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첫 1천 만 관객 돌파 영화로 여름 시즌 흥행몰이를 했던, 공유·마동석·정유미 주연의 <부산행>이 TV 추석 특선영화로 상영중인 가운데, 칼럼니스트인 이영진 교수의 영화평이 관심을 끌었다.
이 영화는 '좀비물'로는 드물게 흥행에 성공했고, 영화를 만든 연상호 감독은 애니메이션 <사이비>를 통해 종교계, 특히 기독교계를 고발한 경력이 있다. 아래 칼럼 주요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다소 포함돼 있으며, 좀비의 기원과 현대적 좀비의 변화, 한국식 좀비와 역사적 좀비 등 좀비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등장했다.
특히 별점의 경우 5개 만점에 4개(★★★★☆)를 선사하면서, "가족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는데, 가족 곁에 함께할 수 없다"는 인상적인 '한 줄 평'을 전했다. 다음은 칼럼 주요 내용.
영화를 관람하고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인터넷 포털 다음(Daum)이 이 영화의 광고주인지, 아니면 투자자인지 자료를 찾아보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발생한 좀비들의 살육 장면을 반(反)정부 폭력 소요 사태로 둔갑시켜 방송하는 TV 뉴스 방송사 이름은 가명을 사용하고 있으면서, 사태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댓글 검색하는 장면에서는 'Daum'이라는 포털 실명이 선명하게 클로즈업되는 바람에, 마치 'Daum'이 보다 진실에 종사하는 무엇처럼 비쳐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클리셰는 관객으로 하여금 좀비들이 정부의 희생자라는 인상을 강제한다. 하지만 '좀비'란 그런 것이 아니다.
1. 좀비란 무엇인가
좀비(zombie)는 19세기 초 낭만주의 시인 로버트 사우디(Robert Southey)가 브라질 역사를 다루면서 처음 언급했던 'zombi'라는 말에서 영미권 어휘로 들어온 말이다. 이 어휘적 유래에 유념하는 것이 좋다. 지리적 유래보다 더 역사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의 전래도 지리적이라기보다는 언어 전래에 속한다. 이 문제는 마지막에 다시 다룰 것이다.
좀비가 서구적인 의미에서 미국화 된 시기는 20세기 초로 알려졌지만 유럽 쪽에서는 로버트 사우디의 작품 외에도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같은 완성도 높은 소설이 나오기도 했다(1932). 프랑켄쉬타인도 일종의 좀비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으로 미루어 볼 때 좀비의 문화적 컨셉은 산업화·기계화에 따른 회의적 인간성을 향해 경종을 알리는 코드겠지만, 20세기를 넘어 21세기에 진입한 후에도 좀비는 사라지지 않고 더 많은 컨텐츠로, 특히 미국발 좀비 영화로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최근 브레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월드워Z>도 그 중에 하나다.
익히 알려진 대로 좀비는 부두교와 관련 있다. 부두교는 본래가 샤머니즘 성향의 종교로서 그 시원은 아프리카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대적 의미의 부두교는 아이티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하는 것이 일반적 견해다.
아이티의 원주민은 16세기 초까지만 해도 13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15세기 말에 아이티를 점령한 스페인에 의해 노예화되면서 원주민이 10여년 만에 6만명 미만으로 감소, 아이티 원주민은 노동에 적합하지 않다는 스페인의 판단에 따라 16세기 초 아프리카 노예들로 대체되고 아이티 본 원주민들은 멸종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다 이 대체 노예들이 1629년 경 아이티로 밀고 들어온 프랑스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들의 부두교는 카톨릭과 융합되기에 이른다. 이때 부두교가 가톨릭과 잘 융합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톨릭의 성물 숭배 덕택이다. 여러 정령을 숭배하는 부두교와 여러 성인의 성물을 기리는 가톨릭이 이들 대체 노예였던 흑인들의 부두교와 잘 맞아떨어졌던 것이다.
이들의 부두교가 난민과 함께 세계 2차대전 이후 미국 전역에 퍼졌지만 토속적으로 흑인 인구가 많은 미국 뉴올리언즈의 부두교는 가톨릭과 결합된 이들의 부두교와는 다른 색채를 보이기도 한다.
좀비의 특성은 콘텐츠마다 다르게 표현되지만, 대개 포악한 기질로 변한 불사의 움직이는 시체로 어둠 속에서는 보지 못하고 듣기만 한다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부두교에서 좀비는 사제에 의해 영혼이 뽑혀나간 존재를 일컬었다. 사제에게 영혼이 뽑힌 좀비는 모든 의식 체계를 잃고 명령에만 복종해야 했다. 부두교 자체가 활홀경에 빠지기 위해 더러 마약 같은 약물까지 이용하는 샤머니즘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사람의 영혼을 뽑아낼 때 약물을 먹이고 두들겨 패서 좀비화 시킨다는 사례 보고도 있다.
그래서 부두교 신자는 좀비 자체보다는 좀비가 될까봐 두려워한다고 한다. 좀비가 되는 것은 이 종교에선 일종의 형(刑)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좀비화 된 자들은 노예로 부리거나 아예 팔기도 했다는데, 중앙아메리카에는 실제 노예 농장이 있었고 아이티가 위치한 히스파니올라 섬 주변에는 최근까지 성행하였다고 한다. 성노예를 포함한다.
2. 현대적 좀비
그러나 영화 <부산행>에서와 같이 이제 한국형 좀비까지 등장하기에 이른 21세기에는, 좀비를 다르게 정의하는 것 같다. 물리력에 의해 노예를 만드는 것이 강력하게 금지된 불법인 이상, <부산행>에서도 보았듯 바이러스로 은유된 바로 그것은 다른 의미의 감염을 뜻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영혼이 빠져나간 듯한 감염 행태를 세 가지로 정리하였다.
①생태 환경적 좀비
영화 <월드워Z>는 설득력 있게 인류 전반에 감염된 포악과 광포를 설명한 바 있다. 핵폐기물 내지 원전 사고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대기오염, 수질오염, 그에 따른 조류, 가축에게 발생하는 잦은 전염병의 두려움 속에 살아가는 인간 군상은 숨만 쉴뿐 생태계 최상위 계층이 갖는 네페쉬(נֶפֶש)로서 의무를 상실하였기에 좀비라는 형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세계는 어느 한 개인이나 국가가 선도해서 자정시킬 수 있는 한계치를 넘어, 좀비가 세상을 멸망시키는 게 아니라 실상은 생태와 환경 파괴의 결국이 좀비를 양산한 것이다. 그 생태와 환경의 파괴는 인간 집단의 이기심 즉, 그들이 만든 사회가 그렇게 만든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2011년 초 우리나라에서 발생하였다. 구제역 발생으로 무려 200만 마리라는 엄청난 규모의 살아 있는 돼지를 살처분한 것이다. 염소와 사슴 수천 마리까지 포함된 이 대량 학살은 산채로 땅에 묻어버리는 형식으로 자행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 병은 '동물의 병'이라기보다는 '(인간의) 경제 병'이었던 것이다. 영화 <부산행>의 시작은 구제역 당시 가축을 잃은 한 축산 농부의 의심과 분노로 담고 있다.
②사회적 좀비
정치·경제를 포함한 오늘날 사회가 안고 있는 가장 큰 난맥상은 모든 체제 자신의 붕괴에 있다. 그것은 개별 국가나 어느 한쪽 체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세계적인 종말 현상이다.
1980년대 말 동구권의 붕괴를 보고서 공산주의의 몰락이라며 박수를 쳤지만 사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본주의의 위기를 목격하는 시대에 다다르고 말았다. 양자의 체제는 이념이 아닌 자본이었던 것이다(공산당 이론은 <자본론>이 아니었던가). 그리하여 되살아난 신마르크시즘은 성장의 한계를 역설하여 분배를 주창하고 자유주의자들은 여전히 자본 성장의 가능성을 설파하며 사투를 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영화 <부산행>에서의 재앙은 부당한 자본을 작전으로 살려낸 펀드 매니저를 그 원인균으로 지목한다. 펀드 매니저가 약물을 쓴 적은 없지만, 펀드 매니저에게 자본을 빼앗긴 개미들은 좀비로 투영되고, 펀드 매니저 자신은 개미핥기라는 오명을 입는다.
③종교적 좀비
끝으로 종교적인 좀비화인데, 여기서는 어떤 특정종교를 예시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앞서 유래에서 살폈듯 '좀비(화)' 자체가 종교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좀비' 자체가 영(혼)이라는 뜻이므로 사제에게 영혼을 강탈 당한 모든 신자는 이미 좀비에 다름 아닐 것인데, 그와 같은 이단들이 성행하고 또 회중들에게 먹혀들어가는 이유는 이 같은 좀비 컨텐츠가 성행하는 이유와 맥을 같이 한다. 종교적인 용어로 그런 상황을 '묵시적 상황'이라고 부른다.
묵시 상황(ἀποκάλυψις)이란 한마디로 악이 득세하여 판을 치는 시대를 이른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안 계신 것만 같은-왜, 심판이 임하지 않으므로-시대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는 그렇게 좀비 취급을 받거나 혹은 좀비들이 판을 치는 시대의 연속 처럼 묘사되는 것이다. 그 책의 제목이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이기 때문이다. 정녕 이 시대가 그러한가? '종교 좀비'의 총아인 IS를 보라.
3. 한국식 좀비
좀비를 소재로 삼은 대부분의 플롯이 그러하지만, <부산행>의 좀비 역시 희생자인 동시에 제거함이 마땅한 구타의 대상이기도 하다. 좀비는 선량한 희생자인가 강력하게 제거해야 할 대상인가? 이런 양가적 상황은 경제·문화가 온통 정치 이념에 매몰된 듯한 우리나라에서 유독 심화되고 있는 현상일 것이다.
이를테면 TV를 통해 정보를 취득하는 사람은 인터넷 댓글만 보고 정보 취득하는 사람에게 좀비라 부를 것이고, 반대로 인터넷 댓글을 더 신뢰하는 사람은 TV나 다른 매체를 인용하는 사람을 벌레로 간주하는 현상이 작금의 우리 한국식 묵시의 현상이다. 이 영화가 그런 묵시 현상에 부채질하는 듯 보인다.
왜냐하면 "대규모 폭력사태가 이어지고 있으나 군대병력을 충원하여 국민여러분을 안전하게 지켜드리겠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라는 이 낯설지 않은 발표를 하는 영화 속 '안행부(안전행정부)'가 대체 어떤 정부의 안행부인지 실명을 소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Daum과는 달리). 다만 배경에 이런 글귀를 넣고 있을 뿐이다. '희망의 새 시대'. 아마도 좀비가 발생한 그 정부의 국정 표어인 듯하다.
4. 역사적 좀비
이제 최종적으로, 역사적 실존으로서 한 좀비(Zombie)에 대한 소개다. 이상 열거한 지리적 유래나(아이티 따위의) 의미화된 기호보다 더 역사적이라고 한 것은, 이 좀비가 앞서 로버트 사우니의 글에 나오는 인물로서 'zombi'라는 말로 가장 처음 소개했다는 점에서 그 기원이 언어적이기 때문이다(히브리어와 희랍어 원전이 존재함에도 영어 성경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쯤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좀비라는 단어의 유래를 찾으면서 거의 대부분의 자료에 나오는 이 낭만주의 시인 로버트 사우디의 작품에 (좀비라는 말이) 처음 기록되기 시작했다는 사실만을 옮겨갔지, 그가 어떤 컨텍스트 속에서 그 말을 썼는지는 거의 접근을 하지 않은 듯 보인다.
어쩌면 그 (백과)사전류들 역시 내용은 간과한 상태에서 기록 사실만 기재해갔을 수 있다. 인용의 인용만을 거듭해온 셈이다. 그 바람에 이 '좀비'에 얽힌 쟁점은 묻히고 말았다. 단지 흉측한 시체로.
다음 인용 단락은 그가 History of Brazil이라는 세권으로 구성된 방대한 역사서를 남기면서 제3권에서 최초로 좀비를 기록했던 바로 그 대목이다.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그들의 수는 날로 증가하여 자유를 찾는 노예들 그리고 정의로부터 도망친 유색인 남성들로 채워져 나갔다. 그렇게 리크루팅 된 그 집단은 여성과의 성 비율이 문제였다. 여성이 필요했던 것이다. 첫 로마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이들 흑인들은 강제로 취하는 것 외에는 여성을 가질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침투로를 파고 들어와 흑인 여성들과 혼혈 여성들을 강탈해갔다.
그리하여 포르투갈인은 자신들의 아내들과 품속에 있던 딸들을 위해 그 원수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이든지 몸값으로 지불해야만 했다. 그들의 짧지만 잊히지 않는 역사의 이 실제적이면서도 유일한 기록은 정작 그들을 소멸시킨 장본인들로부터 기록되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정의'로 묘사됐고 그들의 운명을 위해, 그리고 그들의 인격을 위해, 존경심 없이는 읽히는 법이 없다. ... [Robert Southey, History of Brazil vol 3. (1819), 23]"
이 문맥의 배경은 브라질 식민지화 과정에서 포르투갈이 쇠락한 틈에 자기들의 자치정부를 세워가는 흑인들을 향해 묘사한 말이다. 시인 사우지는 계속해서 그들의 우두머리를 소개한다.
"그들(약탈자들)은 한 선출직 우두머리 아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용기 만큼이나 정의롭고 그런 그의 정의를 위해, 그리고 한편으론 자기 일생의 정권을 거머쥐려고 선출되었다. 그리고 그의 선한 평판을 체험한 모든 사람은 그를 카운셀러로 대했다. 사람들은 완벽한 충성심으로 그에게 복종했다. ... 아마 이러한 종교적 기운은 그 복종에 밑거름이었을 것이다. (그) '좀비'를 위해서 말이다. 이 단어는 신성에 붙이는 이름으로서, 앙골라인의 방언이다.
그들은 기도를 흉내내고 십자가를 사용했으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아프리카 우상·미신을 섞어낸 몇몇 의식을... 고안해냈고, 아울러 그들의 자유에 따른 국가를 세웠다. 심지어 그들은 자기들의 치안을 세워, 도둑, 강간, 살인 같은 범죄들에 징계까지 하였다. [History of Brazil vol 3. (1819), 23]"
영국 시인으로서 문학적 필치를 가미해 담아낸 이 역사 기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zombi란, 다름 아닌 이 글에서 소개한 그 익명의 '선출직 우두머리'인 것이다. 납치와 강간을 일삼던 범죄자 집단이면서 나름 법까지 세워나가더라며 시인을 개탄시킨 이 zombi는 도대체 누굴까?
시인다운 아주 완곡한 필치로 zombi로 규정당하고 있는 그는, 바로 17세기 말 브라질에서 유색인종을 규합해 (유색인종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영웅으로 추앙 받는 실존 인물, 줌비 두스 팔마레스(Zumbi Dos Palmares)였던 것이다. 그의 이름이 바로 Zumbi였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오늘날 우리가 소개 받고 있는 Zombie는 저 부두교의 시체 처리된 좀비가 아니라, 보다 구체적 역사적 인물, 바로 Zumbi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 경로는 지리적 경로보다 더 적확한 절대 경로로서 기원을 표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흑인·유색인종이 좀비라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Zombie가 흑인이었다는 사실은 1차적 기표지만, 로버트 사우지의 언어에 담긴 기의에 따르면 그것은 유색인종이 아니라 '불법'으로 '법'을 세우려는 모든 개인과 집단의 영이 바로 좀비라는 기표의 해석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의 묵시적 현 상황을 판단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서로가 서로를 '불법으로 법을 세우는 자'로 규정하고, 또 그렇게 귀결을 짓기 위해 마치 좀비와도 같은 콘텐츠들을 끊임없이 양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에필로그
초입에 이와 같은 클리셰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영화임에도 이 영화 <부산행>이 휴머니즘으로 끝을 맺을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배우들의 연기 덕택일 것이다.
특히 주인공으로 열연한 '공유'는 영혼이 빠져나가는 상황에서, 눈이 멀었지만 진실을 볼 수 있다는 연기를 실감나게 해 주었다. 그것은 마치 눈에 비늘이 씌워진 것과도 같은 우리의 순간들로 갈음할 수 있다(cf. 행 9:1-18).
우리는 누구나 다 어떤 면에서 보기는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듣지 못하는 존재들이 아니겠는가(막 4:12; 마 13:14; 행 28:26; 사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