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백일 넘게 ‘생명의 소중함’을 증명하려는 듯 가쁜 숨을 멈추지 않았던 김모 할머니가 10일 이 땅에서의 사명을 다하고 하늘로 돌아갔다. 김 할머니로부터 촉발된 ‘존엄사’ 논란은 이제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세브란스병원측은 비록 호흡기를 제거했지만 코에 연결된 호스로 유동식을 공급해 왔고, 기도 삽관을 하지 않았을 뿐 외부 장치인 산소공급 튜브를 사용하는 등의 조치를 실시해 ‘사실상의 연명치료’를 했다며 이번 김 할머니 사례를 존엄사로 보기 힘들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김 할머니의 호흡기 제거는 대법원의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확정판결에서 비롯된 것으로, 김 할머니 가족들이 소송을 제기할 때부터 이미 존엄사 논의는 시작됐고, 나름의 기준을 세워 법제화를 추진하는 단계까지 나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사회 분위기도 ‘존엄사’를 인정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존엄사를 찬성한다는 국민들의 비율이 높게 나타난 데 이어, 경실련에서 지난 대법원 확정판결 때와 마찬가지로 김 할머니의 소천을 즈음해 또다시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거부할 환자의 권리를 법제화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미 여러 국회의원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등에 업고 관련 법률을 제출해 놓은 상태다. 애매한 기준으로 혼란을 겪은 의료계도 법제화에 적극적이다.

‘생명’에 관한 문제에 대해 가장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해온 기독교계에서도 지난해 확정판결을 계기로 존엄사 문제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통일된 목소리가 나오지 않고 있고, 사회 여론을 바꿀 수 있을 만한 합리적이고 창조적이며 기독교적인 대안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기독교계에서 발표한 공식 입장이라면 지난해 3월 국회 발의된 존엄사 법안에 대해 한기총이 발표한 “생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된 신성한 것으로 어떤 경우에도 존중돼야 하며,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 생명의 가치는 실용적 효용성이나 삶의 질에 근거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성명서가 있다. 이외에 다수의 기관에서 세미나를 개최했고, 한국기독교생명윤리협회 등에서 의견서를 발표한 정도다.

사람의 ‘목숨’이 달린 문제조차 철저히 사회경제적 관점에서 재단해 버리려는 이 시대에, 기독교계가 답해야 할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 논의의 쟁점은 서너 가지다. 가장 기본적으로 ‘연명치료 중단의 대상은 누구인가’에서부터 ‘환자 가족들이 치료 중단을 대리 결정할 수 있는가’ 또는 ‘환자 자신에게 연명치료 중단을 결정할 권리가 있는가’, 그리고 ‘존엄사의 명칭’ 문제를 비롯한 ‘안락사 허용여부’ 문제 등이다.

한기총의 존엄사 관련 성명서를 기초했던 한기채 목사(중앙성결교회)는 지난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미끄러운 경사면의 원리(The Slippery Slope)’라는 의료용어에 대해 이야기했다. 한 가지를 허용하면 경사면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듯 다른 사안들도 허용할 수 밖에 없다는 이론이다.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인정하면 점차 소극적 안락사, 그리고 적극적 안락사도 인정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교회는 하나님 주신 소중한 ‘생명’의 존엄함을 바로 가르치고, 이와 함께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관문인 ‘죽음’을 끝이 아닌, 자연스러운 변화 과정으로 받아들이게 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살과 낙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의 자폭테러와 현재의 ‘존엄사’ 문제 등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생명에 대한 바른 가치관이 정립되지 못해 나타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또 이상원 교수(총신대)의 말처럼 김 할머니가 벌였던 201일간의 사투(死鬪)에서도 나타나듯 인간 생명의 종결권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믿음 아래,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다 찾아오는 죽음을 당당하게 맞이하는 것이 진정 ‘존엄한’ 죽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기독교적 인간관은 생물학적 의미의 생명 뿐만 아니라 이를 작동시키는 원리인 ‘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이와 같은 입장을 사회적으로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에 대한 가이드라인이나 입법 움직임을 보일 때 기독교계의 통일된 입장으로 강력히 전달해야 할 것이다. 김 할머니 판결 당시 1심 판사가 했다는 “기독교 쪽은 교파가 많아 판결을 위한 의견을 청취하지 못했다”는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물러설 수 없는 ‘생명’에 관한 입장인 만큼, 필요하다면 천주교나 불교계 등 이웃 종교들과도 연대해 사회경제적으로만 판단하려는 의료계나 시민단체들에 맞서 종교계 전체의 입장을 정리해 전달하는 일도 필요할 것이다.