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레반 무장단체에 의해 살해된 고 배형규 목사가 아프간으로 출국하기에 앞서 가족들에게 유서를 남기고 떠났던 것으로 밝혀졌다. 7월 29일 분당 샘물교회와 안양 샘병 원 등에 따르면 배 목사는 지난 13일 아프간으로 봉사활동을 떠나기 전 자신의 장기와 시신을 의료연구용으로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22명의 성도들을 이끌고 떠나는 자원봉사임에도 유서를 쓰고 떠났다는 점이 예사롭지 않다. 비장한 순교정신이 없고서야 어찌 그런 준비를 하고 떠날 수 있었을까? 배 목사는 출국 전 만약의 경우를 대비, 남모를 죽음까지도 각오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그의 죽음을 순교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훌륭한 영적 지도자의 철저한 프로정신과 십자가의 참 사랑의 소유자가 아니고서야 감히 엄두도 못 낼 결단이다.

이 피랍 사건을 통해 온 국민과 세계가 충격에 빠져있으며 매일 언론매체들의 보도와 함께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여과 없이 쏟아지고 있고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각은 대개 부정적이란 점이다.

첫째, 왜 테러와 분쟁이 끊이지 않는 남의 나라에 가서 스스로 위험을 자초 하는가? 둘째, 왜 위험지역에 허락도 없이 들어가 활동하는가? 셋째, 한국교회의 무분별한 선교 열정이 이러한 화를 불러 일으켰다. 넷째, 다른 종교를 존중 하지 않고 자기만 옳다고 여기는 독단이 이러한 사건의 원인이 되었다.

위에 비판한 내용들은 그 나름대로 타당성이 있으며 한국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들이다. 그러나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한편으로 치우친 시각임을 또한 부정할 수 없다. 그러기에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언론이나 인터넷에 제시되어 있는 다양한 입장과 견해들에 대하여 노출된 기독교 선교의 문제점들도 인정하고 개선해야 하겠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 잃어버릴 수 없는 내용들이 무엇인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첫째, 세계 역사는 각 나라들이 서로 얽혀진 관계 속에서 발전되어 왔으며 어렵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소위 우방 국가들의 도움을 받아 문제들을 해결해 간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역사만 보더라도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나 6.25의 동족상쟁을 해결한 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이 아니었다. 물론 혹자는 우리나라를 도운 것은 그 나라들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 것이라고 반론할 것이다. 그 말도 맞다. 그럼에도 그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한국사회의 모습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70-80년대 서슬이 퍼런 독재정권하에서 신음할 때 세계 여러 나라의 의식 있는 지도자들과 시민들이 독재를 비판하며 민주화를 위한 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응원하고 후원하였다. 선교의 입장에서 정리하면 더욱 그렇다. 조선후기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한 선교사들의 피 흘림이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의 기독교강국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을 것이다.

알려지지도 않은 작고 가난한 나라에 와서 벽안의 주의 종들이 수없이 죽음을 당한 것이 헛된 것 같아보여도 그 피가 이 땅의 복음을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작금 우리의 주장대로라면 스스로 위험을 자초한 일이었고 무분별한 선교 열정 이였으며 타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독단이며 그 나라 문화를 인정하지 않는 독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남의 나라에 허락도 없이 들어가 활동한 무법자들이었다.

물론 단기선교활동이 주는 유익함은 너무나 많다. 단기간의 활동이긴 하지만 현지사회에 필요한 도움이 되며 참여한 사람들의 세계관이 확장되는 유익함을 경험하게 한다. 풍요로운 삶이 있기에 우리 젊은이들이 방학을 이용하여 다양한 문화를 체험하고 견문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은 교회뿐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도 세계시민정신을 함양하는데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점점 증가하는 교회들의 단기 활동들이 현지 특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진행하는 자기중심적 활동은 오히려 현지 교회나 선교사들에게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한 두주의 짧은 기간에는 효과적인 활동을 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송하는 교회는 비장한 선교 열정을 가지고 준비한다. 혹 교회들 간의 경쟁적 동기와 욕구에 의해 진행되는 단기 활동들이 있다는 혹평이 있을 수 있으나 대부분 교회는 그렇지 않다. 여름방학 때 동남아, 중앙아시아 행 비행기를 타보면 절반 이상이 교회 팀이라는 말을 듣는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어느 민족이 주의 복음을 위해 이런 헌신을 하는가? 그런 모습들을 보고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며 미래 선교 대국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어 대견스럽고 자랑스러울 따름이다.

모든 것이 처음부터 다 완벽할 수는 없다. 시행착오도 있을 수 있다. 또 선교를 전체적으로 보지 못하고 자신의 소속 교회의 요구에 집중하며,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하는 마음을 훈련받지도 못하고 선교열정만으로 찾아가는 프로그램들이 역기능들을 초래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사건으로 인해 막 시작한 전 세계 지역에서의 한국인의 헌신과 봉사활동이 위축되지 않아야 한다.

불과 30여 년 전의 보릿고개를 넘어서고 이제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고자 전국가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이 때, 교회도 발맞추어 효과적인 선교 훈련과 방법을 통해 업그레이드된 노하우를 연구하고 정립 할 때이다. 진정한 기독 선진국은 누가 뭐래도 다른 사람들을 돕는 봉사활동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기근에 시달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양식의 풍족함을 가진 사람들이 나누어야 하며, 전쟁과 분쟁으로 고통 받고 있는 지역의 사람들을 평화로운 지역의 사람들이 여러 형태로 도움을 주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결코 비난해서도 비난받아서도 안 된다.

피랍된 교우들은 일부 사회에서 힐난하고 있는 방식으로 무분별하게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내전의 위험한 상황임을 알면서도 자신들의 짧은 휴가를 봉사활동을 위해 바치려던 따뜻한 마음을 가진 헌신자들이다. 이번 사건을 한 교회의 무모하고 무분별한 행동으로만 간주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도 전 세계에서 전쟁과 기근으로 간절한 도움을 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다. 그 상황이 어렵거나 위험하다고 외면할 수 없다. 현지 상황을 잘 이해하고 참여하는 봉사자들의 안전 대책을 위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준비해야 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선교나 봉사활동은 우리 중심이 아니라 현지인들의 필요에 맞추어 진행되어야 하며, 그들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수행하는 것을 배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 하라” 하신(마 10: 16) 이유가 여기에 있다.

피랍된 가족들은 물론 온 국민의 가슴도 찢어질 듯 아프다. 연약한 여성을 골라 인터뷰를 허용한 납치범들의 의도는 쉽게 짐작이 간다.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려는 비열한 작태는 마땅히 단죄되어야한다. 병들고 허기진 자기 나라 사람들을 도우려고 들어간 봉사단원들을 납치해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인솔한 목사 및 성도를 살해하고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협박의 수위를 높여 가는 저들이 가증스럽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당연히 그들은 백배 사과해야 하며 즉각 인질을 풀어 주어야한다. 모두 풀려날 때까지 희망과 기도를 포기해서는 안된다. 심한 고통을 당하는 교회, 목사, 유족들, 애간장을 태우는 피랍 가족들, 눈물로 기도하는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기독신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