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안벌어 주고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남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부인은 남편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이런 부인의 헌신에 남편이 감동할 줄 알고, 부인은 가끔씩 남편에게 묻습니다. “내가 돈도 못 벌어주는 당신을 두고 도망가지 않고 당신과 사는 것 고맙지 않아? 나를 얼마큼 믿어?” 그러면 그때마나 남편은 피식 웃으며 “51% 믿어”그러더랍니다. 정말 너무 무심한 남편이지요. 남편도 면목이 없었던지 이런 저런 사업을 하며 돈을 벌려고 무진장 애를 썼습니다. 그러다가 오히려 큰 부도까지 내서, 결국 감옥까지 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 남편을 부인은 여전히 사랑하고 섬깁니다. 감옥에 갇힌 남편을 면회 가서 어느 날 부인이 또 믿습니다. “당신, 이제는 나를 확실히 믿겠지? 감옥에 갇힌 당신을 섬기는 나를 보면서 말야. 나...얼마큼 믿어?” 그러자, 남편이 “51%” 또 그러더랍니다.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남편의 말이 의미가 있습니다. “당신은 아직도 모르겠어? 내가 51% 믿는다는건 다 믿는다는 거야. 49% 믿는다는 건 안 믿는다는 거구.” 의미 있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100% 의심하지 않는 것이 믿음일까요? 그렇게 말하면 사탄 마귀보다 믿음이 좋은 존재가 없습니다. 사탄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대번에 알아보았고 추호도 의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사탄이 믿음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의심하지 않지만 믿음은 없습니다. 믿음은 때로는 의심이 들고, 때로는 베드로처럼 물에 빠지기도 하고, 주를 부인할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다시금 예수님의 주되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자격은 없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철저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게 어떤 조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존재를 전혀 의심하지 않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자신을 의탁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신앙과 불신앙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주인이 누구냐가 신앙이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예수님이 주인입니까 ? 내 삶의 모든 것의 주인이시고 최고의 결정권자 이십니까? 그러면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믿음을 겨자씨에 비유 하셨을까요? 우리 믿음의 현주소가 겨자씨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잘 믿는다 해도 믿음은 겨자씨만 한 겁니다. 믿음자체가 능력이 있는게 아니란 말씀입니다. 주님을 믿기 때문에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주인이시기에 주인을 믿는 종의 가는 길을, 종이 하는 일을 그냥 구경하시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고려사항은 대상입니다. 같은 이야기이지만, 믿고 있는 내가 중요한 게 아니고, 내가 믿고 있는 하나님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더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착각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하나님보다 더 위에 두었습니다. 자신들이 믿고 있다는 것을, 기도하고 있다는 것에만 집중하니까, 하나님은 사라졌습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중세의 구교 카톨릭이 여기서 실수했습니다. 내가 잘하면 천국 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심지어는 헌금을 많이 하면 지옥에 있던 가족이 천국으로 간다는 겁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왜 나왔습니까? 정치적인 문제도 개입되었겠지만, 내가 믿고 있다는 것을 더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겨자씨 만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으니, 겨자씨만한 믿음으로 그 정도면 믿음이 조금만 크면 더 큰 일도 하겠네요?”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의 믿음이 크고 작고가 아니라, 내가 얼마큼 주님을 신뢰하는가가 믿음의 관건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크게 당황했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한 것입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죽은 자를 다시 살린다는 개념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지만, 그에게 대단한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라, 뭔가 다른 믿음의 종류가 있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도 믿기 힘들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서 신뢰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믿지 못하지만, 내 지성은 보잘 것 없지만, 내 신뢰라는 것도 하찮은 것이지만, 하나님의 선하심과 그 능력에 대해서는 확신하는 믿음이었던 것입니다.

의심하지 않는다고 믿음은 아닙니다. 그러나 믿음은 확실히, ‘의지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