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완성했다고 느끼는 사람이 엄격하고 세심한 기준에 따라 삶을 끝낼 수 있도록 조력 자살을 합법화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최근 네덜란드 보건부 장관과 법무부 장관이 의회에 보낸 서한 내용이다. 네덜란드는 이미 세계 최초로 안락사법을 시행하고 있다. 불치병 환자가 고통을 참을 수 없을 경우 스스로 죽음을 택할 수 있게 하자는 법안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겠다는 게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살방조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불치병에 걸리거나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원한다면 죽을 수 있도록 돕는 것을 허용하겠다는 것이다. 이제는 고통의 정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치매 등 정신병 환자에게도 안락사를 적용하겠다는 게다.
이렇게 간다면 세상은 하나님의 법과 마음으로부터 심각하게 벗어나게 된다. 환경과 상황 때문에 하나님의 영역을 월권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고통을 덜어주자는 것 때문에 하나님의 영역인 인간의 생명까지 좌지우지하게 된다. 고통이 얼마나 힘들면 그런 삶을 선택할까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그래도 허용해서는 안될 법이다.
최근 어떤 분이 "미국이 아프다"는 글을 쓴 것을 보았다. 정치, 경제, 문화, 윤리적으로 아픈 곳들이 너무 많다. 더구나 대선을 앞두고 힐러리와 트럼프가 다투는 것을 보면 정말 미국이 아픈 게 맞다.
사람들을 보면 아파서 아우성들이다. 배우자가 외도해서 아파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업에 실패해서 온 가족이 아파하며 눈물 흘리는 가족들도 있다. 갑자기 찾아온 질병 때문에 아파하다 못해 분노하는 사람들도 많다. 어떤 이는 직장에서 다른 직원들과 관계가 꼬여서 눈물을 흘리며 아파하는 이들도 있다. '이렇게 아프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게 훨씬 더 낫겠다.'
이런저런 일들로 아파하는 그대여, 그대에게 다가오는 아픔이 도망가지 않고 떡 버티고 있더라도, 거기서 인생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아픔은 나만 겪는 괴물이 아니다. 아픔이 다가오면 나만 겪는 것 같아서 더 아프고 속상하고 억울하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라. 아픔이 없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는지. 다들 그렇게 사는 거다. 나만 그렇다고 자학할 필요 없다. 아픈 곳이 있지만, 안 그런척하고 그저 웃을 뿐이다.
아무리 아파도 그 아픔은 지나간다. 세상에 영원한 아픔은 하나도 없다. 좀 더딜지 몰라도 결국 다 지나가고 만다. 조금만 참으면 된다.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지금은 아무리 아파도, 지나가고 나면 한낱 추억에 불과한 것이니까.
슬픔과 아픔은 나누면 반감된다. 기쁨을 서로 나누면 배가 된다. 그러나 슬픔과 아픔은 나눌수록 줄어든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한다. 동반자와 가족, 공동체는 함께 울고 울기를 잘 해야 한다.
아픔은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우리를 강하게 만들고 성장시킨다. 아픔은 약골을 강골로 만들어 맷집을 길러준다. 아픔을 많이 경험한 사람은 웬만한 어려움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아프면서 자란다. 성장통을 겪고 나면 아이들은 부쩍 달라져 있다.
'내'가 아프다고 불평하고 원망하지 말자. '내'가 아프면 '너'도 아픈 법이다. 아픔의 짐을 져야 한다면 기쁘게 지고 가자. 징징 그런다고 사라지지 않고, 탓한다고 도망가지 않는다면, 차라리 올테면 오라고 당당하게 한판 붙자.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아픈 게 더 힘들다. 몸이 아픈 건 참을 수 있다. 그런데 마음이 아픈 건 정말 견디기 힘들다. 몸이 추운 건 옷을 껴입고, 담요를 뒤집어 쓰고, 보일러를 높이면 된다. 그러나 마음이 추운 건 그래서 해결되는 게 아니다. 몸이 아픈 것도 원망스러운데, 마음까지 아프게 하지 말자. 무시당하고, 버림당하는 그 마음이 오죽 아프겠는가?
우리가 아파하는 그곳에도 주님의 임재는 여전하다. 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은 우리가 눈물겹도록 아파하는 그곳에 함께 계신다. 자기 감정에 속지 말아야 한다. 신실하신 예수님은 약속을 반드시 지키신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팔리는 그때도, 애굽으로 내려가 보디발의 가정에 노예로 있을 때도, 안주인에게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도 하나님은 한결같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 하나님은 집에서 도망가는 하갈과 이스마엘을 버리지 않고 함께 하셨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레아와 함께 하셔서 자식을 잘 낳게 하셨다. 잘못한 것도 없이 사단의 장난에 참아내기 힘든 아픔을 겪는 욥에게 함께 하셔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으로 이끄신다.
너무 아파서 견디기 힘든가? 죽고 싶은 생각이 비집어 들어오는가? 그때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 아픔의 현장이 주님을 경험할 순간이다. 그곳만큼 강한 주님의 위로를 어디서 경험할 건가?
아픔의 순간에 바울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손길을 확신해야 한다. 어떤 일 앞에서도,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 너무 아픈 파편이 있어도 다른 파편은 즐겁고 기쁜 파편이 있다. 이 모든 종합품은 하나님의 걸작품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
예수님도 아픔을 당하셨는데, 우리가 당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뭔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인간이 당할 아픔을 다 당하셨다. 십자가에서 육체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다. 사람들의 비난과 비웃음과 조소를 당하면서 마음과 정신적인 고통도 당하셨다. 그렇게 친밀하던 하늘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영적인 아픔도 당하셨다. 그런데 우리가 아픔을 당하는 게 그렇게 억울한가?
아픔의 순간에 예수님처럼 '다가올 미래'를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은 인류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저주와 형벌을 감당하셨다. 한 알의 밀알로 땅에 떨어져 죽으면 어떤가? 한 사람의 죽음을 통해 인류 모든 사람들을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서 건져내지 않으셨는가? 지금 내가 당하는 아픔과 고통의 터널을 지난 후에 우리에게 다가올 새로운 세계를 미리 내다볼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하다.
아픔은 결단의 순간이다. 아픔 속에서 어떤 이는 견디지 못하고 떠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나고, 신앙을 떠나고, 교회를 떠나고, 심지어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아픔 속에서 어떤 이는 하나님께로 나오고, 돌아오기도 한다. 아픔은 우리에게 생의 중대한 결단을 요청한다. 그때 지혜로운 결단을 내리기만 하면 새로운 인생으로 도약할 수 있다.
죄악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아픔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이 예비하신 하늘나라에 가면 아픔이나 곡하는 것이나 눈물이 없다. 죄가 영향을 미칠 수 없기 때문에. 사단이 이미 완전히 결박되었기 때문에. 우리 내면에 악한 마음이 자리잡을 수 없기 때문에. 그때가 되면 주님이 우리의 눈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신다. 그날까지는 참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