날에 했던 내용을 재탕하게 되고, 주절주절 본문과 관계없는 이야기만 늘어놓게 됩니다. 그 목사는 듣는 성도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목사의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귀담아 듣고자 하는 성도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주일 저녁예배, 수요기도회, 금요철야예배, 새벽기도회 설교는 또 어떻습니까? 성경 말씀과 전혀 무관한 세상 이야기 또는 자신과 코드가 맞지 않는 성도들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위임목사 제도가 없어진다면, 목사들의 성도들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늘 긴장하면서 말씀을 연구하고, 많은 서적들을 참고하게 될 것이며, 좋은 꼴을 먹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잘못 하면 교회를 떠나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위임목사 제도가 없으면, 위임목사들이 지금보다 훨씬 최선을 다해 양들을 돌볼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또한 빈부의 차이를 두지 않고 모든 양들을 골고루 사랑하게 될 것이고, 교회 성도들을 위해 열심히 수고하는 목회자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하는 목회자를 내쫓는 성도들이 누가 있을까요? 위임목사 제도가 없더라도 말입니다.
목자는 오직 양떼들을 위해 있는 것입니다. 양들이 아프거나 슬픔을 당했거나,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거나, 아니면 불행이 찾아와 괴로워할 때 다가가 위로해주는 것이 목자가 할 일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양들이 좋아하고 순종하며 따르지 않겠습니까?
더불어 원로목사 제도도 폐지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원로목사가 되기 위해 성도들을 대상으로 투표를 하게 되는데, 그 순간까지는 인심을 얻기 위해 갖은 수고를 다합니다. 원로에 대한 예우를 쟁취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교회가 분열 위기에 있음에도, 후임 목사가 이단 소리를 듣는데도, 성도들과 교회를 위해 오랜 기간 몸담았던 교회를 위해 만사를 제쳐두고 와서 신음하는 양들을 위해 수고를 해야 하는 것이 원로목사 아니겠습니까? 사정이 그러함에도 얼씬도 하지 않는 원로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원로장로라는 사람들은 교회에 위기가 왔다는 명목으로, 또는 교회에 화평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그들과 함께합니다. 이런 자들을 위한 원로 제도가 꼭 필요할까요? 원로가 되면 천국 백성이 되는 인증서라도 얻게 되는 것일까요?
모든 제도는 힘없고 불우한 이웃, 그리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한 제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잇속만 챙기는 지도자들의 편에서 법을 만들 게 아니라, 연약한 성도들을 위해 법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위임제도와 원로제도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1순위로 사라지도록 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교회의 제도는 서로 화평하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모든 것이 탈바꿈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서로 사랑하라는 법을 토대로 서로 소통하고 나누며 사랑할 때, 우리의 믿음생활이 한층 가벼워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할 때, 신앙인들의 무거운 짐과 멍에를 지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제도를 폐지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4차산업의 진입로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를 절실히 느끼고 깨달아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샘솟듯 충만한 아이디어가 창출되지 않는다면 무한한 발전 가능성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신앙인들에게 가능하도록 허락하신 모든 범위 안에서 최대한 이웃을 돌아보며, 모든 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포용과 함께,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복음의 전도사들이 돼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방법이요, 주님을 미소짓게 하는 것입니다.
이효준 은퇴장로(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