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합 왕 때 그가 시돈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하면서부터 이스라엘의 비극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과 결혼을 했어야 했는데 그는 신앙이 이성 자율주의적 경향으로 제멋대로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정통성을 깨뜨리고 자기 마음대로 이방여인을 왕비로 맞이하게 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이 여인이 시집오면서 어렸을 때부터 섬겨왔던 미신우상을 가지고 왔고 원래 의지심이 약하고 인격이 균형을 이루지 못한 아합을 쉽게 사로잡아서 왕비가 왕을 조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왕비인 이세벨이 실제적인 통치권을 잡게 되면서 전 이스라엘의 비극의 불씨가 되었던 것입니다.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기 위한 제사장을 850명이나 세워서 국비로 생활을 보장하게 했고 하나님의 진리의 사역자들을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권력으로 바른 진리를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줏대 없이 신앙인격이 뿌리내리지 못한 믿음 약한 사람들은 우선 육신의 형편이 덜 시달리며 보호를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하나님 신앙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벌을 내리셨는데 3년 6개월 동안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고 밤에 이슬도 내리지 않게 하심으로 그 땅에 초목이 살 수 없도록 하셔서 사람들마저 굶어 죽을 형편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인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을 받은 것이 본문의 엘리야입니다. 그는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아합 왕을 찾아가서 “나의 섬기는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우로가 있지 아니하리라 하니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보호를 받아 아합에게 잡히지 않고 하나님이 지시하신 그릿 시냇가에 가서 숨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의 다음 지시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까마귀들이 아침에도 떡과 고기를, 저녁에도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게 하시고 그 시냇물을 마시며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구속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붙들어 쓰시는 사역자가 하나님이 쓰시는 일에 열성을 다해 충성스럽게 봉사하는 한 최저 생계대책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책임져 주신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으로 그렇게 그곳에 있던 중 비가 내리지 않으므로 시내의 물이 다 말랐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물을 찾아 나서든지 땅을 파보던지 했을텐데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람인지라, 하나님이 지금까지 책임져 주셨으니 앞으로도 책임져 주실 것이 믿어졌기 때문에 그는 강물 마름으로 인해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믿어지는 믿음입니다.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유하라 내가 그곳 과부에게 명하여 너를 공궤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종은 시련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 앞에 육신의 형편처지가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지라도 자기마음대로 행동하지 않는 하나님 절대 제일주의로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을 확인하신 후 지금까지 겪었던 고난과 시련을 벗어나게 하시고 훨씬 더 나은 대책을 예비해 주심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릿 시냇가는 편히 누워 잘 수도 없는 곳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곳에서 여러 날을 기도하며 보냈을 것입니다. 이런 엘리야를 위해 하나님은 사르밧 과부를 통하여 흉년이 끝날 때까지 그를 공궤하도록 예비해 주신 것은 그가 그릿 시냇가에서의 시련에 합격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엘리야가 사르밧 성문에 도착했을 때 한 과부를 만납니다. 엘리야는 “청컨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나로 마시게 하라”고 청하고는 물을 가지러가는 그 과부를 행해 “청컨대 네 손에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이때 그 과부는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무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말합니다.
이 여인은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는 고백을 한 것입니다. 지금의 형편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고백입니다. 이때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두려워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이를 잘못 생각하면 얼마 남지 않은 음식을 하나님의 사자라는 사람이 말재간 떨어서 빼앗아 먹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엘리야가 하는 이 말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사르밧 여인도 마찬가지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이 말씀에 기대를 걸고 엘리야의 말대로 했습니다. 그것은 행동으로 나타난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신 복음의 말씀을 먼저 듣고 믿어져서 행동으로 실천해야만 하나님이 말씀하신 조건이 그대로 성취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일 후에 그 집 주모 되는 여인의 아들이 병들어 증세가 심히 위중하다가 숨이 끊어졌습니다. 이런 일이 왜 생겼을까요?
엘리야를 처음 모셨을 때는 아마 구세주와 같이 하나님처럼 모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사르밧 여인은 자신의 것으로 공궤하듯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 집에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은 과부나 그 집 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엘리야를 섬기는 몫으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망각하고 섬기는 일을 귀찮고 부담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들로 시험에 든 그 여인에게 하나님은 몽둥이를 드신 것입니다.
아들이 죽고나자 그 여인은 엘리야에게 “하나님의 사람이여 당신이 나로 더불어 무슨 상관이 있기로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또 내 아들을 죽게 하려고 내게 오셨나이까”라고 푸념합니다. 벌써 모자가 죽었을 수 있었다는 생각은 못하고 그동안 엘리야 덕분에 살아왔던 일에 감사할 줄 모르고 악담을 퍼붓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엘리야는 죽은 그 아이를 달라하여 그가 우거하는 다락방으로 옮겨 가서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합니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또 내가 우거하는 집 과부에게 재앙을 내리사 그 아들로 죽게 하셨나이까”하며 그 또한 하나님 앞에 원망하는 듯한 기도를 합니다.
그동안 할일없이 과부의 공궤만 받으며 살아왔던 엘리야는 하나님이 내리신 재앙으로 말미암아 흉년이 끝날 때까지 이곳에 있어야 하는데 이번 일로 인하여 이곳에서 쫓겨나게 생겼다고 푸념하는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와의 만남과 그 아들의 죽음은 육신의 생계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이 여인이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진리를 깨닫고 회개하고 성령의 은혜를 받음으로 영적인 구원까지 얻어야하는 목적으로 맺어주신 것이며, 나태해진 하나님의 사자인 엘리야를 각성시켜 사역에 있어 새 출발시켜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 사르밧 과부가 엘리야에게 ‘내 죄를 생각나게 하고’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 일을 시도하신 이유였습니다.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삶속에서 고난을 겪는 것은 매한가지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예수 잘 믿는다고 절대로 고난당하지 않게 해주신다는 약속은 없습니다. 도리어 영적인 소망에 믿음으로 온전한 결실을 맺게 하기 위하여 환란을 당하게 하십니다. 때론 하나님이 질병을 주시고 실패와 쓰라린 수모와 곤욕을 당하게도 하십니다. 억울한 손해도 보게 하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목적은 세상조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해 놓은 하늘의 신령한 소망을 위한 것인데 그것을 위한 자격 갖추기를 서둘지 않고 허무맹랑한 일에 골몰하며 시간과 정욕을 잘못 허비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일부러 우리가 고난당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 여인이 당하는 고난은 바로 그와 같은 목적이었습니다. 그 아들이 죽음으로 인해 자신의 무슨 죄 때문에 아들이 죽어야 하는지 생각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도한 일이 적중되어 성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여인이 회개하고 엘리야도 과부에게 영적인 소망을 일깨워주지 못했음을 깨닫게 됩니다. 과부의 아들을 죽게 하심으로 인해 엘리야와 과부에게 기대하셨던 영적인 소망이 바른 자세로 회복을 보게 되니 죽은 아들의 영혼을 되돌려 주심으로 되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여러분의 교회, 여러분을 목양하는 목사의 인연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잘 생각하셔서 하나님과 일치하는 해답을 얻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