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예수님께서 희랍어를 사용하셨는가?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처음 두 번의 질문에서는 “아가파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시고, 세 번째 질문에는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셨는가? 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예수님께서 이때에 희랍어를 사용하셨다는 전제하에서만 의미를 갖는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람어를 사용하셨을 것으로 추정한다. 하지만 요즈음은 히브리어를 사용하셨을 것으로 생각하는 학자들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당시에 일반인들은 팔레스타인을 포함하여 중동지역의 공용어인 아람어를 주로 사용하였으나 랍비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보수파 지식인들은 히브리어를, 진보주의적인 지식층 및 상류층은 희랍어를 주로 사용하였다. 로마 군인들과 관리들은 희랍어와 라틴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이들과 접촉하는 사람들 중에는 라틴어를 알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는 명패가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고 희랍어로 쓰인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요19:19).
당시 이스라엘의 종교단체들 가운데서 기독교공동체와 가장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쿰란공동체(Qumran Community)의 경우를 보면 발굴된 문서들 가운데서 공식적으로 발표된 문서의 수는 822개인데, 이들 중 대부분이 히브리어로 쓰여 있고 나머지 소수만이 아람어와 희랍어로 쓰여 있다. 그 정확한 수와 비율을 보면 그 90%에 달하는 736개가 히브리어로 기록된 반면 아람어로 된 것과 희랍어로 된 것은 각각 61개와 25개로 이는 각각 전체의 7%와 3%에 해당한다. 이로 보아 이 공동체는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고 희랍어를 사용하였으나 가장 많이 사용한 언어 즉 공식 언어는 히브리어였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들은 히브리어를 “계시된 언어”(revealed language), “창조의 언어”(language of creation)라고 하여 당시의 통용어인 아람어와는 구별된 언어 즉 거룩한 언어(sacred language)로 생각하였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초기 기독교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쿰란공동체의 회원들은 전에 사제였던 사람들과 이들의 추종자들로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구약 특히 모세 5경(Pentateuch)연구가 이들의 일과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초기 기독교인들보다는 지적 수준이 높았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두 집단의 공통점 중의 하나가 서로 자기들이 참된 이스라엘인들이라고 생각했던 사실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들이 사용한 언어에도 공통점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쿰란공동체와 같이 초기 기독교공동체에서도 히브리어를 선호하였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사실 참된 이스라엘인을 자처하는 기독교공동체가 아람어 대신에 히브리어를 선호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은 당연한 것이다.
사도행전 26장 14절에는 다메섹으로 가던 바울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히브리어로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있다. 열두 제자들보다 희랍어를 훨씬 잘 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바울에게 예수님께서 희랍어가 아닌 히브리어로 말씀하신 것을 보면, 분문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히브리어 대신에 희랍어로 말씀하셨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여기서 히브리어는 아람어를 뜻할 수도 있다. 실제로 막 15:34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히브리어가 아니라 아람어이다. 그런데 흥미 있는 것은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예수님께서 엘리야를 부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당시의 통용어인 아람어가 아닌 히브리어로 말씀하셨기 때문인지 모른다. 히브리어로는 “엘리 엘리 라마 아자브타니”이다. 만일 알아듣지 못했다면 이것은 당시의 공용어가 아람어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그것은 아마도 마가복음이 원래는 아람어로 기록되었거나 아니면 마가복음을 기록하는데 사용되었던 원본문서가 아람어로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이러한 추측이 옳다면 예수님께서 지식수준이 낮은 일반대중들을 상대하실 때는 아람어를 사용하시고 교육받은 자들이나 측근의 제자들을 상대하실 때는 히브리어를 사용하셨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희랍어를 사용하셨다는 기록이나 힌트는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께서 희랍어를 모르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만 예수님께서 희랍어를 사용하셨다는 언급이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뜻이다.
4. 히브리어성경과 70인 역
따라서 요한복음 21:15-17의 경우에는 희랍어 대신에 히브리어를 사용하셨을 것으로 보이는데, 히브리어에서 “사랑하다”라는 뜻을 지닌 가장 일반적인 단어는 “아하브”(bh’a;)이다. 이것은 아람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bh’a}}). 히브리어에서는 신적인 사랑과 인간적인 사랑의 구별 없이 “아하브”가 사용된다. 70인역에서 이 동사는 때로는 “필레오”로 때로는 “아가파오”로 번역되었다. 예를 들면 창 37:3-4에서 야곱이 요셉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아하브” 동사가 두 번 나오는데, 70인 역에서는 처음 “아하브”는 “아가파오”로, 두 번째 “아하브”는 “필레오”로 번역하였다. 따라서 70인 역에서도 “아가파오”와 “필레오”가 아무런 구별 없이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기술할 때는 거의 예외 없이 “아가파오”가 사용되었다. 말을 바꾸면 “아하브”가 신적인 사랑을 뜻할 때는 항상 “아가파오”가 사용되었으나, “아가파오”가 인간적인 사랑을 뜻하는 경우에도 사용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남녀 간의 무절제한 사랑 또는 육욕적(肉慾的; carnal)인 사랑을 뜻하는 말로 “아가브”(bg”[;)가 있는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과 혼음하였다고 비난하시는 말씀에서 사용되었다. 이 말이 에스겔서 23장에서 6번 나오는 것을(23:5,7,9,12,16,20) 제외하곤 그 분사형(participle )이 예레미아 4:30에 단 한번 나온다. 70인 역에서는 이 동사를 번역할 때에 세 개의 다른 동사를 사용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매음하다(엨포르네우오; εjκπορνε?ω)이다. 그 외에 “하솨크”(qv’j)란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사랑하다”라는 뜻 외에도 “좋아하다”, “무엇을 즐거워하다”는 뜻을 가진다. 이 말이 “사랑하다”라는 뜻으로 쓰인 예는 창 34:8과 신 21:11인데, 70인역은 이를 각각 “선호하다”의 뜻을 지닌 “프로아이루마이”(προαιρο?μαι)와 “마음에 두다”, “욕구하다”라는 뜻을 지닌 “엔튀메오마이”(?νθυμ?ομαι)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다. 그밖에 “사랑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로 신 33:3에 나오는 “하바브”(bb’j;)가 있는데, 70인 역에서는 이 말이 “아끼다”, “면하게 하다”(spare)의 뜻을 지닌 “페이도마이”(φε?δομαι)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아가파오”나 “필레오”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모두 “아하브‘인 것을 알 수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